히 13장 20-25 (양의 큰 목자)
히 13장 20-25 (양의 큰 목자)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목자의 피
2002년 8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 20-25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13: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13: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13: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25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찌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안맞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할 때는,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에게 제일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는 대표적인 것이 돈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아갈 때는, 결코 인간에게 값을 요구할 만을 것을 가지고 오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값없이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오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최대의 성의조차도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사랑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인간 세계에는 무참하게 천대받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은 자기 딴에 성의껏 장만한 헌물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있을 인간이 아닙니다. 가인이 애초부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삐치는 일도 없었을 것인데 자신이 뭔가 신을 향하여 했다다는 것을 고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뒷조치에 대해서 갑자기 안색이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복에 나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그래서 이 땅에 피가 흘려졌습니다. 아벨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이 인간 세계에서 피를 흘려야 하시면서 아벨의 피와 연관시켰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벨의 피와 연관시켰을까요? 그것은 아벨의 피는 난데없이 생긴 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흔적이 됩니다. 즉 아벨의 피에는, 인간들에게 내장되어 있는 원초적인 무지와 죄악이 어떤 식으로 밖으로 표출되는가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아벨의 피'에는, 인간들이 하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바른 모습에 대해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몸짓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 아벨의 피와 자신의 피를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곧 인간 전체가 얼마나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유발된 정신 상태가 곧 이 땅에서 하나님마저 배척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성의의 정성을 다할 때는 하나님조차 함부로 무시해서는 아니된다는 주장이 곧 인간의 마음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인간 세상에 무엇을 앞세우면서 오셨습니까? 오늘 본문 20절의 말씀처럼 '언약의 피'입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언약의 피'입니다. 그냥 '피'는 모든 인간이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피'는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언약의 피'를 앞장 세우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아느냐?"고 다구치면서 말입니다. 물론 이 언약의 피는 '값없이' 주시는 겁니다. 댓가를 받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의 피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속내를 갖고 있는가를 다시 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인간들의 순교의 피는 아닌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지킬 위인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 밖에 없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구원이나 죄용서 문제 때문에 걱정할 필요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완성하시고 마무리 되었던 그 피가 곧 언약의 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피 가지고 무엇을 하시려고 합니까? 출애굽기 19장과 24장:8절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성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려고 하십니다. 거룩한 백성이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요? 백성들 머리 위에 그 언약의 피를 뿌립니다. 즉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언약의 피로 온통 적시어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자 합니다. 피가 묻힐 때만 거룩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가안의 제사처럼, 돈 바치고 재물 바치고 자신의 성의와 열성을 바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결국 이 땅에서 집단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드는 원인을 제공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된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인도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큰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는 기존의 모든 조직체에 있어 지배자의 통치력을 확고히 하는데 좋은 비유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사용되는 비유입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위상 관계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양 천마리를 모아놓아도 목자 하나 보다는 못하고 목자 한 사람의 발언이 양 만 마리의 지혜보다 더 낫다는 겁니다. 무조건 맹종하고 복종하라는 분위기를 강요하는데는 목자와 양의 비유 더 멋진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 가운데는 자칭 목자라는 작자들의 음흉함을 주로 드러내시는 말씀도 많이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같은 경우에 보면, 선한 목자와 선한 목자 아닌 자로 나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선한 목자와 강도와 도적과 이리로 분류해 버립니다.
즉 "나는 선한 목자 노릇에 영 자신이 없으니 조용히 양 곁을 떠나버리자"라는 그런 자들이 목자를 사칭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와 양이다. 내 밥이다. 닥치는대로 뜯어먹고 갈취하자. 더 나올 게 없는 양은 방치하거나 차버려야지"라고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나선 자들이 소위 선한 목자로 행세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선한 목자는 어떻게 나오시는 분입니까? "여러분, 저는 선한 목자입니다"하고 떠벌이고 다니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아예 양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귀한 목숨을 포기한 분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그냥 목자가 아니라 '큰 목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크다는 말입니까? 더 강압적으로 양을 지배한다고해서 큰 목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큰 목자인지 정말, 말 안듣고 말썽피우고, 하찮고, 보잘것없고, 제 갈길도 모르는 시시한 못된 양을 위해서도 과감하게 자기 목숨을 던지실 정도의 큰 목자입니다.
즉 죽음으로서 선한 목자의 목자됨을 보이신 겁니다. 세상 목자들은 가르치는 것으로 목자의 역할을 다 한 것으로 여깁니다. 자기 말을 안듣고 안 따라주면 양 아니라고 미워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르치는 선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자기 양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들 위에 말입니다. 출애굽기의 상황처럼 피를 뿌리신 겁니다.
인간들이 어떤 점에서 철이 없는가 하면, 사는 이유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살겠다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사는 이유도 없이 살면, 성공을 했던 출세를 했던 그런 것은 정말 무의미한 짓들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는 의미를 못 가지는가 하면, 만약 뭔가 보람있는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싶더라도 죽음이라는 세력이 밀려와서 그것마저 싹 쓸어가버리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의 소켓트에 꽂히지 않는 한 그 사람이 무슨 거창한 위업을 달성해서 당장 본인에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업적은 본인에게 허무한 것이 됩니다. 마치 풀의 핀 꽃은 화려하지만 풀 자체가 시들어 간다면 결국 꽃도 그 원줄기의 풀과 함께 사그라들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진정한 의미는 생명선과 통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 점을 하나님은 아시면 예수님도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약의 피'이신 분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겁니다. 그 언약의 피를 주시기 위해 목자이면서도 양을 위해 귀한 목숨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언약의 피가 생면선이 되는 겁니까? 보통 인간들이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보따리를 조사해 보면, 평소에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서 골라 잡았던 온갖 잡스런 소망들은 다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야 이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저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흘리신 언약의 피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완성으로서 그야말로 '의'의 결정판입니다. 마태복음 7:1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완성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겁니다.
양을 위해 흘리신 목자의 그 피는 이웃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것은 곧 의입니다. 의가 있으면 저주는 물러가고 복만 주어집니다. 영생이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의 피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즉 그 언약의 피 안으로 초대된 사람은 마치 풀장에 풍덩 빠진 것처럼 예수님의 의의 풀 안으로 풍덩 빠진 것이 됩니다.
그야말로 값없이 얻어진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과 언약의 피가 있는 자만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의 풀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해서 의인이라 인정받았습니다.
로마서 4:4-8에는 다음과 같이 그 내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의의 세계 안으로 초대받은 것도 은혜요, 그 안에서 이 의의 세계를 믿게 된 것도 아브라함의 노고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세계 속으로 초대하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그 복이 우리 안에서도 작용함을 세상을 알리고 하시는데 있엇습니다. 시편 135:4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이 땅에 나타났으며 오늘날 성도들이 왜 출현하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새로운 소유물을 생산해 내신 결과인 것입니다.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기 위해 성도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땅을 사는 이유입니다. 값없이 주신 것이니 그 어떤 값어치보다 더 가치있게 간직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식으로 불안하게 살지 말고 생명선을 꽂힌채로 오직 하늘의 영생만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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