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8. 수학으로 규명하는 진리성경신학-

8. 수학으로 규명하는 진리
보통 서양 철학에서 진리를 정의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통 '대응설'이라고 부르는데, 실제와 일치되는 지식만이 진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낙하는 돌멩이의 속도는 낙하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명제는 실제로 돌멩이가 떨어지는 속도와 일치할 때만(대응할 때만) 참이다.
다른 하나는 '정합설'이라고 부르는데, 제시된 명제들 간에 모순없이 들어맞을(정합) 때만 참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수학은 이런 지식이 추상화된 모델 노릇을 해왔다. 수학에서는 추상 능력이 중요하다. 추상이란 상이한 것 가운데서 공통된 어떤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를 다른 하나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대상인 수나 형태부터 추상능력의 산물이었다.
기하학을 대수화하는 것은 기하학적 내용을 문자와 기호들의 관계로 추상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했다.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세계, 계산공간 속으로 밀어넣는 것도 마찬가지였고, 미적분이 해석학(解析學)으로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기하학적 내용을 제거하여 수학적 변환의 방법으로 추상할 수 있었을 때였다. 이런 점에서 추상이란 모든 곳에서 어떤 동형성을 찾아내는 활동이라기보다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고, 그로써 당연시하고 있던 기존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 관계를 만들어내는 활동이다. 즉 그것은 모든 것의 공통된 '기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기존 관계를 변환시키는 활동이다. 이렇게해서 전체를 부분으로 추상화시켜서 이해하려고 하는 인간의 꿈은 오래되었다. 그 최초의 의식적 태도는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에서 나타났다.
그는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우주의 기본 구성 단위를 찾아 낼 수 있다면 모든 사물은 그 구성 단위로 공약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만물은 수(數)이다' 즉 만물은 구성 단위의 정수배라는 선언으로 나타난다.
수학적 아이디어는 어떻게 소통이 가능한 것일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수학적 아이디어를 감지할 때마다 플라톤식 수학적 개념의 세계와 교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라톤식 관점에서는 수학적 아이디어가 그들 자체의 존재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상적인 플라톤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 플라톤 세계는 지성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수학적 진리를 보게 되면 그의 의식은 이 아이디어(이데아)의 세계로 뚫고 들어가 직접적인 접촉(지성을 통해서만 도달함)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수학자들이 서로 의사 전달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 수학적 진리로의 직접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들의 의식은 수학적 진리를 '본다'는 과정을 이용하여 직접 감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감지에 종종 수반되는 영어 감탄사 중엔, [그래 이제 보여 라는 것]이 있다 (O, I see!) 각자가 플라톤의 세계와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식 교감이 일어나면서 그들 마음 속에 떠오르는 영상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사 전달이 가능한 것은 각자가 동일한 플라톤 세계에 접해 있기 때문이다.
수라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또 공간에서 위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도 현실 세계에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기하학적 개념, 가령 원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피타고라스는 수나 형상과 같은 수학적 존재가 우리에게 지각경험이 나타내는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는 궁극적 소재라고 말했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는, 수가 현실계의 기저에 존재한다는 피타고라스 학설의 세련되고 수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를 점의 패턴으로 표시하는 그리스인의 방법 때문에, 수의 개념과 기하학적 도형배치의 개념은 오늘날의 경우처럼 분리되고 있지는 않다. 또 피타고라스는 확실히 순수한 수학적 존재하고 할수 없는 도형의 형상 그대로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인슈타인과 그의 후계자들이, 가령 중력 같은 물리적 사실은 시공간적(時空間的) 성질을 갖는 국소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단정했을 때, 그들은 이미 순수한 피타고라스 전통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분류라는 것은 개별적 사물인 직접 구체성으로부터 완전한 추상성으로서의 수학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중간에 있는 하나의 집이라고 볼 수 있다. 종개념은 종의 성격을 중요시하고 유개념은 유의 성격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계산, 측정, 기하학적 관계, 순서의 형들과 같은 수학적 개념으로 자연적 사실들과 연관시키는 과정에서, 합리적 사유는 한정된 종이나 유에 포함된 불완전한 추상관념으로부터 수학의 완전한 추상관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기하학의 공리들은 단지 오로지 순수 공간적인 관계만을 지시하는 원리는 아니다. 그것들은 크기를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크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뭔가 일정한 절차를 규정해, 그에 따라 크기들을 비교하고, 부분으로 분석하며, 측정할 수 있을 때 뿐이다. 모든 공간적 측정, 그리하여 공간에 기반을 둔 모든 크기에서는 따라서 공간적 도형의 운동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 도형의 형태와 크기는 운동 중에 불변인 것으로 가정한다. 기하학에서는 이와 같은 공간적 도형들을 보통 기하가적 물체, 면, 선, 등으로 부르는데, 이는 이때 우리가 물리적 대상이 보여주는 물리적 내지 화학적인 여러 차이를 무시하고 그것을 추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그 유일한 물리적 특성으로 우리는 오직 강성(강체 rigid)만을 가정할 따름이다. 그러나 물체의 강성에 대한 기준으로 우리는 그 합동 관계가 이동이나 회전 중 어느 때나 불변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기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하학의 공리들은 공간적 관계를 표현해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운동 중인 강체의 역학적 관계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술해 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강성의 공간적인 도형 개념을 모든 경험과 독립해 구성한 선험적 개념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반드시 경험에 대응할 필요는 없다. 물리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귀납에 의해 얻어 낸 개념과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이상적 강성을 가정한다면, 칸트의 추종자일 경우 기하학의 공리를 선험적 직관 내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해, 그것이 경험에 의해 입증과 반박도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어느 물체가 강체냐 아니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와 같은 공리를 통해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기하학의 공리는 더 이상 칸트의 의미에서 종합적인 명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때 그 공리들은 단지 측정에 관해 강체의 개념이 분석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 만큼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오직 문제의 공리를 만족하는 그와 같은 도형들만을 강체로 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기하학의 공리에 덧붙여 물체의 역학적 특성에 관한 또 다른 명제를 첨가한다면 즉 만일 관성의 법칙을 첨가하거나 아니면 여타 일정한 조건하에서 물체의 역학적 내지 물리적 특성들이 그 위치에 무관하다는 명제를 첨가하기만 한다면, 그렇게해서 얻어진 명제들의 체계는 진정한 내용을 지니게 되어 경험에 의해 입증하거나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7세기에 들어서서 미한정(未限定)의 독립변수를 포함하는 여러 함수의 성질을 고찰하는 일반 해석학이 성립된다. 이러한 함수관념이 수학의 추상적 영역을 지배함으로써 자연의 질서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자연법칙으로 반영시키고 있다. 보다 추상적으로 발달한 수학이 그 당시의 과학에 미친 영향의 한 가지 특수한 예로서 주기(週期)의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반복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일상 경험을 통해서 명백하다.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달의 위상(位相)이 반복해서 나타나며, 사계절이 반복되면, 회전하는 물체는 반복해서 원위치에 되돌아가며, 심장의 고동과 호흡이 반복된다. 어디를 향하나 반복되는 것에 직면하게 될 정도다. 반복을 떠나서는 지식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반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과거의 경험과 연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반복의 규칙성을 떠나서는 측정한다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정확성의 관념을 획득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반복이라는 것이 근본이 된다. 16,7 세기의 주기의 이론은 과학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케플러는 각 유성(遊星)이 저마다의 궤도를 그릴 때의 주기와 연결시키는 법칙을 발견하였다. 갈릴레오는 흔들이의 주기적 진동을 관찰하였다. 뉴턴은 소리의 성김(소 疎)과 조밀함(밀 密)과의 교차에 의한 주기적인 파동이 공기를 통과할 때 생기는 공기의 교란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메르센은 바이올린 현의 진동 주기를 그 현의 밀도, 장력(張力) 및 길이와 연결시켰다. 근대 물리학은 주기라고 하는 추상관념을 수학자들이 미리 추상적으로 풀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탄생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각법은 직각삼각형의 각과 그 삼각형의 양변과 사변과의 비율관계를 관련시킴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그래서 새로 발견된 해석학이라는 수학의 영향으로 삼각법은 완전히 추상적인 되었으며, 또 그렇게 추상적인 것이 됨으로써 유용하게 된다. 삼각법은 전혀 반대되는 여러 물리적 현상의 집합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밝혀주었고, 또 동시에 그러한 집합의 어떠한 것도 그것의 여러 특징을 분석하고 서로 관계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이처럼 수학적 발견은 그 접촉면의 면적을 넓혀 준다.
물리모형들 중에서 일부는 다른 것들보다 우수하다. 그런 모형들은 특히 천문학과 입자물리학에 뛰어난 효력을 발휘한다. 상승하는 물체와 힘들이 그 모형의 수학적 정의에 정확히 따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학은 물리학자들이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을 정의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쿼크는 순수한 수학적 구성물이다. 쿼크는 수학적 정의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쿼크의 특성들- 매혹(charm), 색(color), 기묘도(stranger)-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 세계에서는 어떠한 상응성도 없는 순수한 수학적 특성들일 뿐이다. 수학이론들은 생물학적 영역과 같이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상들에 적용되었을 때 그 효력은 떨어진다. 그것은 유기체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학적 모형들이 자연에 대한 진리를 획득한 능력에 대해서 신중해야 한다.
수학적 진리는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술적인 관점에서의 실제 정보는 그 발견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모든 정보는 이미 거기에 죽 있어 왔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해답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 자신의 생각, 즉 (예를 들면 수학적 발견)이란 기억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과도 아주 잘 부합된다. "실제로 나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알맞은 수학적 개념을 찾지 못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깜짝 놀라곤 한다. 양쪽 모두 찾고자 하는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발견되지 못한 수학적 개념의 경우에는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겠지만. 의식이라는 것이 필연적 진리를 감지하는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수학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플라톤 세계와 직접적인 접촉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고리즘적 과정이 아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수학적 유산과 그 훈련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애매 모호한 규칙의 권위에는 머리 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증의 각 단계에 대하여-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그것이 좀더 간단하고 명료한 것으로 바뀌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학적 진리란 옳고 그름이 사람들의 이해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한 교리 따위는 아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명백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의 진리값은 명확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모델은 추상으로 머물지 않고 모든 사물을 계산 가능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즉 수학자들은 모든 수학 문제를 기계적으로 풀이할 수 있는 절차, 이것을 '알고리즘'이라고 하는데 이 절차가 반드시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어떤 문제라도 푸는 기계, 즉 세포자동자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오토마타 (자동인형) 이론을 간단히 소개한다. 오토마타 이론은 문제를 기계적으로 푸는 방법을 연구하는 이론이다.
어떤 문제, 예를 들어 수학 문제를 기계에게 맡겨 풀게 하려고 기계를 만드다고 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
보통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단계마다 절차를 밟아가면서 하나 하나 해결해 간다. 즉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문제로 분해해서 하나씩 해결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문제를 분해해서 기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까지 문제를 쪼개야 한다, 그리고 이들 문제를 하나씩 밟아 기계적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이 때 각 단계는 서로 그 내용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기계의 상태도 무언가 달라야 한다.
예를 들어 목수가 집을 짓거나 할 때에 각 단계마다 목수가 쓰는 연장이 달라지듯이 기계의 구조변화를 상태변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연장을 다룰 줄 아는 목수일수록 그가 만들 수 있는 물건의 가짓수가 많아지는 것처럼 기계의 상태수가 많아질수록 기계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연장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되면 연장의 종류가 늘어나고 그것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것이 번거럽게 된다. 되도록 한 연장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기계의 상태수가 많아지만 기계를 설계하고 만들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태를 갖추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 오토마타 이론으로서 기계가 가지는 상태수는 유한한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유한상태 기계를 생각한다.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은 독일의 수학자 힐베르트(D. Hilbert. 1862-1943)이다, 힐베르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에 사는 대선배인 칸트는 그 주요 저서 순수이성비판 속에서 인식론에 있어서의 '사실문제'와 '권리문제'와의 준별(峻別)을 설명하였다. 초월론적 철학의 과제는 '사실 문제'가 아니고 '권리문제'이라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법률용어에서 빌린 이들의 말을 사용한다면 통상의 수학이 '사실문제'의 해명을 전념할 일로 삼고 있다면 초수학의 관심사는 '권리문제'의 탐구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초수학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원래의 즉 현실의 수학의 무모순성에 대한 증명에 있기 때문에 이 학문은 '증명론'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증명하는 방법'의 의미가 아니고 하위수준의 증명의 구조와 타당성을 상위의 즉 메타레벨에서 '증명'하는 학문의 의미이다. '초수학'의 위치 부여와 역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은 이리하여 세 가지로 분류되는 것으로 되었다. 즉 비형식적 수학(통상의 의미에서의 수학)과 형식적 수학(공리적으로 형식화된 수학)과 초수학의 세가지이다.
형식적 수학은 비형식적 수학을 형식화함으로써 얻어지고 비형식적 구舊수학은 형식적 수학을 해석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리고 그 정당성을 형식적 수학의 무모순성에 의해서 보증하려고 하는 것이다. 힐베르트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제1회 국제수학자자회의에서 23개의 미해결 수학문제를 내놓았다. 여기서 10번째 문제인 부정방정식의 해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곧 모든 수학문제를 일반적으로 해결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하느냐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수학자들이 덤벼들었다.
수학자들은 먼저 알고리즘의 개념을 분명히 하였다. 알고리즘은 다른 말로 계산 가능한, 재귀(귀납)적인, 효과적인 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알고리즘은 유한 회수의 절차인데 이것을 하나의 자연수에 대응시킨다. 이 대응을 귀납적 함수(일반적으로 수론적 함수)라고 하는데 이 함수를 일반화시켜서 수학적으로 정식화하는 문제이다.
1924년에 쇤핀켈(M. Schonfinkel). 1929에 커리(H. B. Curry), 1934년 괴델과 허브랑이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후 클린은 이들의 결과를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켰으며 처치와 클린은 λ기법으로 λ정의 가능한 함수개념을 도입했다. 여기에 튜링이 나타난다.
어떤 집합 S= { x1, x2, ... xn }의 원소에 관한 명제 P(x1, x2, ... xn)가 주어질 때, S의 어떤 원소들의 조합 (x1, x2, ... xn)에 대해서도 P(x1, x2, ... xn)가 성립하는가 어떤 가를 유한 횟수의 조작으로 판정할 수 있는 일반적인 수순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문제를 그 명제의 항진문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집합 S를 다음과 같이 조건제시법으로 나타낼 때,
S= {x|p(x) }
명제 p(x)는 S안에서는 항진명제이며, 이 명제가 S에 대해 항진인지 판정하는 수순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원소의 조합에 대해서 즉 S의 진부분집합에 대해서 명제 P가 성립하는가 어떤 가를 판정하는 일반적인 수순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문제를 그 명제의 충족문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문제를 합쳐서 그 명제의 결정문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집합 S를 자연수 전체집합이라고 하자. 그러면 짝수의 집합에 대한 명제, '약수는 적당한 두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명제가 참인지 어떤지 증명하는 절차를 찾는 문제가 그것이다. 또 임의의 짝수를 구하는 공식 2n(n은 자연수)도 있다. 이렇게 공식으로 어떤 집합의 원소를 모두 구할 수있고 그 집합이 가산집합이라면 그러한 집합을 귀납적 가산집합(recursivery enumerable set) 또는 재귀적 열거 가능한 집합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 어떤 집합이 그 자신과 그 여집합이 모두 귀납적 가산집할일 때 귀납집합(recurisive set)이라고 한다.
귀납적 가산집합이라도 귀납집합이 아닌 것이 존재한다. 프랙탈 기하학에서 등장하는 만데브로트 집합은 비귀납 집합이라고 알려졌다. 비귀납 집합은 프랙탈 기하학에서 보는 것처럼 복잡한 모습을 하고 있다.
튜링기계는 비귀납적 집합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튜링기계의 연장선상의 인공지능을 불가능할 것이라고 조저 펜로즈는 주장했다.
그러므로 튜링 기계의 정지 여부에의 질문에 대한 알고리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튜링은 모든 수학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범용 알고리즘이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처치도 자기 나름의 다른 방식을 통해서 이를 보였다). 힐베르트의 [열 번째 문제 ]는 결국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은 어떤 하나의 경우에 대하여 주어진 수학 문제의 결과가 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거나 혹은 주어진 튜링 기계에 대하여 그것이 엄출 것인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창의력을 발휘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상식에 의존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문제에 답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튜링 기계의 명령이 리스트 가운데 STOP 명령이 하나도 등장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STOP 명령만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상식적인 생각만 하더라도 그것이 정지할지 안 할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수학의 문제에 대하여 다발 수 있거나 모든 튜링 기계와 모든 데이터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하나의 알고리즘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마치 결정 불가능한 수학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보이게 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어떤 특별한 괴상한 튜링 기계가 있어서 그것이 어떤 특별히 괴상한 숫자에 대해서 멈출 것인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어떤 하나의 문제에 대한 해결 불가능성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군에 대한 알고리즘적 해결 불가능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경우에 대해서는 그 대답은 항상 '네' 혹은 '아니오' 이다. 그러므로 그 특정 문제를 결정짓는 알고리즘, 즉 그 문제에 대하여 '네' 혹은 경우에 따라서 '아니오' 하고 대답하는 알고리즘은 분명 존재한다. 물론 문제는 어떤 알고리즘을 사용할 것인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명제들의 집합에 대한 체계적 결정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명제에 대한 수학적 진리값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알고리즘들이 자기들이 알아서 수학적 진리값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알고리즘이 맞는가 틀리는가는 항상 그 밖에서 결정해 주어야 되는 것이다.
수학적 진리란 단순히 알고리즘만으로 확신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내가 믿는 것은 의식이 수학적 진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어떤 수학적 논점이 옳다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본다'는 것이 바로 의식의 진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수학적 진리를 대할 때마다 의식이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괴델의 정리의 정당성을 확신한다 함은 이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본다'는 과정 자체의 비알고리즘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따르면 어떤 공리가 주어지더라도 그 공리의 개수가 유한하다면, 그 공리를 연역추론함으로써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즉 결정할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달리 표현하며, 괴델의 정리는 모든 질문의 답이 결정될 수 있도록 유한수의 공리를 명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현재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질문을 분석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대답할 수 없는 새롭고 흥미로운 질문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괴델의 정리는 이런 방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 두뇌의 역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다. 괴델의 정리는 다만 유한수의 공리로 모든 것을 대답할 수는 없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 질문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 증명된다는 그 질문에 임의적인 답을 부여해서 계속해서 추론해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결정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긍정적인 대답이나 부정적인 대답 사이에 선택해야 하는 갈림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수많은 양자택일(갈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는 없다. 어떤 의문에 답이 주어지면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앞에서 결정할 수 없었던 의문이 결정된다. 결정할 수 없는 의문은 언제나 분기를 만들어내며 선택을 강요한다.
괴델의 정리는 이미 주어진 유한수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이해의 범위를 규정한다. 선택의 수가 클수록 이해의 범위도 더욱 넓혀진다. 유한수로 고정된 공리가 모든 것에 답을 제공하는 정적인 세계에 만족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이해력은 역동적이다. 이해력이 커질 때마다 더 많은 의문에 답을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갈림이 있을 때마다 선택을 하게 됨으로써 이해 범위도 더욱 넓어진다. 따라서 언젠가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결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과학이 당면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결국 괴델의 정리 때문에 위축되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곰곰이 따져보면, 수학이 형식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수학적 증명을 더욱 명쾌하게 보여주려 애셨다. 힐베르트는 유한수의 알파벳, 모순되지 않는 명제의 집합을 명쾌하게 나열 할 수 있는 유한수의 문법규칙, 그리고 유한수의 논리적 추론규칙과 원시적(혹은 공리적 명제를 가정함으로써 인공 언어를 만들어내었다. 그런 시스템, 즉 형식 언어에 근거해서 보편적 알고리즘은 형식 언어로 표현된 증명의 타당성을 결정할 수 있다. (자기 창조의 타당성, 자기 의) 힐베르트는 수학의 정리를 적절한 형식 언어로 증명할 수 있는 정리로 환원하려 했다. 그러나 괴델의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식체계가 제아무리 복잡해지더라도 형식 체계 내에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자연수에 대한 명제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공리가 모순이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런 부정적인 면, 즉 증명으로 여겨지는 명쾌한 정의를 줄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그러나 괴델의 정리는 다른 각도에서 해석할 때, 즉 자연수에 대한 참 명제는 논리적 추론을 동원하더라도 유한수의 공리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해석 할 때, 이 공리는 자연수에 대한 모든 참 명제 담긴 정보량이 무한하다는 뜻을 담게 된다. 이런 것이 인간의 모든 창조물과 독립적인 실재의 뚜렷한 특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적 성찰이라는 문제로 넘어가면, 집합론의 발전과 더불어 동사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패러독스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모든 집합의 집합도 하나의 집합이라고 인정 할 때, 원소로서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 모두의 집합을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결과 원소로서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 모두의 집합은 조금 전 집합의 여집합이 된다. 후자의 집합이 자신의 원소로 갖느냐 않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러셀은 여기에 패러독스가 숨겨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으로 '그렇다'해도 모순이 생기고 '아니다' 해도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피하려면 러셀의 제안대로 형(type)에 따라 논리 명제를 계층화하면 충분하다. 먼저(형 0)에 속하는 원소들에서 시작해서 다음에는 그 원들을 (형 1)에 속하는 것들과 명백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이처럼 형을 계층화하며 구별하는 목적인 형들이 뒤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속하는 집합'이란 표현은 분명히 통사적 오류이다. 따라서 논리가 계층화되면다면 그런 패러독스는 저절로 사라진다.
결국 질서를 만들어내는 문제이다. 이처럼 형을 계속 구분하다보면 사고의 매커니즘을 계층적으로 구조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소는 집합보다 간단하고 계층적으로 덜 높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형식적 체계의 공리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번 공리계가 모순을 안아버리면 그 공리계로부터는 어떠한 명제로 유도해낼 수 있는 것이다. 공리계의 무모순성 즉 거기에서 서로 모순되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에 대한 불가능성이 엄격히 까닭이다. 이 '무모순성'이라고 하는 용어는 영어로 말하면 'consistency', 즉 일상용어로서는 '시종일관, 정합성(整合性), 언행일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의미가 있고 동시에 생산적인 공리계에는 '무모순성' 이외에 '완전성', '독립성'이라고 하는 나머지 두 가지의 중요한 성질이 요구된다. '완전성'이란 형식적 체계의 모든 올바른 정리가 그 공리계로부터 증명가능한 것이다.
무모순성과 완전성과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고 공리계를 강하게 하면 증명할 수 있는 명제가 증가해서 완전성을 얻을 수 있게 되나 그 때 너무 지나치게 강하면 어떤 명제와 그 부정(否定) 명제의 양쪽이 증명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즉 무모순성이 깨져 버리는 것이다.
역으로 공리계를 약화시켜서 모순을 없애면 증명가능한 명제가 극단적으로 감소되어 버린다. 배중률을 공리계에서 제거한 직관주의가 그 좋은 예이다. 이와 같이 공리계의 조정(調整)은 상당히 스릴 넘치는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완전성이란 모든 올바른 정리가 증명가능한 것이다'. 이 정의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이라는 것과 '증명가능'하다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점이 완전성 문제를 생각할 때의 요점으로 된다. 더구나 실제의 수학의 구체적인 명제에 대해서는 진위(眞僞)가 분명하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진실이다'라는 것과 '올바르다'라는 것과의 구별이 또한 문제가 된다.
괴델의 완정성 정리는 논리학의 형식적 체계에 대해서 증명된 사항이다.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논리학의 체계는 완전하다. 즉 '논리적으로 올바른' 명제라면 어떠한 것이라고 그 체계 내에서 '증명가능'하다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상식적인 논리적 직관에는 초수학적인 뒷받침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논리의 다음으로 수학이 문제로 되는 여기서는 '수학적으로 올바르다'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올바르다'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인 올바름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추론의 올바름에 대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A이면 A」가 그 좋은 예이고 A가 진실이든 허위이든 이 추론 바로 그것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을 '항진(恒眞)명제' 또는 '토톨러지'라 부른다. 토톨러지는 일상용어로 '동어반복'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수학적인 올바름은 이것과는 달리 사항의 진위가 추론된다. 즉 수학에 있어서의 명제는 수학적인 내용을 갖는 이상 원리적으로 진위가 미리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소위 '자유변수'를 갖지 않는 경우). 그래서 수학적인 형식적 체계에 대한 완전성의 요청이란 '모든 참된 명제가 그 체계 내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으로 된다. 어쩐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것이 자명하기는커녕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버린 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였던 것이다.
다시말해 어떠한 공리계도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어떤 공리계도 무모순성(정합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수학자들이 증명한 바에 의하면, 유리수의 숫자도 무한개이지만 무리수의 숫자는 무한히 큰 무한개가 되고, 따라서 세상 만물의 현상에는 준-주기계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날 것이다.
수학자의 세계에 존재하는 객체들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가? 어떤 관점에 따르면 거기에는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수학적 객체들은 단지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학자들이 만들어 낸 정신적인 이상체로서, 때로는 주위 세계의 외형적 모습이나 질서 같은 것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이상체라는 것이다. 그들이 과연 단순히 인간의 마음 속에 형성된 임의적인 산물 이외의 것일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수학적 개념들이 그 어떤 특정 수학자의 정신 세계를 초월하는, 그 자체의 심오한 현실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종종 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사고가 오히려 어떤 외적인 진리로 이끌려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진리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극히 일부분만 내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델브로트 집합 구조의 복잡성에 대하여 완전한 상세한 내역은 실제로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어느 컴퓨터로도 완전히 밝혀 낼 수 없다. 이 구조는 마음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실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학자나 컴퓨터 전문가가 이 집합을 관찰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선택하건 간에, 근본적으로 똑같은 수학적 구조에 대하여 근사값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계산 수행에서 어떤 컴퓨터를 사용하든지 (컴퓨터가 정상적인 정확성만 유지한다면)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컴퓨터의 속도외 기억 용량, 그래픽 디스플레이 능력 등의 차이로 인하여 표현될 수 있는 정밀도, 그리고 이들을 생성해 내는 속도 정도일 것이다. 여기에서 컴퓨터는 본질적으로 마치 실험 물리학자가 실세계의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서 실험 기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만델브로트 집합은 인간 정신의 발명품이 아니라 그것은 발견이었다. 에베레스트 산이 그러한 것처럼 만델브로트 집합은 다만 그 곳에 있는 것이다.
승패가 분명 나게 되어 있고 상대방의 왕을 잡는 사람이 이긴다는 이것이 장기의 모든 률을 지배한다. 즉 하나의 명령은 하나의 제안 것들의 명령을 지배한다. 과학의 행위도 이와마찬가지이다. 무슨 목적으로 그 률을 만들고자 하는가? 비가 오지 않는데 비가 온다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면 우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듯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 계산된 곱셈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고개를 흔들 것이다. 마치 개가 우리가 바라는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제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장기에 졌다고 모두 것에 졌다고 할 수 없다. 수학과 과학은 무한에 승부를 걸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개의 영혼을 숫자 1 안에 들어가도록 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의 시대인 이 세기를 암흑기로 보았다. 과학의 시대의 어두움은 모든 것을 과학으로 귀착시키는 환원주의적 사유 방식이 초래하는 진정한 사유의 부재에 있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산할 뿐이다. 계산이 사유를 대체하는 과정은 형식언어가 자연언어를 대체하고 수리논리학이 철학을 대체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대체와 환원은 차이를 말소하는 작업이다. 계산과 사유의 차이, 형식 언어와 자연언어의 차이, 수리논리학과 철학의 차이의 말소는 과학과 철학의 차이의 말소로 소급되며 이것이 바로 과학주의의 주된 이념인 것이다.
수학이 다양한 각론들과 언어 게임들의 얽힘이라면 그 구성 요소에는 차이성과 유사성이 함께 혼재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각론들 사이의 차이성이 환원에 의해 말소될 수도 있다. 19세기에 이루어진 해석학의 산수화(arithmetization)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수학의 모든 분야가 하나의 체계(예컨대 화이트헤드/레셀 체계나 집합론 차계)로 환원된다는 것은 수학에 관련된 모든 언어 게임이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환원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이상이다. 그러한 환원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은 환원되는 내용을 보존하는 차원의 번역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새로이 규정하는 재해석이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학을 하나의 통일된 담론으로 간주하고 그 담론의 토대로서 메타 수학이나 수리논리학이라는 토대 담론을 각각 상정하는 힐베르트의 형식주의와 화이트헤드/레셀, 프레게의 논리주의는 수학의 실체를 외면한 매우 인위적인 수리철학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주의나 형식주의가 수학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한다는 철학적 견해, 즉 수학의 근거가 수학을 떠받치는 어떠한 이론적 철학적 하부 구조에 의해 마련된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수학의 토대는 수학 기초론이나 수리철학과 같은 이론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의 실체를 이루는 계산하기, 증명하기, 규칙 따르기 등과 같은 언어 게임에 대한 기술(記述)에서 찾아진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가 사용되는 문맥에서 주어진다. 수학에 있어서 그 문맥은 그 언어가 위치한 좌표계, 즉 체계에 해당하며 체계를 구성하는 적형식은 그 체계 안에서의 쓰임에 의해서 제 역할을 할당받는다. 이처럼 수학의 실체가 체계 내적 작업이라면 메타 수학적 담론은 수학을 구성하고 있는 체계에 대한 어떠한 위계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요컨대 메타 수학의 메타 언어가 수학의 대상 언어 바깥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 언어에 내재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힐베르트의 무모순성 증명과 같은 메타 증명은 다른 모든 증명과 마찬가지로 증명일 뿐이고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다른 불가능성 증명(예컨대 '자와 컴퍼스에 의한 각의 삼등분'이 불가능하다는 반첵의 증명)과 마찬가지인 불가능성 증명의 귀결이며 수리논리학의 주된 문제는 우리에게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의 문제이다.
수학은 다른 학문이나 담론과 분리되어 있다. 수학을 형성하는 다양한 체계들의 규칙과 적형식은 체계 안에서 그에 연관되는 언어 게임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한 체계가 다른 체계의 토대가 될 수 없으며 체계 내에서의 계산, 증명, 규칙따르기와 같은 인간의 실천적 언어 사용에 의해 그 체계를 구성하는 형식들에 의미와 역할이 부여된다.
그렇다면 수학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유한한 이 세계는 헬라 사상에서 볼 때 완전하고 자족적(自足的)인 그러한 세계가 아니었다. 역으로 무한한 신에 대비하여 불완전한 세계로 인식한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유한자인 인간에게 무한한 것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신의 무한이란 양적(量的) 무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 무한을 뜻한다. 그것은 양적 무한, 즉 무한정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서 질적 무한이란 이 세상에서 정신적 차원에에로의 이행을 말하는 것이다. 부동(不動)의 제일자(第一者의)로서의 완전성을 지닌 신의 세계를 뜻한다.
이것은 언어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언어와 존재 간의 일치라는 발상을 대표하는 철학사의 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서로 다른 의미 지평을 이루는 세계, 언어, 사유, 논리의 네 가지 영역이 그에게는 일정한 대응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세상에는 온갖 사물이 있고, 인간의 삶에는 각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있으며, 의식 세계에는 세상에 사물에 대한 생각과 판단이 있고, 논리 세계에는 의식의 판단을 정리하여 드러내는 명제가 있다. 세계-언어-의식-논리의 상응 관계는 두 가지 수준에서 드러난다. 기초 단위의 수준에서는 사물-단어-관념-개념이 상응하며, 구조의 수준에서는 사실-문장-판단-명제가 조응한다. 사실 세계에 대한 사유 판단은 언어적으로 표현되며 논리적으로 판정된다. 논리의 지평에서 올바른 것으로 판정된 명제는 언어적 표현으로 드러난 사유 판단이 사실적으로 진실임을 보증한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를 잣대로 언어와 판단을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재)배치함으로써 우리는 사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쌓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반스콜라적 성향을 지닌 중세 후기 철학자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오캄의 윌리암이다. 그의 신학은 그렇지 않지만 그의 철학은 노골적인 경험론이다. 윌리암에 따르면 계시받은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은 특수한 대상과 사건에 대한 감각적 관찰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형이상학적 지식(물리적 범위를 넘어가는 지식)이라는 것은 없다. 그의 좁은 인식론적 토대로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적 추론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지식의 추구는 '쓸데없이 복수(複數)의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성의 방법론적 원리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 오늘날 오캄의 면도날이라고 불리는 이 원리는 모든 경험론자의 철칙이 되었으며 지금도 과학적 방법의 한 구성 요소가 되고 있다. 이 원리의 현대적 형태는 보통, '실체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어떤 현상이든 소수의 요소만으로 이루어진 이론으로도 잘 설명할 수 있으므로 더 단순한 이론이 더 복잡한 이론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마치 손목시계는 전기 배터리를 동력으로 하고 있다는 이론과 보이지 않는 요정들의 힘으로 손목시계가 움직인다는 이론과의 비교 같은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 이론에 나온 보편자의 본질을 제거하고 가능한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형이상학을 오려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오캄의 면도날은 또한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인자들도 제거한다. 윌리암은 인관성을 이리스토텔레스가 '유효한 인자들'이라고 부른 것으로만 환원시키면서 기계론적 인과성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현대 과학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윌리암의 강력한 경험론 기획은 또한 신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논증도 배제한다. 안셀무스와 아퀴나스는 유한성 단계의 위계라는 관념에 의존하거나 유효한 인자들이 무한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캄에 따르면 그런 생각은 경험적 관찰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그릇된 형이상학적 관념일 뿐이다.
윌리암의 유명론에 따르면 오직 개별자만이 실재하며 보편자란 세계의 속성이 아니라 언어 속성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야채'를 보편적 개념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야채라고 부르는 다양한 유기적 실체들에 어떤 보편자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적 범주 속에 보편자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윌리암은 세계 속에 실재라는 개별 대상들 간에는 실제적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언어에서 보편적 범주를 만드는게 가능하다고 추론했다.
오캄에 따르면, 실재라는 대상이나 사건들 간의 진정한 유사성과 차이에서 자연적 사물에 관한 과학이 생겨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인과 법칙들을 분류할 수는 있어도 인관성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 세계 내의 대상이나 사건들 간에 필연적인 연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세계에서 필연성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 기관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학적 배려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이 전능하면서도 불가해서한 존재라면 자연 세계의 모든 사건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은 전능하므로 아무리 인간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건이라도 마음대로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암에 따르면, 실제로 그러한 중단이 일어난 역사적이고 계시적인 증거가 있다고 한다. 성서에 기록된 기적들이 바로 그런 사례다.
보이지 않는 본질과 보이는 현상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전통 담론의 기본 구도이다. 19세기 실증주의가 도래한 이래 이러한 구도에 대한 강한 이의가 제기되었으며 모든 담론을 현상의 서술에 국한해야 한다는 입장이 도래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입장이 지니는 한계는 선명하게 드러났으며, 우리는 이제 본질과 현상을 가르지 않으려는 실증주의도, 곡률을 설정하지 않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기하학 일반의 한 경우이듯이, 그들의 관계를 일정하게 설정하고 있다고 보이는 담론학의 가정은 유효하다고 본다. 이 관계를 드러내는 작업, 요컨대 한 담론에서의 개념적 언표들과 감성적 언표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작업이 담론학의 또 하나의 주요 요소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감성적 언표와 개념적 언표라는 이분법을 사용했지만 실제 상황은 보다 복잡하다. 예컨대 현대 과학에서 감성적 언표는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주어진다. 뒤엠과 바슐라르가 밝혔듯이, 과학이 자연에서 뽑아 내는 감성적 언표들은 이론 그리고 그 자체가 물질화된 정적인 기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감성적 언표들은 어떤 형태로든 결국에는 우리의 오감(五感)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들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이론이나 개념인 것이다. 전통 인식론에서처럼 이론에 주목하든 아니면 캉길렘에게서처럼 개념의 층위에 주목하든, 결국 담론학의 주요 분석 대상은 개념적 언표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담론이 포함하고 있는 개념적 언표들 또한 복잡한 양태를 띤다. 즉 다양한 층위, 복잡한 계열화, 각종 이웃 관계, 상이한 존재론적 위상 등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 담론의 개념적 언표들의 집합을 분석하는 것은 그 어떤 작업 못지 않게 복잡하고 중요하다.
이 작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한 담론이 함축하고 있는 제일 원리의 발견은 중요하다. 대부분의 나라에 그 수도가 있듯이 대부분의 담론에는 그 논리적 중심이 있다. 이 중심을 찾아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그 중심을 기반으로 담론 전체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그 담론의 전체적 모양새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담론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슐라르는 대부분의 철학이 그 안에 하나의 근원적인 직관을 내포하고 있다는 베르크그송의 입장에 반대하면, 현대 과학이 어떻게 총체성, 간명성, 연속성 같은 고전적인 가치들을 벗어났는가를 보여 주었다. 데리다는 전통 담론들의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차연의 논리에 입각한 새로운 비판 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역시 불연속, 복잡성, 차이 등의 기본 원리들은 존재한다. 담론학 자체를 포함해서, 어떤 담론이든 그것이 일정한 조직화의 양태, 담론화의 양태를 갖추고 있는 한 일정한 논리적 중심부를 내포한다. 이 중심부를 드러내 상대화하는 작업은 우리가 담론사를 보다 역동적으로 또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중요하다. 또 그것은 특정한 담론을 절대화하는 경향에 저항하는 탈신비화의 작업이기도 하다.
오늘날 과학은 세계의 문화 전체를 결정하고 있다. 단지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종교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의미와 목적에 관한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마치 종교처럼 그런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학은 역사와 문화에서 나온 지혜를 부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0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열람 ➜ 성경신학 8. 수학으로 규명하는 진리 - 최고관리자 06-11-29
3,441 성경신학 8. 수학으로 규명하는 진리 - 최고관리자 06-11-29
3,440 성경신학 7-4 라이프니츠 이후 - 최고관리자 06-11-29
3,439 성경신학 7-4 라이프니츠 이후 미가 최고관리자 06-11-29
3,438 성경신학 7-3 라이프니츠의 유신론 - 최고관리자 06-11-29
3,437 성경신학 7-3 라이프니츠의 유신론 - 최고관리자 06-11-29
3,436 성경신학 7-2 스피노자의 유신론 - 최고관리자 06-11-29
3,435 성경신학 7-2 스피노자의 유신론 - 최고관리자 06-11-29
3,434 성경신학 7-1 데카르트의 유신론 - 최고관리자 06-11-29
3,433 성경신학 7-1 데카르트의 유신론 - 최고관리자 06-11-29
3,432 성경신학 7. 유신론과 과학철학 - 최고관리자 06-11-29
3,431 성경신학 7. 유신론과 과학철학 [철학] 최고관리자 06-11-29
3,430 성경신학 6-10 신다윈주의의 한계 - 최고관리자 06-11-29
3,429 성경신학 6-10 신다윈주의의 한계 - 최고관리자 06-11-29
3,428 성경신학 6-9 계의 복잡성 - 최고관리자 06-11-29
3,427 성경신학 6-9 계의 복잡성 - 최고관리자 06-11-29
3,426 성경신학 6-8 계의 안정성 - 최고관리자 06-11-29
3,425 성경신학 6-8 계의 안정성 미가 최고관리자 06-11-29
3,424 성경신학 6-7 관계자 - 최고관리자 06-11-29
3,423 성경신학 6-7 관계자 - 최고관리자 06-11-29
3,422 성경신학 6-6 자기 조직 - 최고관리자 06-11-29
3,421 성경신학 6-6 자기 조직 미가 최고관리자 06-11-29
3,420 성경신학 6-5 상호 되먹임 - 최고관리자 06-11-29
3,419 성경신학 6-5 상호 되먹임 - 최고관리자 06-11-29
3,418 성경신학 6-4 형태의 생성 - 최고관리자 06-11-2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