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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7-4 라이프니츠 이후성경신학미가

7-4 라이프니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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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라이프니츠 이후

베르그송은 19세기에 유행했던 일반화된 기계론에 대해서 세심한 비판을 한다. 그는 일련의 불연속적인 특수한 순간들 속에서, 운동의 실재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고의 철학적 결함을 지적한다. 베르그송이 영화의 스냅 사진을 찍는 것과 비교하는 이러한 오로지 수학적인 연구 방법은 한 직선의 점들만을 줄 수 있을 뿐이어서 우리에게 진실로 운동을 줄 수 없으며 운동을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로 삼을 수 없다. 이 철학자가 생각하기로는 정지된 점들에게는 어떤 수단도 제공하지 않는다. 역학의 추상적 방법은 영화가 우리에게 운동의 환상을 주듯이 연속성에 대한 환상을 줄 뿐이다. 수학적이든 기술적이든 이러한 인위적 수단 대신에 베르그송은 내적인 실재성에 호소한다. 요컨대 그로서는 연속성이란 의식의 직접적 소여이다. 우리가 외부적 경험의 불연속적인 의식 위에 도금하는 것은 이러한 내적 연속성이다. 만일 우리에게 내적 연속성에 대한 직관이 없다면 운동에 대한 실증적인 검토는 결코 우리에게 연속성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외부적인 검토가 상세하면 할수록 우리는 제논(Zenon)의 역설에 부딪힐 것이다. 그러나 내적 지속성에 대한 직관이 모든 것을 구하고 그래서 베르그송은 가치들의 전도를 제안하는 것이다. 의식과 생의 가치가 보편적인 설명 가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에 대해 필연적 점괄적이고 불연속적인 분석을 고려하는 베르그송의 비판은 가장 발전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이 고전 역학에서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것은 운동에서 원인과 겨냥된 목표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역학이 아니고 생물학이나 심리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원인과 목표가 운동의 필요불가결한 구성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쉽사리 인정할 것이다.

베르그송(1859-1941)은 생명을 철학적으로 이해해보고자 애를 썼다. 생명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인 전말과 육체적인 전망을 통합하고 이로써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보자는 것었다. 그는 이런 노력을 통해서 리얼리티 일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화이트헤드의 업적에서 정점에 도달한 과정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서 베르그송은 인간의 자기 경험에서, 특히 시간 경험에서 생명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입구를 발견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자연철학에 대한 인간학적 단초의 확대라고 설명될 수 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이들의 인간학적 출발점을 통해서 이들의 과정 철학적 형태는 자연철학의 다른 형식들과 구별되었다.

베르그송은 처음부터 허버트 스펜서의 진화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체계에서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인간이란 사실은 사물의 가장 내적인 것이 미결정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시간은 바로 이런 불확정 자체가 아닌가?'

베르그송은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성에 대해 연구한 이 첫 책에서 인식을 위해서는 분석적 오성 이외에 혹은 그 이전에 직관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직관 형식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시간 내에 있는 실제적인 것의 단일성이다.

우리 지각의 단일성만이 아니라 생생한 리얼리티 자체도 주어진다. 지속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는데, 그 지속은 변화와 대립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단히 변화하며, 이로 인해서 확실히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는 것을 말한다.

베르그송의 생각에 따르면 시간의 연속은 영속적인 상태의 변화로 이해되어야지 고립된 순산간의 연속으로 이해되면 안된다. 그것보다 우리는 시간을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물로, 과거의 돌진으로 경험한다.

과거는 미래를 갉아먹고, 돌진함으로써 팽창한다. 기억은 바로 우리의 생명 역사가 걸어온 이러한 축적이 저장하는 장소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전체 여정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의 생각은 기억된 것을 선택적으로만, 그리고 보관된 것을 기억함으로써만 작동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일지라도 우리의 기원, 의욕, 행위, 그리고 우리를 앞서 몰아가는 경향 가운데서 우리에게 현재한다.

이 경우에 '경향'이라는 표현은 어떤 목표 지향성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광속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폭발력을 가리킨다. 이는 곧 변화와 새로움을 향해서 돌진하는 생명의 충동이다. 그 어떤 구체적 목표도 없이 말이다.

새로움은 역으로 과거와의 단절로 등장하는 게 아니라 그 과거의 변화로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로서의 새로움이 과거와의 관계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명확해질 수 있을 뿐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관찰한 바와 같이 부단한 생성의 형태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이 우주의 참된 본성이 말하고자 하는 특징이다. 오성 사상은 분명히 지속적인 생성을 등한히 다루며, 다만 외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상태의 변화만을 주목할 뿐이다.

현실성을 바르게 이해하면 사물과 상태의 전후 맥락에 연결되어 있는 생성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런 경향은 우리의 지성이 실제적인 목표를 다룬다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다.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외계를 향해서 행동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앞서 발견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게 분명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한 생성을 지각 할 수 없게 된다. 그 대신에 우리는 상태와 이러한 상태의 규칙적인 반복을 확인할 수 있을 길을 모색한다.

지성을 이렇게 구성하는 질서는 공간 안에 있는 상태와 사물의 질서이며, 기하학적 질서다. 이 질서는 모든 연역의 기초가 되며, 또한 경험지식에서 야기된 모든 법칙성으 기초가 된다. 이 양자는 '시간은 셀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사건은 매순간 동일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따라면 이러한 자연 이해는 인공적인 구조이며, 실제로 계속적인 생성의 성격을 띤 현실성을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것은 줄곧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생시킨다.

한 장의 사진을 촬영하듯이 상태의 단순한 연속은 그 어떤 운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우선 관찰자는 여기서 상(像)의 연속을 연관된 것으로 경험하게 하는 시간 의식을 통해서 그곳에서 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속적인 생성은 근원적인 것이며, 분리된 상태의 연속적인 상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산물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창조적인 생성 이외에도 생명의 형태가 진행되고 있다. 이 진행은 생명의 창조력이 무기력해지는 곳에서 일어난다.

자발성, 에너지, 그리고 자유가 상승하는 방향으로 생명이 진화된다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을 통해서 묘사된 우주론적 과정의 방향과 대립해 있다. 후자가 균일한 열의 상태(즉 열의 정기) 가운데서 결국 에너지의 흐름을 하부로 균등히 하는 반면에, 생명의 진화는 에너지의 축적을 통해서 상부로 진행된다.

복합성을 증가시키고 자유를 성장시키는 쪽으로 말이다. 베르그송에게 생명의 진화는 무기적(無機的) 과정의 경향이 전환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적 과정이 이에 해당되는 무게를 유인하게 된다면 생명은 그 경사를 타고 다시 올라가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생명의 진화는 물질의 본질을 나타내는 엔트로피가 쇠퇴하는 경향과 반대 방향으로 운동하는데, 이 운동의 상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생명 과정이 엔트로피 아래에 놓여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오해가 일어났다.

오늘날 유기물에서 복합성이 증가가 환경 가운에서 이루어지는 엔트로피의 축소를 통해서 균일화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생명과정은 환경의 잠재성을 통해서 유지된다.

베르그송에게는 사건의 부단한 새로움은 이미 시간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우연에 대한 견해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이런 개념이 정적(靜的)으로 굳어진 형식에 대한 표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생성의 진행에 등장하는 새로움을 어떻게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생성의 연속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 생성에서 발생하는 형태들을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담겨 있다.

즉 베르그송도 역시 주장했듯이 그저 단순히 공간적인 오성의 착각 안으로 축소될 수 없는 구별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새뮤얼 알렉산더와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런 점에서 베르그송을 극복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베르그송은 고전 물리학을 통한 자연과정의 공간화를 올바르게 반대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생성의 과정으로 보는 베르그송의 고찰에 대해서 동의했다. 비록 화이트헤더가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과정의 의미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알렉산더나 화이트헤드 양자 모두 자연과정 가운데서 연속적이지 않는 것의 계기를 베르그송보다는 훨씬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럼으로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사건은 분리에서 연결로 나아가며, 이럴 경우에 새로움이 발생한다. 연속성은 리얼리티를 확인해주는 첫 번째 요소가 아니라 다수와 연결됨으로서 인하여 발생하는 결과다.

새뮤얼 알렉산더(1859-1938)는 이미 비연속적인 소여가 상위(上位)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시간 개념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알렉산더는 시간을 대자적인 의미에서 비연속적인 순간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이 순간이라는 것은 우선 공간이 비여 있기 때문에 대자적으로 결코 그 어떤 연속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시간은 차이를 가져오고 공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한 공간을 통해서 자기 입장에서 연속적인 진행이라는 성격을 얻는다. 왜냐하면 모든 시간적 계기는 상이한 장소에 공동적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역으로 잇달아 발생하는 상이한 시간적 계기는 같은 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공간화를 오성의 작업이라고 판단햇으며, 더 나아가서 전통적인 실체 형이상학의 오류에 책임이 있다고 했는데, 알렉산더에 따르면 이 시간의 공간화는 시간 자체의 본질에 속한다.

알렉산더가 말하는 의미에서 시간적 계기의 연속적인 계승은 화이트헤드(1861-1947)의 경우에 비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생기(events)의 연속이라는 표상과 일치한다. 이 경우에 뒤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앞서 등장했던, 그리고 그렇게 발생했던 지속을 반복한다.

화이트헤드는 시간의 연속과 구별되는 사건의 공간성을 어떤 분명한 모형(pattern)의 지속으로 돌렸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공간에 비해서 시간이 상위라는 점을 확신했으며, 공간성을 생기(生起)의 연속에서 실현된 모형, 혹은 영원한 대상의 귀결이라고 간주했다.

이는 곧 생기에서 실현된 것으로서 그 모형을 형성하는 색, 소리, 향, 기하학적 형식들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화이트헤드는 시간 진행의 연속성을 베르그송과는 달리 근원적인 현상이 아니라 끌어낼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현상은 생기의 연속적인 과정에서 모형이 반복하고 변화는 것에 기초하는 것을 말한다. 화이트헤드의 생각에 따르면 자연사건을 비연속적인 생기의 결과라고 보는 견해는 양자론(量子論)을 통해서 알려진 바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그 형식의 반복과 변화를 통해서 진동의 인상을 야기한다.

자연과정은 생기의 연속에서 일어나는 반복과 변화의 연결을 통해서 어떤 창조적인 진보라는 성경을 획득한다. 이것은 베르그송이 말하는 창조적 진화에 해당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개인적인 모습의 변이를 베르그송보다는 좀더 분명하게 이러한 생성의 특징을 연계시켰다.

화이트해드는 생성의 두 기본 형식을, 즉 성장과 변이를 구분했다. 변이는 개개의 생기가 자신의 생성이 완료된 다음에 그 기본 요소로서 다른 성장과정의 구조에 개입하는 한에서 역시 '건너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생기는 궁극적으로 유일한 실재다. 세계는 여기서 발생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이르기를 원자론적이라고 했다. 비록 그것이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나 고전 물리학과 달리 쪼갤 수 없는 최소 물질에 대한 원자론이 아니라 생기에 대한 원자론이지만 말이다.

그에 비해 형식 요소는 (모형, 영원한 대상) 그 어떤 고유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생기에서 발생하는 만큼만 실제적일 뿐이다. 공간적 시간이 연속체가 이에 상응한다.

즉 광범위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잠재력일 뿐이거나 혹은 역으로 구체적인 생기를 추상화함으로써 일어난 결과일 뿐이다. 이 생기에서 실제적인 실체들과 앞서 있는 것들과이 관계가 생산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의 토대인 생기의 수다(數多)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원자론은 개개의 형이상학적 원자론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있다. 이 난제들은 플라톤이 쓴' 파르메니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

일자가 없이는 그 일자와 상이한 것이 하나일 수도 없고 여럿일 수도 없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무(無)가 된다. 많은 하나는 그것과 동일한 것에서 온 (추상적 일자라는 의미에서) 여럿이다.

그러나 잇달아 관계를 맺은 여럿이기도 하며, 또한 전체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많은 하나가 그 어떤 전체를 이루는 게 아니라면 역시 바로 그 일자를 예시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없다. 개개의 경우에 포괄적인 단일성이 전제되는 게 틀림없다. 이로써 원자는 단일성 일반으로 생각될 수 있다.

라이프니쯔의 경우에 단자가 신적인 원단자에서 기초된 우주의 단일성을 반사한다는 생각을 포기한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이런 생각에 의해서 우주의 단일성이 개개의 단자에게 주어졌으며, 이로써 그 단일성이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어게 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개개의 생기는 자기로부터 벗어나서, 즉 자기 주관성을 통해서 세계의 단일성을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욱이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우주의 단일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보증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자로 우주를 상대해 있는 분이 아니라 원시적인 본성에서 모든 영원한 대상의 장소일 뿐이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이러한 내재적 관계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관계의 수다를 자발적으로 통합하는 개체적인 생기의 주관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개개 생기에게 자기를 실현하는 데 몹시 중요한 가능성이 생기가 이루어야 할 최초의 목표로서 제공한다.

그러나 이 생기가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실화하는지는 스스로의 주관성에서 결정해야만 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의미에서만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이지, 개개 생기의 현존을 발생시키는 장본인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생기는 오히려 자기의 주관성에서 창조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세계의 창조를 계속적인 창조로서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자유와 그 피조물이 세계의 형성에 끼친 창조적 기여를 통합화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시야를 열어준다.

콩트(August Comte)의 실증주의는 불어권에서 일어난 자연과학에 대한 대응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철학적 논의가 발전된 자연과학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철학은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 대한 철학의 위상을 다지기 위한 것 뿐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에 대한 철학의 구체적 논의는 '과학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과학철학은 과연 무엇에 대해 관심을 기울리는가?
우선 과학이 놀랄 만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분야와는 확연히 다른 과학만의 고유의 탐구 방식에 있었다. 과학을 과학방법론과 동의어로 말한 적도 있었다. 과학을 과학적 행위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철학은, 과학이 주장하는, '진리'와 '객관성'의 진위에 대해서 검토에 들어갔다.
'진리'와 '객관성'은 모든 분야에서 중요했다. 이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 다름아닌 자연과학 분야였다. 과학에 대한 정적(靜的)인 논의가( 동적動的이 아닌 ) 무엇보다도 논의 형식적 특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행위는 진리와 객관성에 의한 나름대로 결과물을 내려는 작업이다. 이 결과는 과학적 명제들의 결합된 형태로 구체화된다.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은 자연과학을 포함해 모든 언어적 표현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밝히려 했다. 더 나아가 카르납은 과학적 세계관을 넓히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구성이론'(Konstitutionstheorie)을 제시한다. 후에 '구성주의'란 이름으로 발전하는데, 허구와 실재의 차이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실재하는 세계자체가 어떤 본질적 목적의 발현이 아니라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구성주의적 기획은 새롭고 다양한 세계 해석들의 탄생을 예고한다. 구성이론에 따르면,
세계에 관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이제 이론적 바탕 위에서 새롭게 구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언어의 논리적 통사론를 마련하여 '통일과학'의 가능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논리 실증주의였다. 새로운 논리학을 무기로 그들은 자신들의 논의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언어에 대한 언어로 표현된 것에 대한 이들의 논의는 결국 언어적으로 표현된 자연과학의 과학적 진술까지 다루게 된다. 이들에 의하면 과학이란 철저히 논리적 분석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 이론의 형성과정에서 형식적 엄밀성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의미성을 따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 실증주의의 핵심적인 주장은 1934년 포퍼(Karl R. Popper)에 의해 본격적으로 비판받는다. 그는 과학적 탐구에서 진리보다는 방증(傍證)의 중요함을 꼬집어 지적한다. 그래서는 '반증(反證)주의'라는 이름을 얻는다. 여태껏 과학철학의 논의는 과학과 과학 아닌 것으로 나누는 형식적 기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논의는 과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과학의 객관성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객관성이 확보된 과학은 당연히 진리를 보장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와 관련해서 자연과학자는 자연 현상 속에서 자연업칙에 해당하는 이론을 찾는다. 따라서 과학은 논의 대상과의 관례에서 이론을 드러내려 하고, 과학철학자들은 당연히 이의 논리적 과정을 밝힘으로써 이론의 성격을 보여 주려한다. 여기서 과학철학자는 모든 경우에 틀림없이 들어맞을 설명의 이상적 형식을 다룰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퍼의 반증은 과학적 진술의 참을 확인해 나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포퍼는 그 진술의 거짓임을 밝히려 한다. 그래서 거짓 아닌 것을 찾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과학은 진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즉 진리를 위해서 논의하는 것이 거짓임을 굳이 밝혀 보아야 한다. 아주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그들이 받아들인 자연과학을 모든 것을 위한 궁극적 모델로 따르기 위함이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뒤엎는 주장이 쿤(Thmas Kuhn)에 의해 제기되었다. 여태까지의 논의가 주로 논리 철학의 정적인 영역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쿤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은 고정되어 정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동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의 발전을 다루면서 그 발전이 단순히 누적적이고 일정한 흐름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과학의 변화란 결국 이론의 변화일 뿐인데 이는 결코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고 유포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패러다임에 따라 과학은 연구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과학의 변화란 패러다임의 혁명적인 바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패러다임의 혁명적인 바뀜이란 종교적 개종이나 게슈탈트 전환에 비교될 수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인 것은 주관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쿤의 주장은 포퍼가 말하는 식의 발견의 논리가 아니라 발견의 심리학에서 연구될 뿐이다. 바뀜을 허용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역사 속에서 각 패러다임에 속한 동일한 자연 현상에 대한 이론들은 비교될 수도 없고 비교할 수 있는 기준마저 마련할 방도가 없다. 과학은 이처럼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다루어야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과학 고유의 가치를 찾을 수는 없다. 단지 시간의 흐름에서 앞서 일어나고 일어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 주장은 그동안 어느 분야보다도 객관성과 합리성과 진리성을 두루 갖추었다고 장담한 과학 본질에 대해서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쿤의 논의는 과학의 발전상과 함께 합리성을 과학철학의 새로운 주제로 떠오르게 했다.

당연히 논리 실증주의와 논리 경험주의의 전통에서 보자면, 과학철학자들은 검증이나 확증으로 과학에서 '정당화의 맥락'을 말하던 방식으로 과학의 합리성을 이해했다. 또 반증을 이용해 포퍼는 합리성을 전제로 한 인간의 합리적 태도 또는 비판적 태도에 따른 과학적 탐구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려고 했다. 떠라서 합리성이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론 선택에서 합리적 선택의 보편적 기준, 즉 합리성의 기준이 있고 도 합리적 이론 선택을 논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론의 선택을 이성적 기준에 따라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과학은 합리적 선택의 선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합리주의라 부르고, 이론 선택에서 그 어떤 기준도 있을 수 없다는 쿤이나 극단적으로 화이어벤트식의 논의를 비합리주의(또는 상대주의)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과학을 진리개념과 관련지어 앞엣 것을 객관주의, 뒤엣것을 상대주의로 부르기도 했다.

라카토스(I. Lakatos)는 과학의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반증을 이용한 포퍼의 논의를 '소박한 반증주의'(the naive falsificationalism)라고 이름짓고 이를 새로이 해석한다. 그리고 그는 새로이 한 이론과 이에 대등하는 다른 이론 사이에 일어난 즉 이론과 이론의 반증을 논의하는 '세련된 반증주의'(sophiscated falsificationalism)를 문제삼는다. 라카토스의 주장은 포퍼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에 벗어나지 않으면서 과학사의 내용을 수용할 수 있게끔 꾸민 논의였다. 라카토스는 쿤의 주장에 맞섰다. 쿤은 주장하기를 과학의 변화가 전적으로 발견의 사회심리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자신의 논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과학적 변화가 합리적이거나 적어도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발견의 논리학의 영역에 들어맞는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 변화가 이론의 변화라면 이론은 단순히 미시적으로 논리적 측면만이 아닌 거시적으로 열린 방법론적 구조를가진 이론 전체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이론의 선택은 열린 구조를 지닌 이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카토스는 과학자의 합리적 작업을 위한 모델로 정교한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 나타는 심각한 문제는 전혀 다른 데에서 나온다. 즉 현장의 과학자들이 이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쿤과 포퍼를 옹호한 라카토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보면, 과학적 변화에서 규범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논의는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했다. 특히 라카토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쿤이 과학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꿰뚫는 과학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참신한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쿤의 새로운 주장은 과학철학의 논의에서 과학의 역사를 중요하게 보도록 했다. 이를 통해 과학철학은 커다른 변화를 겪는다. 기존의 논리 실증주의 이념에 따른 과학철학은 이제 더 이상 '논리적'이라고 특징지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과학철학은 이제 이전과 다른 '새로운 과학철학'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과학에서 합리성마저 의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합리성이 사라진다면 진리개념마저 부정해야 될 판이다. 이 문제를 과학철학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논리적 과학철학에서 추구한 진리와 객관성, 그리고 역사적 과학철학에서 추구한 합리성은 결국 과학에 대한 논의에서 과학 속에 숨겨진 그 어떤 규범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과학의 논의에서 '규범'이란 과학에의 초월적인 것과 유사한 그 어떤 것으로 성격지울 수 있다. 논리적 과학철학은 규범적 과학철학의 극단적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 과학철학은 규범적이기는 하지만 독단적이거나 교조주의적이지는 않다.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각 개념의 가치와 다른 개념들이 동시에 나타남으로써만 생겨나는 내적으로 의존적인 개념들의 체계이다. 즉 그 구조적으로 형식적이고 논리적 체계는 바로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언어의 공시적 체계이고 과학에 대한 논의에서는 논리적 과학철학의 논의이다. 물론 소쉬르의 언어학적 논의에서 말하는 공시적 체계는 언어의 통시적 맥락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언어의 공시성은 언어의 통시성이나 전체성 속에서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자율적 성격은 언어의 통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공시성에서 찾을 수 있는 성격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철저히 자연적 산물인 반면, 과학이란 언어만큼 또는 언어처럼 자연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리적 과학철학은 성격상 소쉬르의 공시언어학과 유사한 논의로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과학철학은 소쉬르의 통시언어학과 비교해서 말할 수는 없다. 소쉬르의 경우 그에게서 통시언어학은 언어의 공시적 특성을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과학철학은 결코 과학의 공시적 성격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라도 역사적 과학철학은 논리적 과학철학과 여전히 관련을 맺는다.
쿤의 논의 이후,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있는 도출 방식은 정신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철학 분야에서도 적용되었다. 하버머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선험적, 선척적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 과학적 이론이 되어야 함을 주창함에 따라 나올 수 밖에 없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실천적 담론을 통해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효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촘스키의 언어능력이나 피아제의 인지적 발달, 콜버그(Kolberg)의 도덕적 발달에 함축된 보편적 조건과 규칙들은 이 의사소통 이론에 의해 과학적으로 재구성된 이론이라고 한다. 의사소통 행위는 이해 지향적인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형이다. 양해에 도달하려는 목표는 상호 이해의 간주관적인 상호성, 공유된 인식, 상호 신뢰, 서로간의 화합으로 귀결되는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편적 타당성이 발생한다. 이 타당성으로 규범적 효력이 회복된다고 본다. 이것이 실천적 담론이다. 사물의 객관적 분석으로 얻을 수 없었던 합리성과 진리성이 이 실천적 담론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로서 과학 발달 과정에서 신은 완전히 배제된다. 신에게 묻지 않고서도 인간들끼리의 정보 교환으로도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서구 철학을 좀 단순화한다면 19세기 이전에는 철저하게 이런 결정론적 사유 양태가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물론 기독교와도 관련된다. '우연'이란 신에 대한 모독으로 이해했다. 이에 비해 19세기 이후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의 주류를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의 철학'이다. 칸트를 비롯한 독일 관념론자들에게서 그 실마리가 마련되고, 그 후 베르그송(베르그송은 이런 결정론을 근대 철학이 만들어낸 '키메라' 즉 괴물이라고 했다). 실존주의 철학으로 가면서 자유의 철학이 활짝 개화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칸트에서 실존주의에 이르는 철학 전통에 익숙해 있다고 할수 있다. 그래서 한 개인의 내면, 감성, 주관, 의식, 결단, 의지 같은 개념들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현대인은 결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본질, 신, 하늘, 운명, 도 등등의 개념들을 타파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객관' 위주의 사유가 부활한다. 흥미로운 것은 '객관'이라고 해도 과거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객관이 아니라 과학적 개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 도, 운명 등등의 개념이 유전자, 사회 구조, 성격 같은 개념들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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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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