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체성과 부분성
6. 전체성과 부분성
생명체의 경우에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그것이 원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못박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베토벤의 교향곡이 음표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디킨스의 소설이 단어들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유기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속성, 곡조가 가지고 있는 주제, 소설의 줄거리 등은 전체를 모아 놓았을 때만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성질인 것이다. 이것은 구조의 차원에서만 나타나는 성질이며 개개의 구성 요소의 차원에서는 거저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혹시 아이가 아끼는 장난감을 분해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는 조각들을 다시 원래대로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우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실은 여기에 흔히 간과하고 지나치는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인간은 세계를 분해해 놓고 그것을 어떻게 결합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수조 달러의 연구비를 들려 자연을 분해해왔지만 이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조그마한 단서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자연을 더더욱 잘게 분해해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환원주의는 20세기의 과학적 연구를 배후에서 이끌어간 주된 원동력이었다. 이에 따르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구성성분들을 해독해야 한다. 부분들을 이해하게 되면 전체를 이해하기 훨씬 쉬워질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분할 지배하라, 악마는 미세한 부분들 속에 숨어 있다. 수십 년 동안 세계를 그것의 구성성분들을 통해 바라보도록 강요당한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자나 초끈(Superstring)을,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분자를, 복잡한 인간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개별 유전자를, 유행과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예언자를 연구하도록 훈련받아왔다.
이제 조각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아는 상태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왔다고 하긴 어렵다. 재조립은 과학자들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환원주의를 따를 때, 복잡성(complexity)이라는 견고한 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자연은 다시 재조립하는 방법이 오직 하나뿐인 잘 설계된 퍼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구성요소들이 서로 결합하는 방식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시험해보는 데에는 수십억 년이 걸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조각들을 우아하고 정교하게 결합해왔다. 자연은 자기 조직화라는 보편적인 법칙을 이용하여 그렇게 해왔는데 그 근원은 아직도 신비로 남아 있다.
오늘날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따로 떨어져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건이나 현상은 복잡한 세계라는 퍼즐의 엄청나게 많은 다른 조작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의해 생겨나고 또 상호작용한다. 인간들은 자신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는 좁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히 상이한 학문 분야에 속한 모든 과학자들이 모든 복잡성은 엄격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일제히 발견하게 되면서, 모두들 거대한 혁명이 진행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비로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네트워크 진화 이론은 네트워크를 모델링하는 방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준다. 네트워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동적 시스템으로 봄으로써 새로운 모델링 철학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에르되스-레니로부터 시작된 고전적인 네트워크 정적 모델들은 단지 고정된 수의 노드와 링크를 배열하여 그 결과로 나오는 그물망이 현실의 대상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이것은 드로잉과 비슷하다. 페라리 자동차 앞에 앉아서 누가 봐도 이 차를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 그렸더라도 그림은 그 차가 애초에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본래의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네트워크 진화 이론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이다.
네트워크 진화이론은 자연이 여러 가지 복잡한 시스템들을 창조할 때 따랐던 발걸음을 재구성함으로써 네트워크가 어떻게 조립되었는지를 포착하고자 한다. 만약 네크워크의 조립과정을 정확하게 모델링할 수 있다면 결국 거기에서 생겨나는 현실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연구 목표는 네트워크의 위상구조를 기술하는 것에서 네트워크의 진화를 형성한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87년에 [네이처]지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행카스터 시에 살고 있는 아미쉬 족(Amish family)의 유전자를 연구하여 11번째 염색체의 결함이 우울증과 관련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서 그들의 결과는 철회되었다.
첫 번째 연구 발표 후 10년이 지난 1996년에 3개의 연구 기관에서 우울증과 염색체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다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다른 아미쉬 족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우울증이 6번째, 13번째, 15번째의 염색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코스타리카의 중앙 계곡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살고 있는 부족들의 유전자 연구에는 18번째 염색체의 이상이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는 다른 연구 결과가 나왔다. 또 스코틀랜드 족 등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4번째 염색체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또 다른 정신 질환인 정신분열증에 대한 연구에서는 1번째 염색체와 관련성이 있다는 결과가 발표되었고, 5번째 염색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과학자들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겠지만 과학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학자들이 밝힌 것은 우울증이나 암 질환 같은 질병들은 하나의 유전자의 이상으로 유발된 것이 아니라 이상이 있는 유전자들이 세포 안에 숨어 있는 복잡한 네트워크를 통하여 발현되고 있다는 데 있다. 새롭게 소개되고 있는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소위 빌딩 블록(building block)을 이해하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종래의 생물학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방법이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최근 일어나고 있는 네크워크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 게놈 시대를 맞이하여 생물학적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중요한 과정은 생명을 이해하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세포 안에 있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자 지도에 관해서, 복잡한 생명의 조직과 현상을 한 권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는 분자생물학의 크나큰 업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전자 분석만으로는 생명체의 행동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부족하다. 유전자의 수가 예상외로 적기 때문이다. 앞의 예에서 본 바와같이 같이 우울증은 한 개의 유전자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유전자들의 연결 문제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질병들은 하나의 유전자와 관련된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생명체의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서로 다른 유전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는가,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현상은 무엇인가, 유전자가 세포 안에서 어떻게 신호 전달을 하는가 등을 알아내야 한다. 유전자의 지도가 아닌 생명의 지도는 어떤 세포들이 피부와 심정을 구성하고 있는지, 외부의 환경 변화에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암과 정신 질환 등의 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 등을 알려줄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들 해독한 결과 얻은 결론은 유전자에는 좋은 유전자, 나쁜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게의 네크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각각의 유전자가 각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탈피해야 한다. 유전자는 단백질을 구성시키며 다른 세대에게 유전적 정도를 전달하는 등의 구조적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복잡한 세포 네크워크 내에서 중요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역할은 유전자가 다른 세포의 구성 성분과 동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의 유기 분자화합물이 번식하여 생명이 탄생하는 단계에서는 세포 네트워크는 성장하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지난 30억년 동안 종의 진화와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면서 생물체 네트워크는 성장의 단계보다는 자연에 적응하고 최적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네트워크는 정지해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다이나믹한 네트워크이다. 실제의 네트워크는 불사가리 모양처럼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구조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집중화되어 있는 이른바 계층적 구조를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거미가 없는 거미줄 형태이다. 이 구조는 자체적이고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지는 이른바 자기 조절이 존재하는 그물망이다.
이 네트워크는 자연, 사회, 그리고 비즈니스에 대한 그물망적(Web-based)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이것이 웹상에서 일어나는 민주주의 법칙에서부터 인터넷의 취약성이나 바이러스의 치명적 전파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이슈들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준거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물리현상으로부터 그것이 집단화될 때 새로운 물리 현상이 나타난다는 '인과적 분리'(causal decoupling) 현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집단적 성질의 특징은 전체가 그 부분의 합으로 이루어지도록 항상 미시 물리 법칙들의 기반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계의 성질들이 부분들의 성질들을 따르더라도 전체계는 개별적 부분들이 가지지 않는 특징들을 드러낸다. 예컨대 DNA 분자를 구성하는 화학적 요소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DNA 자체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데, 그것은 DNA가 그 구성을 통해서 새로운 속성을 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분자 생물학은 분자 결합들과 화학적 상호 작용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개별 부분들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특징들을 반영하는 용어인 정보 전달,복제, 암호화, 단백질 합성 등을 새롭게 도입하고 있다. 유전학은 화학 법칙들로부터 인과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것은 어려운 논리적 문제를 일으키는데, 전체는 부분의 합이면서 어떻게 부분의 합으로 산출할 수 없는 새로운 속성을 산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확률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설명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절대적 우연성이 새로운 속성 또는 실재를 출현시킬 수 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절대적 우연성으로서의 '무질서'와 새로운 속성과 실재를 산출하는 '혼돈'으로서의 무질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상 고전적인 '실체'의 개념에 매여 있는 한, 이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이러한 난점은 전체론(holism)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외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실체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론에서는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과는 다른 고유한 본질과 질서를 가지며, 그것은 요소에로의 환원으로 해명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단지 환원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걸음 더나아가 전체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전체론은 이에 뚜렷한 방안을 가지고있지 않다. '장미는 장미이므로 장미이다'라는 것은 전체론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진술은 장미에 대한 화학 성분 식이 장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못하듯이 장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없다. 전체론 역시 '실체'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환원론과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실체는 '부분'이 아니고 '전체'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환원론자는 부분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전체의 새로운 차원을 설명할 수 없고, 전체론자는 부분을 전체에 예속시켜 버림으로써 부분이 전체에 대해 갖는 상대적 자율성과 독립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분과 전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실재'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작업에서는 케슬러(A. Koesler)의 공헌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새로운 대두되고 있던 '비실체적 실재'에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이러한 경향에로의 탐구에 탄력을 붙여 주었다.
케슬러에 의하면 실재를 부분이 합으로 보는가, 아니면 부분으로 환원할 수 없는 통일적 전체로 보는가 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모든 실재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절대적 부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데, 그것은 더 하위 레벨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절대적 전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더 상위 레벨의 부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 조직은 다수준(多水準) 조직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준의 조직은 그들의 부분에 대해서는 전체가 되고 , 더 큰 전체에 대해서는 부분이 되는 부조직(副組織)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자가 결합하여 원형질체를 형성하고, 이들은 다시 결합하여 세포를 형성한다. 세포는 조직과 기관을 형성하고, 이들은 다시 소화 기관이나 신경 조직과 같은 더 큰 시스템을 형성한다. 이것이 결합하여 마침내 살아 있는 남자와 여자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성층(成層) 질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가족, 종족. 사회. 국가를 형성한다.
울프 싱어는 '도시를 사회의 프랙탈 구조 내의 결정화점(結晶化點)'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따라서 도시는 인구 밀도가 위험수위를 넘어서자마자 개인간의 상하 작용이 선(先)구조화된 케뮤니케이션 구조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정도로 복잡해지면 생겨난다. 뇌가 개별 영역으로 구성되며 이 영역들은 다시 신경 세포의 잡단들(신경 세포의 조화)로 구성되는 것처럼 여러 도시의 망과 각 개별 도시, 한 도시의 하부 단위들은 사회라는 초(超)유기체 내부의 상호 작용을 최적화하는데 기여하는 정보 가공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울프 싱어는 이 과정의 첫 번째를 정보 흐름의 최적화로, 두 번째를 에너지 사용의 최소화로 본다. 이 둘은 도시나 뇌 안에서 거리를 축소시켜 밀접된 요소들을 생성시킨다. 그도 인정하듯 이런 비교 방식의 문제점은 우리의 사고 기관이 자신이 구조를 최적화하는 방식에 있다. 뇌가 발전하는 동안에는 시스템의 요구에 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신경 세포는 가차없이 파괴된다. 개미나 꿀벌의 군집에서도 볼 수 있는 '적응 불능자를 제거하는 잔혹한 구조'이다. 울프 싱어의 설명에 따르면 뇌 피질 속에는 이런 정렬 문제를 서로 얽혀 있는 대표 기관들의 고도로 복잡한 구조를 통해 해결한다. 이는 종종 흥미로운 지형학(공간 내부의 기하학적 형체의 위치와 정렬)을 만들어내는 타협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공간적 정렬은 천재적인 자기조직화의 과정의 결과물이다. 뇌 발달 과정과 이후 성인의 학습 과정은 방법을 결정하는 계획에 따라 진행되지는 않는다. 실제 그런 종류의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전자뿐 아니라 기타 다른 곳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구성 요소간의 지역적 행동의 규칙만이 있을 뿐이다. 곧 발전 과정의 최종 결과는 그것이 완료된 뒤에야 분명해진다. 간단히 말해 지역의 규칙이 전체의 정렬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비록 도시와는 다른 복잡계에는 유익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앞으로 브라질리아처럼 도시를 전체 차원에서 계획하지 말아야 한다. 울프 싱어는 이렇게 충고한다. 전체적인 계획은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차라리 자기조직화의 이성을 신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적 상호 행동의 적절한 규칙을 찾고 효율적인 학습 및 수정 메커니즘의 도입하여 상호적인 정보 흐름을 조성하고 지역적이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적 윤리적인 판단 기준을 확정하여 중앙 집권적인 협조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개체- 분자로부터 인간 및 사회 조직체에 이르는- 통합된 시스템이라는 의미에서는 전체로 간주될 수있 으며, 그 복잡성이 더 높은 수준의 전체에 대해서는 부분이 된다. 사실 절대적 의미에서는 부분과 전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인 이 성질을 나타내기 위해 케슬러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홀론(holon)'이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전체라는 의미를 가진 '홀로스(holos)와 조작이나 부분을 나타내는 접미사 '온(on)'의 합성어이다. 실재는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홀론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전에 베르트란피(L. von Berrlanffy)가 제 2차 세계 대전 바로 뒤에 제창한 '일반 시스템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의 유기체론의 입장에서 생물은 외계에 대하여 열려져 있는 부분으로서 개방계가 계층적 구조를 만들어 내어서 생체 전체의 기능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케슬러는 이 생각을 더욱 심화시켰다. 케슬러는 유기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계층적 구조의 매듭 자리로서, 보다 큰 전체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완전체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홀론(holon)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홀론을 위에서 보느냐 아니면 밑에서 보느냐에 따라 '부분'(낱) 혹은 '전체'로도 나타나는 애누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케슬러의 홀론 개념은 환원론의 실체 개념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현상은 전체와 부분간의 상호 작용에서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홀론도 역시 실패하고 있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존재의 실체 개념에서 관계 개념으로 이해해 갈 필요가 있다. 케슬러의 홀론 개념이 가지는 특성은 홀론 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특성으로서, 더 정확히 말해서 관계의 망상 조직이 홀론적 실체를 현상시킨다고 보여진다.
케슬러의 홀론은 그 자체 전체자로서 상위 홀론에 대해서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위 홀론의 수준에서는 단지 부분일 뿐이다. 여기에는 상위에서 하위로 작용하는 하향적 인과성은 있지만, 하위에서 상위로 작용하는 상향적 인과성은 없다. 그러나 홀론을 관계의 망상 조직으로 본다면 상위와 하위, 전체와 부분이라는 것은 홀론의 실체화 과정에서 고립된 추상물이며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향적 인과성, 상향적 인과성도 상대적 개념이며,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부분이자 또 다른 존재를 자신 속에 부분으로 포섭하는 전체일 수 있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실체의 관점하에서는 '부분은 그 부분을 포섭하는 전체와 같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관계의 관점에 선다면 부분과 전체는 임의적 분류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주장은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형식 논리가 존재의 탐구에 무제한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생명 현상이나 정신 현상의 탐색에서는 그 무력성을 드러낸다. 반면 물질의 세계에서는 비교적 잘 적용될 수 있는 이것은 물질의 의사(擬似) 실체적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야말로 근사적이라는 것을 미시 세계의 물리적 탐색의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다.
홀론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상호 작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분이 전체 속에 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부분이 전체를 자신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규명하기에 앞서 주의할 것은 우리의 언어가 실체의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관계의 존재론은 언어적 모순에 빠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를 위해 언어를 버릴 수 없는 한 어느 정도 타협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홀론'을 마치 실체인 것처럼 다루겠지만, 각 수준의 홀론들이 같은 수준의 다른 홀론들과 맺는 관계, 하위 수준의 홀론과 맺는 관계, 그리고 상위 수준의 홀론과 맨즌 관계 등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언어로 포착하기 어려운 전체와 부분의 상호 관계를 근사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부분이 전체 속에 들어 있으면서 또 전체를 자신 속에 가질 때 가능해지는 것이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이다. 이것은 자신의 조건을 자기 스스로 부과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질서와는 다르다. 자기 조직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물질의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것과 근사한 과정이 물질계에도 존재하는데 이해의 편의상 이것의 검토부터 시작하자.
그러나 켄 윌버 Ken Wilber(1949∼ )에 의하면 이 홀로그래픽 모델은 좋지 않은 모델이다. 홀로그래픽 패러다임은 범신론적 자연숭배에 관해서는 좋은 비유일지 모르지만 실재에 관해서라면 결코 좋은 비유가 아니다. 자연숭배란 실제로 자신을 변형시킬 필요없이 영성에 관해 생각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만일 신이 단지 경험적 우주의 총화에 불과하다면 그 신을 알아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킬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신은 이미 주변에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범신론적 자연 숭배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 이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경험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신이다. 따라서 절대는 이 세계 속에 내재하지만 완전히 세계를 초월해 있다.
플라톤의 동굴우화는 이 점을 말하는 훌륭한 비유이다. 동굴에 나타난 그림자가 있고 실제의 절대 빛은 동굴 밖에 있다. 궁극적으로 이들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숭배론이 갖고 있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우주 이 전의 것 또는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을 동굴 속의 모든 그림자의 합과 동굴 밖의 빛을 혼동하고 있는데 있다. 이런 철학의 위험은 신을 단지 우주 내의 사물과 사상의 총화, 동굴 속 그림자의 총화일 뿐이라고 생각할 경우, 동굴로부터 나가려는 시도를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저 자신의 적응 수준만을 생각하면서 부분들을 덧붙이려고 애쓰기만 한다.
홀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부분들의 전체, 홀로그래픽 흐림과 개별적인 부분들 간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다. 홀로그램에서 부분들의 총화는 각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각 부분 속에 있는 부분들의 총화를 다층적 분리성 기저에 있는 초월적 단일성을 나타낸다. 홀로그램이 브라흐만(힌두교의 신) 또는 도(道)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브라흐만을 부분들의 총화로 화누언시키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숭배이지 브라흐만이 아니다.
브라흐만은 전체세계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전체세계 그 자체가 브라흐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전체를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브라흐만, 본성 또는 도(道)를 파괴할 수 없다. 인간의 뇌 역시 아마도 홀로그래프로 정보를 저장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뇌는 자연히 역동적이고 움직이는 상태를 '무시간적' 혹은 저장된 조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 정보를 끌어 낼 때 그렇게 고정된 상태로부터부터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신간적' 혹은 고정된 상태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신비적인 영원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 가지 문제는 녹음기를 부숴 버리면 영원성은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의 구조인 녹음 테이프나 두뇌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는 있는 영원성은 잘못된 영원성이다.
레이져 이론을 탄생시킨 독일의 물리학자 하켄(H.Haken)은 자기 조직 시스템의 간단한 예로 레이저를 들고 있다. 서로 마주보는 거울이 있는 상자 속에 에너지를 부여하면 상자 속의 원자의 일부는 이전보다 에너지 준위(準位)가 높은 여기(勵起) 상태가 되어 광자를 방출한다. 광자는 여기된 다른 원자와 충돌하고 거듭 광자가 방출된다. 처음에는 광자들의 파가 서로 간섭하여 복잡한 파형을 만들어 내지만 서로 위상이 달라 상쇄되어 버리기 때문에 방출되는 빛은 약하다. 그러나 점차 에너지의 강도를 높여 가면 갑자기 어느 시점에서 광자들이 동일한 위상으로 정렬되어 강력한 단일 진동수의 빛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레이져 광선이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여기 상태에 있는 많은 분자들의 내부 운동에의 동조(同調)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켄의 '예속 원리'인데 그는 이것이 실재의 자기 조직 현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두 대의 바이올린을 조율하여 한 대는 탁자 위에 올려 놓고 다른 한 대를 가지고 음악을 연주한다고 생각해 보자. 연주하고 있는 바이올린 선과 똑같은 선이 탁자 위에 놓인 바이올린에서도 울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G선을 연주하면 탁자 위에 놓인 바이올린의 G선도 함께 울린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첫 번째 바이올린에서 발생한 공기의 파동은 두 번째 바이올린에 가서 부딪친다. 방출된 음과 똑같이 조율된 두 번째 바이올린의 선은 우선적으로 그 파동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파동의 진동수와 자신의 고유한 진동수가 똑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계속에서 전달되는 에너지는 당연히 가장 최적의 조건 상태에서 전달될 수 있다. 이러한 동조 현상을 공명(共鳴)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된 분자 속에서 일어나는 광자의 왕복 운동도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주기로 변화하는 힘을 밖으로부터 부여하면 그 힘에 동조해서 진동하는 것이다. 광자들은 서로 닮아감으로써 동조적으로 진동한다. 이것은 요소들간의 상호 작용이다. 그러나 자기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그 동조 상태의 질서는 외부 요인에 의해 쉽게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동조 상태에 들어가면 그 체계는 외부 요인에 저항하며 그것을 유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왜일까?
또 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 보자. 추의 길이가 같은 구식 괘종 시계가 여러 개 있다고 하다. 처음에는 추가 각기 제멋대로 움직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추들이 마치 함께 묶여 움직이듯이 일제히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논의한 동조 현상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의 추를 건드려 다르게 움직이게 해보자. 얼마 안 가서 또 다시 다른 시계들과 리듬을 맞추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공연장에서 공연이 끝나고 주인공을 불러내는 관중들의 박수소리나 반딧불이들 중 어떤 종(種) 역시 이 법칙에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서 아시아에서 이들은 키가 큰 맹그로브 나무 주변에 수백만 마리씩 모여서 주기적으로 반짝거린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모든 반딧불들이 형광성을 가진 자신의 꼬리를 정확히 같은 순간에 컸다가 껐다가 하는데, 그 결과 이 신호등처럼 생긴 나무를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거대하게 파동 치는 전구처럼 보이게 한다. 또 여성들이 오랫동안 함께 살면 생리주기가 동조화되는 것도 한 예이다.
이런 예들은 질서의 교란에 대해 저항하고 계의 일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구성 요소가 많을수록 계는 더 교란시키기 어려운데 제멋대로 움직이는 요소는 그 질서를 강요받는 듯이 보인다. 앞에서는 요소들의 운동에 의해서 전체 수준의 계가 생성되었지만 이제 역으로 그것을 작용하여 그것을 규정하고 있다. 하켄에 의하면 이것이 자기 조직적 계가 출현하는 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