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론
결 론
성경에는 '목숨 값'이 나온다. 출애굽 때는 반세겔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 30:11-16)
이 돈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구조물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사용된다. 즉 목숨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아니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 만나기를 강요받았던 것이다. 구약에 성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특별히 너희들과 함께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신약에 와서 속전은 예수님의 피이다. 이것으로 충족되었다. 문제는 예수님의 영이 임한 자들이 이것을 세상에다 증거하는데서 '몸으로서의 성전'의 위상이 주어진다. 세상에서 기대한 종교적 형식을 정죄하고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숨 값'이 될 수 없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들의 종교 욕구는 성령의 취지를 이해못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형식을 고집하는 전통만 붙잡게 된다. 마치 구약 때 우상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방식이다. 따라서 형식으로서 교회됨을 나타내려는 교회를 밀치고 몸으로 증거되는 교회를 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교회를 말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희생이 요구된다. '희생'이야말로 지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진리펼침의 수행 모습이다. 몸을 계속 죽여나가므로서 약속 안으로 그 죽은 몸을 함유하는 성령의 역사, 그곳이 바로 참 성전이요 참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는 오늘도 사방에 널려 있는 어두움의 교회로부터, 권세로부터 핍박을 받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어두움은 빛으로 가장해서 공격하고 있으며, 빛은 거짓 빛으로 인해 소멸되는 식으로 그 거룩한 희생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어두움의 내막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짜증을 들어있다. 절대적으로 수립된 언약과 조건에 대해 반발하고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께 덤벼든다. 자기 구미에 맞도록 모든 삶의 조건을 다시 조정하고 편성하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의 끝에는 종교가 마련되어 있다. 종교란, 신에 대한 항의 방문를 주목적으로 한다. 인간편에서 장만한 온갖 신성한 경배성을 가지고 그들은 자기네들의 신에게 달려들고 있다. 인간편에 서서 인간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신이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집까지 지어주며 그 신을 달래준다. 거기에 가짜 메시야까지 제조해서 동원한다. '가상 예수'가 그리운 것이다. 교회라는 모임 안에서 '예수 닮기'란 일종의 연극이며 변장술이다. 예수가 패러디(parody) 되는 것은, (패러디라는 말은, 이미 한 물 간 이야기를 간단 명료하게 요약하여 다시 코믹스럽게 써먹는 연출 수법) 자신들도 예수 행위에 근접하므로서 예수의 사람, 예수의 제자로 변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받은 자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인간들 손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은 '남을 구원 시켜 주는 기관'으로서의 교회이다. 구성원들 각자의 의로움과 지혜와 양심과 포부가 한데 모아지면 그것이 곧 지상의 구현되는 천국인 양 여긴다.
어떤 이는 기도, 어떤 이는 전도, 어떤 이는 경건스러운 예배, 어떤 이는 구제하고 봉사하는 실천력을 앞장 세우면서 이들은 지금 연극을 하고 있고 경건스러운 대사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신비가 땅에서 실시하는 어설픈 연기력과 발광으로 열려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배 이벤트의 목적은 딴데 있기에 이들의 '교회 키우기'는 포기하지 않는다. 현대 성인들에게 교회의 본질은 '즐거움'에 있다. 보는 즐거움, 만나는 즐거움, 성스러움과 신비로움 속에서 헤엄치는 즐거움, 이런 즐거움이 있기에 교회를 찾는다. 인생에 있어 즐거움이란 일상성에서 오는 단조로움과 권태를 해체시켜 주는 효과를 준다. 신선하고 파격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줄 수 있는 있는 곳으로 교회는 아직도 성인들에게 있어 가상의 세계요 동화의 세계이다. 교회는 고객들의 이러한 요구를 눈치로 파악하면서 운영의 묘를 살린다. 이들 고객 확보에 교회 존립에 사활이 걸렸다고 보고 즐거움과 자극을 과잉으로 생산하는 종교 업소들이 난립하면서 여기에 자연스럽게 종교 시장이 형성된다. 목회자라고 부르는 같은 업종에서 종사하는 업주들 사이의 빈번한 담합과 자파 세력 규합은 이들의 영업 방침에 따라 하나님에 관해서도 변질된다.
이들은 신앙조차 조작하는 이데오르기 꾼들이다. 이들이 염두에 두는 교회는, 진리 앞에서도 기죽지않고 밀리지 않는 배짱으로 무장된 교회이다. 교회에서의 진실성이란 영업 실적보다 우선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리적인 측면에서 자기 교회를 검토하는 것은 마치 세무 감사 같은 것이다. 이로서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착란 증세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빵이라든지 포도주라는 딱딱한 죽은 물체를 매체로 되어 인간과의 주술적 만남의 장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거기에 참여 하므로서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죽은 물체와 상관없이 살아있는 육체들의 장일 뿐이다. 복음, 복음을 외치면서 서로에게 접근했지만 헤어질 때는 자존심 증감에 울고 불고 한다. 즉 인간들이 참여하는 곳은 예수의 익명성을 핑계로 뭉쳐져 있는 계층 사회이다. 자기 패가 모자란다고 느끼면 더 나은 오락 거점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황의 끝은, 그동안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자기 존재의 허전함을 투명하게 노출시키게 된다. 열심히 믿어보려고 용을 썼지만 그 뒤에 어김없이 날아드는 허탈감과 공허감, 그리고 하늘의 은혜로 이 빈 가슴을 다시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이런 것들의 반복이 예상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극지극한 되채움, 이처럼 교회란 피곤한 생명들이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피곤함을 달래고 잊기 위해서 모여든 유락 단체로 전락된다.
온통의 신의 것으로 가득 채워 놓은 그 공간 내에서도 인간은 신을 대신해서 다정다감한 친우와 사랑의 대상을 찾아헤맨다. 늘 혼자가 되고 싶은 욕망과 또한 사실상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이 각박한 현실에 대해 떨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 자신의 이상형으로 예수를 잡아놓고서는 그 예수에게 날마다 대들고 못살게 굴면서 스스로에게 가하는 학대를 대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갉아먹고 사는 존재이다. 끊임없이 신을 빚어내면서 자기 손으로 그 신을 못살게 군다. 교회 안에서는 신과 예수도 모조품이 된다. 이데아그라피(Idea-graphy)이다. 자신의 손을 놀려서 만들어낸 문화적 유산 안에 신을 인형으로 가두어 놓고 싶어 한다. 교회도 유구한 인류 문화의 유산 중의 하나의 산물로 간주되고 정신적 각성을 경험한 집단주의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 문화 유산 안에는 숭고한 종교가들의 헌신적인 인류 사랑을 극도로 높인다. 마치 하늘의 신에게 보란듯이…. 위대한 인간들의 이러한 경건한 행위는 전설이 되어 후대인의 귀감이 된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자기 집단 중심의 도덕적 자각이 피어나면서 이 조직 내에서 힘에 의한 강제권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발동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여기에는 힘에 의한 그 어떤 강제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 얼마나 현대 교회와 다른가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칭 거룩한 교회 안에서마저 끝까지 난봉꾼이다.
교회인과 그리스도인을 같이 보고 있는 이유는, 신앙이란 교회가 공급헤 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사상을 자신만만하게 관리한다고 믿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마저 사상적인 행동으로 분류되어 외형화 할 수 있고 반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외형화가 곧 체계 있는 신앙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이 '보는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해서 '믿는 하나님'까지 나아가려는 시도이다. '교회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인식을 계속 확대해 나가는 것 가운데 '인간 있음'이 '곧 '교회 있음'으로 나아간다고 여긴다. 필요한 권력과 권위는 자신들이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인간 세계를 뒤덮고 있는 보이지 않는 악한 힘을 의식하면서 '교회 세움'으로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해서 인간들은 기필코 참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설립해놓고 싶어한다. 이것이 우상이다.
존재의 끈질긴 생명력, 삶의 활력, 자신의 날개로 온 천하를 덮을 때까지 인간은 만족함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을 용서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언약은 자기 백성이라도 언약에 벗어날 때는 가차없이 처단해 오셨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민수기 33:55-56)
'그들에게' 즉 하나님의 원수에게 행하려고 생각한 그대로 자기 백성에게도 얼마든지 퍼부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피조물이며 교회는 하나님이 거룩의 침투로 생긴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의 긍휼 작업으로 생긴 것이다. 그 어떤 문화적 유산과 전통이 깊은 교회도 지금 이 순간 내리쪼이는 거룩한 광채 앞에 견딜 수 없다. 인간의 수치를 가리게 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 뿐이다. 유월절 때에 죽음의 사자가 건너 뛴 것은 오직 피 때문이었지 결코 히브리인들의 행함이 아니었다. 피를 보고 하나님이 자진해서 건너 뛰신 것이다. 따라서 인간 구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 쪽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교회는 가짜이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성과 심판의 당위성을 말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이다. 이것 때문에 성전과 교회는 인간들의 보편적 죄악 한가운데에서 피어난다. 참된 성전과 교회는, 오직 주님하고만 연관을 지어서 나타나는데 그 주님이 곧 심판주 되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의 '집'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 심판주가 계시는 거주자를 뜻한다. 따라서 심판주의 영이 계속 쏟아지지 않는 집은 거룩한 성전이 아니며 성도도 아니다. 인간들이 만드는 모든 조직과 건축물들은 인간 자기 몸의 팽창이며 확대이며 자기 질서의 증식이며 자연의 모조품이며 환상의 모사물이며 자기 상징물에 불과하다.
인간은 상징으로만 자기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데 이는 말씀이 기초하지 못한 채 말씀의 세계 안에서 무가치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미를 도리어 현실 삶의 구심점으로 여기고 힘의 원천지로 간주하려 한다. 결국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작업의 근원에는 이런 허망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음이 곧 신을 모방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빚어진 예수가 가짜 예수이다. 그는 늘 민중의 벗이요 위대한 영웅이요 든든한 후원자이다. 거기에 비해 참된 예수는 부담이 되는 인물이요, 좀 사라져줬으면 바라는 인물이요, 때로는 있으나 마나 하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3) 신약 때에 와서 이들에게 주어질 것은 십자가의 저주밖에 없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립보서 3:18-21)
저주받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구원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맹목적인 매달리는 구원에 대한 집착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무관한 교회들이 범람하고 있다. 이런 사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성전 건립을 허락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이다. 오직 하나님이 친히 성령을 넣어 주신 몸만이 성전 됨을 온 우주에 보이시겠다고 언약을 만드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몸을 가지고 열광적인 활동을 보이며 가상 성전을 인간들은 세웠다. 교회가 우상이 되는 과정은, 개인주의 사고로서 일단 페쇄적 집단으로 조립해 놓고서 두 번째 공작으로 공동체 의식을 주입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로서 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공존하는 단체가 되며 사람들은 교회 아니면 자기, 자기 아니면 교회만을 번갈아 보고 있다.
하나님의 인간들의 이런 가상 성전도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성전은 심판하는 곳이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1:19) 지상에 있는 그 모든 것을 심판하는 중심지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있고 성도는 그 지체이다. 이 안에서 십자가 약속이 반복되면서 거룩하지 못한 것을 가려낸다. 이미 예정된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킬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