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성경신학고린도전서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

성전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바가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서 무너지거나 혹시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오로지 약속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고 약속이 세워지면 다시 세워지는 것이 성전이다. 이처럼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일관성 있게 '언약'이라는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언약이란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지 결코 메시야에 대한 인간의 의무 사항이나 행동 지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의 교회도 이 '언약'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태도나 규범의 범주를 언급하는 것, 즉 기껏 인간의 행할 조건으로 규정한다면 그러한 언약 하에서의 교회란 구약에서부터 말해 온 성전도 아니요 그저 사이비 종교 체계에 불과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상으로서의 교회가 등장한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여호수아 24:19-20) 이 본문에서 언급한 원칙은 바로 언약에서 나온 원칙이다. 철저히 인간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언약 위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 하나님이 이제 신약에 와서 교회를 성전없음의 정신을 성전 완성으로 여기는 것을 기본 토대로하여 구성하시게 된다. 메시야 중심으로 백성들과 함께 있음으로해서 건축 구조물로서의 더 이상 구약 개념의 성전은 없어진 것이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그렇다면 이 새 언약 시절에 있어,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이는 인물이다. 오직 하나님 이외는 그 누구도 메시아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하나님이 필요로 해서 오직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성취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러한 단독 행위에 대해서 도전해 왔고 훼방했었다. 자신들도 육체를 가지고 몸을 가지고 있기에 이 몸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는 여력과 자질이 있다고 주장해 온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달리 이야기하신다. 새로운 몸을 준비하시므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주인공임을 천명하신다. 기존의 인간들의 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한 몸으로 일하시는 분이 누구시며 어떠한 차이점을 지니고 계시는가?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린도전서 15:45)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의 차이이다.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게 되면서 남을 살리게 되는 분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행위는, 자기 행위를 밖으로 표출할 때는 자기에게 영광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된다. 자기 위주의 영광을 나름대로 창출해 내는 것이다. 자기 몸이 중심이 되고 있다. '몸'이란, 육체를 지니고 있는 당사자가 그 물질 덩어리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양식이다. 몸 안에 모든 것들은 여백이 없이 촘촘하고 나란히 뭉쳐져 있다. 따라서 육체를 지닌 인간이 가장 불안해 하는 것은 육체 내부의 밀집성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띠는 질서들인데 즉 단절되어 있고 절단되어 있고 분리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육체가 해체되는 것에 겁을 집어 먹게 된다. 인간이 자기 육체를 꼭 꼭 소유하고 싶은 이유란, 이러한 단절과 육체내의 무질서를 해소하겠다는 의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도덕이라든지 윤리라는 것도 실상은, 자신의 몸을 무조건 중심으로 잡고서 그 대상과의 연결력 내지는 유합력(癒合力)을 시도하자는 노력이며 힘의 발휘이다. 몸을 지닌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존재하는 방식인 그 소유력으로 인해 계속해서 주변의 것들은 잠식해 나가므로서 몸의 팽창과 자기 질서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것이 곧 자신에게 진리며 정의(正義)이며 선이며 존재 논리이다.

이 진리관으로 인해 인간은 눈에 뜨이는 모든 것들과 접촉-결합-소유 라는 과정을 가지고 '산 영'으로서 그 고유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성전이라든지 신을 위한 모임을 결성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왕 '산 영'이기에 이 '산 영'을 기초로해서 신과 접촉해서 그것으로 곧 성전이 되어보고자 하는 본심으로 드러낸다. 물론 궁극적으로 신마저 자기의 일부가 되어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신의 능력이 자신의 신체 능력의 일부로 붙어있어 늘 자기가 원하는 때면 활성화 되기를 바라는 것) 인간들은 모든 것을 '산 영', '자기 몸'을 중추로하여 해석하기에 성전이라는 건축물과 인간의 힘과의 관련성을 생각한다. 인간의 정성으로 유지될 수 있는 성전을 하나님도 같이 받아드려주는 성전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러한 왜곡된 언약 이해에 대해서 하나님은 좌시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언약 안에서는 인간의 이름이 잠입됨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전부가 인간의 개인적인 '산 영'을 매개로 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언약 활동에 합치될 수 없다. 창세기 3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인간 속에 약속을 집어 놓으시면서 '죽음'을 매개로하여 활약하신다. '죽음'이란 모든 가치의 부정을 뜻한다. 모든 것의 소멸이며 사라짐이며 없어짐이다. 더 이상 소유와 소유의 고리를 이어나갈 그 원래의 원인마저 없어진 것이다. 죽음을 매개로 하기에 구약의 성전도 '없음' 정신의 극치이다.

거룩한 죽음만이 피를 튀면서 반복될 뿐인 성전 뜰 안 제단 위의 광경은, 성전과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를 보여준다. 즉 성전은 '인간 죽음'의 극치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희생 제물의 반복적 희생을 통해 죽음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음' 상태와 '모든 것이 죽어 있음'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래야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 다움 활동이 그 토대 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행위 주체자에 대해 '산 영'과 '살려주는 영'의 대비인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 여타의 몸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몸으로 보여지겠지만 그러나 그 분은 살려주시는 몸이시다.

하나님의 언약은 몸을 통해서 성사된다. 메시아의 몸이란 오직 언약에 의해서 언약의 내용을 담기 위한 목적으로만 창조된다. 따라서 메시아의 몸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몸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몸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린도전서 15:50) 인간의 몸, 즉 인간은 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는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이루어나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성할 뿐이다. 새 언약 체결자로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신 것은, 이러한 모든 세계를 허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허무는 작업은, 인간의 몸 자체를 공격하는데 있다. 즉 죽음의 몸으로서 만들어 내는 세계는 곧 죽음의 세계일 따름인 것을 명백하게 지적하려 오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도 이런 취지에서이다. 십자가 죽으신지 3일만에 부활하신 것도, 자기 백성을 찢으시고 그리고 도로 싸매어주시는 사역의 주체도 오직 하나님 자신임을 증명하시기 위함이다. 그 중심 사역에 메시아가 계신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1-2) 즉 예수님만이, 오직 예수님만이 메시아 사역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기존 인간 세계을 옹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말씀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13)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말씀으로 된 몸만이 생명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외형적 변형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몸'만이 새 생명이며 유일한 생명이라는 분명히 하는데 초점이 있다. 말씀의 성취, 언약의 성취는 말씀의 몸되시는 분만이 담당할 몫이며 영광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기존의 몸과의 대 투쟁이 벌어진다. 말씀을 온전히 수행해 내지도 못하는 몸들과의 전쟁이다. 진리도 아니요 생명도 지니지 못한 몸과의 싸움이다. 말씀과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서도 오로지 죽음밖에 양산해 낼 수 없는 그런 죄의 몸과의 전투가 개시되었다. 기존의 몸들은 자체적인 죽음의 힘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말씀의 몸은, 성령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또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줄 수도 있는 몸을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복음 7:38-39) 육신과 성령의 몸과의 싸움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6)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 3:3)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몸으로 발생된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깊이는 다 드러내시고 계신다. 자기 백성을 찢고 때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 낼 수 있는 새로운 백성, 새로운 몸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마련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세례 베풀기를 주저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 즉 예수님이 먼저 물세례와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받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가 완성이 된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가득 담겨 있는 모습이어야 한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가 주어지게 되면(사도행전 2:38/8:16/참조:고린도전서 6;11)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가 가득히 함유된 그런 창조 정신을 기초로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야기가 한 그대로이다. 사도행전 2:3에서 오순절날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성령이 나타났다고 되어 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인간의 신체 구조의 일부의 형태로 등장하면서 또한 불의 모습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들의 이름을 심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은, 심판을 극복한 나사렛 예수님으로서 나타난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이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뜻이다.

다른 인간들이 이름을 각자 지니고 있는 그런 세계에서 예수님도 나름대로의 인간적 이름을 지녔다. 하지만 사도행전 4:12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고 오직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을 주는 주의 이름이 된다. 다른 이름은 왜 구원의 매개체가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원 창조의 기능과 능력이 없는 이름은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이 새 이름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 (요한계시록 2:17) 그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구실을 못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의 깊이를 인식하고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 세계에 들어오셨다. 만약 예수님의 이름에 기대를 걸고 따른다면 그들의 이름도 하늘 나라 생명 책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20) 이 생명의 이름에 합당하게 이들은 새로운 형상으로 변화되는데 그 수준은 예수님의 형상 만큼이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린도전서 15:49).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로새서 1:15/고린도후서 4:4).

전에 창세기 6장에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신께서는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받은 자를 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로새서 3:10/갈라디아서 4:19). 이 아들의 형상을 입을 자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29) 이렇게 형상을 기어이 새 창조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처음 창조의 영광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이름을 부정하고 오직 주의 이름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이 이름이 친히 행하셨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제 위치에 다시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주님의 얼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셨던 주님의 이름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4) 이처럼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었다.(로마서 5:14)

교회는 이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름 때문에 생겨난 부산물이 교회이다. 이름이 몸(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곧 교회도 몸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몸이기에 기존의 몸과는 구별되고 차이 난다. 교회가 몸이란 관점에서 설명되는 여기에는 처음 창조 때의 남자와 여자라는 두 사람이 합쳐져서 한 몸을 구성된 신비가 몸의 의미가 필히 담겨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에베소서 5:30-32) 이 본문에서, (1)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2)남자를 가정의 머리로 볼 때, 여자는 남자의 지체의 자격으로 남자와 결합한다 (3)그래서 가정이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한 몸이다. (4)이 비밀이 크다. 왜냐하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가정의 원리를 원용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들은 지체라 했을 때, 이 머리와 지체가 한 몸을 이루는 비밀이 몸이 창조 될 때의 그 원리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로 인식되는 교회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몸이 운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몸은 붙여진 '이름의 작용'에 준해서 이끌림 당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새로운 약속의 몸을 구성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 이 본문에서는, '그 이름'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권세는 '그 이름'과 관련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세상의 혈통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기존 아담 몸의 혼인 관계에서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5-17) 이 본문에서도 분명히 '∼이 아니요 ∼ 이요'라는 형식이 나오는데,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인간 혈육의 능력을 배척하는 개념을 함유하고 있다. 인간의 혈육 계통의 맥은 남 여 사이의 혼인이다. 이 혼인으로 혈육은 유지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이 혈육 계통과 무관하다는 것이며 더나아가서 이 인간 혈육을 배척까지 하는 것이다. 생명이 되는 자식은, 하나님의 약속 말고는 있을 수 없다. 어머니는 있지만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식이 약속의 자식이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라디아서 4:26-27) 이 본문에 나와 있는 말씀 중에서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라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태어난 성도를 지칭해서 '남편 없이 태어난 자식' 즉 '어머니는 있는데 아버지가 없이 태어난 자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고 이 본문은 소개해 주고 있다.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는 말은, 생명으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이다.
새 언약은 이처럼 교회를 하늘의 어머니와 관련 지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데 그 작업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마련되었다. 아들 낳는 작업의 기초는 혈육을 부정하는데 있다. 예수님 자신의 출생부터 그러하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26-32) 처녀가 수태를 한다? 예수님은 왜 비정상적으로(?) 태어나셔야만 하는가? 해답이 누가복음 1:37-38에 나온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인간의 육 속에서 말씀이 확보할 수 있는 그 신빙성의 범위와 대조가 되는 경계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즉 마리아는 정혼한 남편이 있는 여성이다. 그런데 아직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은 용납되지 않는 상태이다. 만약 이 여성을 아기를 갖는다면 그 가능성은 남편을 위시해서 세상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 이외에 달리 생각될 수 없다. 이것이 육적인 세상이 처해 있는 제한성이다. 이런 제한성 안에 마리아가 놓여 있다. 이점은, 약속을 보여주는 배경으로서 중요하다. 이 마리아 입에서 전혀 딴 소리가 나온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마리아는 '말씀의 능력'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자신을 넘겨버린다. 그리고 기존의 육적인 능력을 부정해 버린다. 남편 사이에서 아기를 못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아기는 육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 자체적으로 실시하게 되는 그 약속의 능력으로 수태를 했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런 고백은 약속이 기존의 육의 세계 안에서 자리잡아 육을 정죄하고 비언약적인 그 죄악성을 징벌하는 근거로서 자리잡게 된다. 즉 왜 "∼을 하지 않았나" 때문에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을 진심으로 고백하지 않는가" 때문에 정죄된다. 말씀 그 자체가 갖는 능력을 불신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육의 능력을 토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생명을 취급하는 그 질이 다르다.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자기 몸의 생명을 이해하고 접근한다. 언약적이 아니라 비언약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몸에 대한 말씀의 근원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데서는 전혀 언약이 비춰 나오지 않는다. 약속이 담겨 있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로마서 4:18-22) 마리아에게 다가온 천사는, 약속된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소개했고 그것을 마리아는 수용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누가복음 1:54-55)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가진 부친 사가랴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누가복음 1:72-73,76)

이로서 마리아나 사가랴나 세례 요한이나 엘리사벳이나 모두 오직 하나의 언약을 증거 하는 고백자인 동시에 말씀, 즉 언약의 흔적을 지니게 되는 육이 되었다. 약속이라는 메시아를 잉태하는 흔적을 지닌 자들이 된다. 이들은 자신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는다. 단지 말씀의 작용에만 굴복될 뿐이다. 구약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온 그 옛 언약들의 실체는 이들 고백자들의 처해 있는 제한된 몸과 제한된 삶의 환경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기초로 한 행위를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신약의 성도들은 동참되고 있다. 마치 유명 인사를 지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볼 때는, 군중들의 움직임이 작게 여겨지지만 막상 그 유명인사가 있는 그 현 지점에서는 민중들이 서로 그 유명인과 접촉하려고 그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또한 경호원들은 가까운 민중들을 과격하게 떠밀면서 VIP에서 떼어놓으려고 애를 쓰는 이런 현상과 유사하다. 오직 한 분만을 주목하기 위한 목표로 구약에서부터 말씀은 줄기차게 성취되어 왔다. 인간의 몸과 하늘의 몸은 도저히 함께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신약에서는 극히 과격하게 취급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하다".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도 같은 취지이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도발적이다. 말씀이 지닌 능력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가까이 하기는 너무나 멀고 구별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분은 더욱 더 이 세상 밑바닥까지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신다. 왜냐하면 육의 한계성과 그 죄악성을 그 자신의 육으로 전부 표현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육의 근원을 뿌리째 흔드신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지향되는 삶이다. 누가복음 초반부에 나타난 이 고백자들이 곧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원형들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로 통해서 전해지는 주님의 계시와도 일치된다. 성도에게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았다는 말이다. 더 이상 의지해서도, 기대해서도 안되는 존재로서 자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구성 요소로 삽입된다. 오직 하늘에게 제공 된 그 한 몸만 의지되어야 한다. 이 몸과 결합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맨 처음의 창조 원리의 톨에서 실시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세기 2:22-25) 이 본문에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한 몸이다 는 말이다. 비록 외형적으로 두 사람, 즉 두 몸체로 분리되었다 할지라도 한 몸이라는 사항은 변동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창조 원리에 의할 것 같으면, 출처가 되는 분에게 예속된 자는 비록 몸체를 따로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한 한 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2-13) 한 몸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한 몸' 되게 하는 요소가 따로 있음을 말하는데 이 요소는 '한 몸'으로 결속시키는 원천으로 작용된다. 이 관계를 잇는 양편 중에서 원천에 해당되는 것이 '머리' 이며 종속되는 관계가 '지체' 이다.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린도전서 11:3) 이 본문은, 남자와 여자 사이를 머리와 몸체이라는 호칭으로 대신해도 무방함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한 몸이라는 원래 창조 원리를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왜 다같은 몸에 머리 부분이 따로 있어야 하며 지체로서의 몸통 부분이 따로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원리는 늘 자신이 창조하실 때 세웠던 그 원리에 따라 언약하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언약에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한 몸'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그 질서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이 친히 그 창조 세계를 통해서 안식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악마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포기 내지는 무산시키는 방향으로 인간을 유혹했다.

범죄한 후에 아담과 여자는 서로 딴 몸으로, 타인으로 간주하면서 죄악을 전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훼손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본래의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창조의 원리를 어떻게 다시 유지될 것인가?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린도전서 6:16-17) 이 본문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고 하셨다. 몸과 몸이 성관계를 갖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다. 그래서 그 둘은 한 육체가 된다. 하지만 '주와 합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주님과 합해 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있어 몸이 어떤 한 위치에 점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될 때 이 말씀이 수용된다. 마치 창기가 창조 원리에 있어 여성의 자리에 있고, 창기와 합하는 자가 창조 원리에 있어 아담의 위치에 있는 것 같아서 서로 합하면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떠한 분이기에 창조 원리에 적용을 받는 분이란 말인가? 이 해결책은 고린도전서 6:19에서 비롯될 수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이 본문에서, 몸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성전이라는 구약적 용어가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서슴없이 상호 결합시켜 의미를 창출한다. 몸이라는 단어와 성전이라는 단어가 무리 없이 결합시키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얻어진다.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 2:16-17/19-22) 이 본문에서 구약이 하나 인용되어 있는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본문은 시편 69:9의 말씀 들어 있다. 그 대목을 찾아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 집'은 성전을 뜻한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뜻한다. 즉 다윗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바로 누구보다 더 성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시편 69:8에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시편 69:9을 계속 보면, 그 성전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성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그들이 진정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다윗과 그 가문이 주님의 의도하는 성전인데 이 사실을 그들은 몰랐기 때문에 성전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참된 성전인 다윗을 못살게 굴어서 도리어 하나님의 성전을 깨는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이 시편의 정황은 예수님을 통해서 재현되어야 되는데 그래야 말씀이 예수님으로부터 완성이 된다. 즉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냐 아니면 건축 구조물이 성전이냐 하는 판단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오셔서 몸이 수난(훼방)을 당해야 하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이 말씀을 믿었다. 왜 성전 구조물이 성전이 될 수 없느냐 하는 최종 결정은 예수님의 육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예수님의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육체성으로 인해 창조 원리는 다시 성취의 계기를 맞이한다. 창조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창조 작업은, 필히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사고 방식을 가진 세력들이 배경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의 훼방하고 주님의 일을 배척하는 그런 세력으로 인해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한 몸으로 다 집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완벽하게 훼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로 삼아진다.

즉 그 어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서 말씀을 성취할 능력이 없음을 보이는, 인간의 종말 처리장이다. 동시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분노가 담긴 답신이다. 인간들의 할 수 있는 모든 부르짖음과 종교적 절차와 의식, 예배, 간구, 금식, 윤리적 행위, 기적들과 신성한 체험들이 모두 십자가 앞에서 부정된다. 십자가는 육을 가진 인간의 막다른 골목이기도 하다.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준비할 차례이다. 물론 인간의 요구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 구현을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건축물로서의 성전 거부는 신약 시대에 있어 성령 세례받은 모든 성도들의 입장에도 같이 적용된다. 예수님만 자기 몸을 성전으로 간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성령 세례받은 모든 이의 몸도 성전으로 간주된다. 이들도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공간적 개념의 성전을 부정하면서 말이다. 관권은 성령에 있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워진 성전은 이제 '기도하는 공간'으로서의 '집'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결과를 나타난 성령께서 거처하는 '거주지', 곧 성도의 몸이 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진정한 예배는 제사공간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요한복음 4장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통과를 실시한다. 거기서 만날 한 여인을 기대해서인데 이 여인은 신학적으로 두 가지의 특징을 지닌 채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물이 필요함'이요 다른 하나는 이 여인이 유대인의 율법적 관점에서 볼 때 구원밖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나름대로 그 시대에서의 구원관을 피력하고 있다. 자기네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있다고 말한다.

꼭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지를 예수님에게 묻고 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문자적으로 에스겔에 나오는 새 성전을 그대로 지은 성전이었다.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에스겔 새 성전을 해석했던 것이고 그 이외에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구원이 유대인으로 온다는 점을 우선 상기시킨다. 그렇게해서 에스겔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새 성전에다 의미를 준다. 하지만 해석에 있어 우선권을 공간 건축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맑은 물', 즉 '성령의 쏟아짐'에다 둔다. 예수님은 행실이 비정상적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주시겠다고 미리 당부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은 이 대화에서 에스겔 새 성전과 그 예배에 대해서 해석하시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의 장소적 의미를 배제해 버리신다. 따라서 건물로서의 개념도 자연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왜 유대인들은 에스겔 새 성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헤롯 성전을 세웠을까? 그들은 철저히 죄인된 육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언어를 해독할 이성과 감각을 이미 가졌다고 여기며 바로 이점을 고려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건된 문화적 작업을 통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새 언약의 시대의 사정에 어두웠다."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린도후서 3:6)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1-23) 여기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말씀을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해석했는가?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한복음 4:25)

메시야, 즉 기름부음 받은 약속의 왕이 먼저 와야 참된 영의 예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러한 주장은 예루살렘의 헤롯이 지은 성전을 염두에 두면서 에스겔서 전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관을 제시한 것이다. 즉 예루살렘의 새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결코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한다면 에스겔의 새 성전은 이미 문자적인 건축구조물을 배제하고 있다. 문제는 메시야가 오셔서 성령을 주므로 가능한 예배만 참된 영적 예배이다는 해석만 남아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요한복음 4:26) 새 언약(신약) 시대의 예배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메시야를 만나게 되는 것이 영적 예배이다. 뿐만아니라 성전의 성립도 건물이 아니라 건물이나 몸과 대비되는 성령에게 있다. 그런데 성령은,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열광적인 종교적 신비체험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메시야께서 직접 공급하는 영이시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한복음 4:14-15)

에스겔 새 성전의 해석은 이미 메시야가 오셔서 직접 해명하시므로 밝혀졌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성령이 직접 예수님의 육체로 나온다는 이점이 해석의 핵심 요소가 되는 부분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한복음 7:39-39) 에스겔 47장에서는, 새 성전에서만이 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왜 예수님은 에스겔 새 성전의 핵심 주제를 성령이 나온다는 사실에다 두었을까? 그것은 성전이란 늘 하늘의 보좌를 원형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은 보좌 가운데 계시는 신이시다.(에스겔 1:20-21)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왕과의 계약이 완성되었을 경우에는 지상에서도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성전이 된다. 어떤 인물이 메시야냐 아니냐의 판단은 그 인물이 모든 율법을 이루었느냐로 판가름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생을 율법을 완성하기 위한 여정으로 보고 계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태복음 5:17) 그러면 그 최종 완성의 모습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0:17-18)

이 본문에서 '이 계명은 아버지에게서 받았다'고 하셨다. 어떤 계명인가? 목숨을 버리는 계명이다. 왜 버리셔야만 되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25) 이 본문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하셨다. 영광이란 말씀이 완수되었을 때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요 율법의 완성이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분에게 말씀의 완성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과연 예수님이 주의 이름일 수 있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완성된 새로운 언약 때문에 영을 쫓지 아니하고 자기 육체를 의존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의 한계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린도전서 15:50) 주의 이름은, 이처럼 영을 따라 사는 자와 육으로 사는 자를 가려내고 구분시키는 기준이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5:3-5) 이 본문에서, 주 예수의 이름이 무슨 능력을 어떻게 발휘시키고 있느냐가 잘 나타나 있다.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당부를 염두에 놓고 고찰해 보면,(고린도전서 5:9) 개인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느냐가 이 본문의 초점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함께 있는 그 상태는 항상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적 세계에 육적인 인간이 끼는 것을 결코 주님이 용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룩에다 비유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린도전서 5:6-7)

주 예수님의 몸이 어린 양이라면 그 어린양에게 속한 자는 누룩 없는 무교병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누룩을 그 공동체에서 추방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집단에게 일어나는 권능이요 능력이시다. 비록 사도 바울은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러한 영역에 주 예수 이름의 권능으로서 영으로 함께 있을 수 있다. 음행을 하는 육적인 사람은 그 집단에 있지 말고 사단의 세계로 넘겨지는 마땅하다. 누룩이기 때문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치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음행 하는 자의 영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의 영도 구원에서 탈락되는가? 성경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는 목록들이 나와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9-10) 교회 내에서 음행하는 자는 어떻게 하든 다 구원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동시에 음행 하는 자는 다 지옥 간다는 말도 아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린도전서 6:11) 즉 여기에 성령이 개입된다.

주의 이름이 이룩해 놓으신 상황을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의 그 결과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이 성령의 활동으로 구원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단에게 넘겨주는 자이다. 애초부터 사단에 속한 자와 사단에게 주님이 넘겨준 자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단에 속한 자는 사단의 위력만이 작용하지만 사단에게 넘겨준 이는 여전히 그 세계에 있더라도 주의 이름의 능력을 발휘되어 그의 영이 주의 날에 구원을 얻게 된다. 한 번 예수 믿는 이는 결국 다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에 사단이 저해하도록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주의 이름으로 일하시는 공동체에 사단의 유혹과 패역이 쓰며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음행 하는 자를 공동체에서 추방시키시는 것이다. 남는 것은 온전한 공동체이다. 주의 이름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그 부름에 합당한 몸이 되고자 하신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은, 개인 구원에 초점을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그리스도 몸을 이루고자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점에 있다.

이름이란, 그 이름에 합당한 몸을 존재를 기정 사실화하고 그 몸을 지향하면서 지상에 나타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합당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성령께서 바로 이점을 목표로 성도의 몸에 대해서 활동하신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완전하며 완벽하냐를 지적하자는 것이 아니다. 추방될 자를 추방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각자의 이름은, 이미 상실된 상태이다. 따라서 자기 몸에 대한 소유권도 상실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성도의 몸에 새로운 소유자로 등장하셨다. '성령의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이 단지 인간의 품성을 향상시키는데 협조 정도 해주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애굽기 13:2) 이 본문은 처음 출애굽 할 당시를 말한다. 모든 애굽의 장자를 죽이던 날 밤, 히브리인들의 장자도 사실상 그 이름이 죽은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자기 맏아들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 것이 되고 말았다. 맏아들의 몸은, 하나님 이름으로 사용되기 위해 소유권이 하나님으로 넘겨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의 대상이 된 자의 몸도 주의 이름을 표현하는 몸으로 전환되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자기 죽음(자기 십자가)을 짊어지고 따를 것을 요구한 것도 이런 취지였다. 주님은 자기 앞에서 인간들의 사적인 몸과 이름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사실 12제자 중 어느 제자도 이러한 주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예수님 승천 이후 생겨난 교회 내에서도 입장은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던져 넣을 자는 없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심을 보이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만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그 분인 것을 증거 하는 성전이어야 한다. 어떻게 예수님을 주시라고 증거할 것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 이름을 태우고, 죽이고, 부수는 것이다. 마치 옛날 성전 안에서 희생 제물이 낮 밤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번제의 연기가 피어올라 제사가 이어지는 것과 같다. 성령께서는, 쉬지 않고 성도로 하여금 자기 몸을 자기 몸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추방을 하게 되고 징계를 하게 되고 정화와 정결 작용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리고 늘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도록 해서 자기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확인시키신다.

성도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의 이름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이유는, 현재 주의 이름이 몸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지상에서 날로 후패해 가는 몸 관계에 있어 성령이 개입하시므로 성도의 몸을 결국에는 예수님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환시키시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주의 이름에 소유된 몸이었던 것을 온 우주가 다 알 수 있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성도의 몸이 주의 이름으로 인해 성령이 거하시게 되는 동기는 예수님의 몸에 성령이 거하시고부터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기 몸과 똑같게 다른 이도 성령의 세례를 받기 하기 위해서이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한복음 1:31-34) 이 본문에서 세례의 역할은,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외모나 외형으로 봐서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가 구분되지 않는다. 성령의 세례로 확인될 뿐이다.

즉 성령을 줄 수 있는 기능자로서의 아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참 아들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또는 아들이기에 성령을 받게 될 뿐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로마서 8:16) 이와같이 성령 세례를 매개로하여 아들와 아들 관계가 형성되는 이유는, 기존의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던 혈통의 관계 사슬을 통해서 그 안에서 새로운 '하나됨'을 시작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드러나는데 이는 예수님의 위상이 하나님의 보좌의 원형과 관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성전에서 성신이 나오시는 경우를 말하는데 하늘의 거룩이 원래 하늘의 보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거룩이 성령을 매개로하여 하나님의 백성도 같이 거룩할 수 있는 작업에 추진하여 말씀의 완성, 언약의 완성에 도달하시고자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브리서 2:11-12)

이 본문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말씀은 성전 언약, 다윗 언약이 완성될 때만 가능한 상태이다. 말씀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진정한 왕에 의해서 중매되고 이 왕이 또한 참된 아드님이시다. 그런데 이 아드님의 기능이 이스라엘 왕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에스겔의 새 성전에 의하면 왕이 있는 성전에서 성령을 부어지게 되므로 하나님의 백성도 인자와 같이 성령 세례을 받을 수 있는 영역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약 시대에 와서 성령 세례를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말은 이제 다윗 언약에 의하면 참된 왕과 성전이 완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을 받게 되면 이제 완전히 거룩에 참여되게 될 뿐 아니라 다 같이 말씀(언약)의 완성형 안에 들어가 있기에 오직 '하나의 원천'에 상호 공유되고 있어 형제라고 불리워질 만하다는 것이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성령 세례가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지실 예수님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몸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이름의 활동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름과 몸의 일치성은 성령이 주도하시므로 온전한 창조의 원리가 준행된다. 후패되어 가는 인간들의 몸에 대해서 그 인간들의 이름을 죽이고 그 이름을 주님의 이름 아래 복속시켜 주님의 몸으로 형체를 변화되는 것에 성령이 개입하시는 것과 이와 같은 원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거룩한 이름이기에 주의 이름이 거하는 몸도 거룩한 성전으로 불린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1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3,392 성경신학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2)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6-11-29
3,391 성경신학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 - 최고관리자 06-11-29
열람 ➜ 성경신학 10.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6-11-29
3,389 성경신학 9. 학개와 스가랴에서의 성전 - 최고관리자 06-11-29
3,388 성경신학 9. 학개와 스가랴에서의 성전 스가랴 최고관리자 06-11-29
3,387 성경신학 8. 인자와 새 성전의 구조 에스겔 최고관리자 06-11-29
3,386 성경신학 7. 새 성전 등장 - 최고관리자 06-11-29
3,385 성경신학 7. 새 성전 등장 전도서 최고관리자 06-11-29
3,384 성경신학 6. 다윗 언약 시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 사무엘하 최고관리자 06-11-29
3,383 성경신학 5. 인간의 몸과 성전 - 최고관리자 06-11-29
3,382 성경신학 5. 인간의 몸과 성전 레위기 최고관리자 06-11-29
3,381 성경신학 4-3 제사장에 나타나는 심판과 긍휼 - 최고관리자 06-11-29
3,380 성경신학 4-3 제사장에 나타나는 심판과 긍휼 - 최고관리자 06-11-29
3,379 성경신학 4-2 제사 드리는 제물에서 비쳐지는 심판과 긍휼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6-11-29
3,378 성경신학 4-1 제사 지내는 장소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6-11-29
3,377 성경신학 4-1 제사 지내는 장소 이사야 최고관리자 06-11-29
3,376 성경신학 4. 거룩의 지속성 - 최고관리자 06-11-29
3,375 성경신학 4. 거룩의 지속성 레위기 최고관리자 06-11-29
3,374 성경신학 3. 성전의 원형 신명기 최고관리자 06-11-29
3,373 성경신학 3. 성전의 원형 신명기 최고관리자 06-11-29
3,372 성경신학 2. 신전 건립에 치중하는 인간성 창세기 최고관리자 06-11-29
3,371 성경신학 1. 사람들이 남기는 것 - 최고관리자 06-11-29
3,370 성경신학 1. 사람들이 남기는 것 미가 최고관리자 06-11-29
3,369 성경신학 머리말 - 최고관리자 06-11-29
3,368 성경신학 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끝 십자가와 전도 - 최고관리자 06-11-2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