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자와 새 성전의 구조
8. 인자와 새 성전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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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자와 새 성전의 구조
다윗 왕의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왕과 목자 때문에 이스라엘 국가 내부에 있어 의의 계통는 산산조각 났다. 목자들은 자기만 배불리고 있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34:2)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심판받아 무너지고 왕도 사라진 상태이다. 왕이 사라졌다는 것은 거룩한 제사장직이 없어졌다는 말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의의 차단막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제 각 사람은 바로 심판의 하나님과 바로 마주서게 되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18:2-4) 아버지 조차 아들의 불법을 대신하여 죽을 수 없고 아버지의 의가 아들에게 전가되지도 않는다. '대속'과 '속죄'의 복이 이스라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오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14:14,20) 여기에서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라는 대목이 나온다. 혈육과 가문도 한 몸으로 간주되지 못한다. 언약적인 몸의 의미가 개별적 몸의 의미로 머문다. 다시 언약적인 몸이 등장하지 못하면 몸과 몸을 묶어주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 다윗 언약은, 하나님과 다윗의 몸이 만나서 성사된 것이다.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관계이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아들이라고 불렀다.(사무엘하 7:14)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관계는 다윗 언약 안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나님의 거룩과 의는 다윗 가문의 것이 되고, 이 관계는 왕과 백성과의 관계로 확산 적용된다. 비록 현 이스라엘은 몸과 몸이 해체 된 상태이지만 다윗 언약만 회복된다면 이스라엘 내부의 온 몸은 다시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가 된다.(37:10) 이 관계의 성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는 여호와의 말이니라"(34:22-23) 다윗이 목자가 되고 왕이 된다는 것은, 왕과 백성 사이에 거룩과 의를 전달시킬 수 있는 관계성이 다윗언약의 구조에 따라서 재구성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왕의 거룩과 의는 그대로 백성에게 전달되게 된다. 이것이 화평의 언약이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34:25) 마치 민수기 25장의 비느하스의 경우를 재현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12-13) 이 화평의 계약을 주선하고 성사시키는 것이 성신이시다. 성신은 하나님의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성과 심판성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성신에 의한 준비된 몸이 등장하는 것은 곧 다윗 가문의 잘못에 대해 심판의 의지로 증거해야 하는 몸이다. 성전이 왜 무너져 버렸는지 그 원인과 이유는 알게 만드는 자가 필요하다. 그 인물을 행하여 하나님은 [인자]라고 호칭하신다. 옛 다윗 언약 틀에서 언약적 몸을 지칭하시는 것이다. [인자] 안에서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대우를 받는 한 몸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인자 개념은 시편 8편에 의하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소멸되어야 될 실존을 두고 말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3-8절) 하지만 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편 80:17) 즉 '초라함'과 '다스림', 이 양 요소를 다 함유한 언약적 몸이 바로 [인자]이다. 이 [인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혜택을 입은 자이다. 즉 죄 용서받은 몸이라는 뜻이다. '초라한 [인자]되시는 분의 언약적 다스림 안에서 이스라엘도 같이 그 다스림의 혜택을 누리는 유일한 백성이 된다. 똑같은 통치성 속에 놓여 있는 똑같은 아들이다. 하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제사장 언약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제사장으로서 다윗 왕이 등장하고 그 다윗 왕은 인자라는 실존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그 역할이 에스겔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제 이 인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자]와 [성신]은 서로 대비되는 개념으로 에스겔서에 자리잡게 된다. 즉 [인자] 시절 때의 성전과 [성신] 시절 때의 성전을 대조해 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권능으로 데리고 다니셨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한 결과이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1:3/2:2/3:12,14,22,24/8:3/11:1,5,24/37:1/40:1 참조)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그의 생활 속에 집어 넣으셨다. 따라서 에스겔의 행동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에스겔에 의하면 인자된 자는 성신을 가득히 받은 사람으로서(2:2), 여호와의 말씀을 널리 전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2:3-3:27). 그와 함께 살고 있는 백성들은 그를 보려고도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12:2-11). 그는 예루살렘을 부정적인 안목에서 예언을 해야 했고(4:7), 종말을 고하면서 위협조로 말해야 했다(11:9-11). 그가 전하는 말은 하나의 수수께끼요 비유요 은폐된 말이다(17:2). 그는 계시의 전달자로서 또 파수꾼으로서 장차 이스라엘에게 닥칠 험악한 심판 속에 미리 들어가 본다. 2:6에서는 가시와 찔레와 전갈 속에 있는 것 같을 것이라고 했고, 4:4-8까지는 390일동안 모로 누워 자야 한다. 4:9-12에는 보리떡을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서 먹어야 했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인간 똥을 떡으로 구어야 했다. 5:1에는 수염과 머리털을 깎아 불사르고 사방으로 날려야 했고 8:8에는 담을 헐어야 했다.
12:3에는 행구를 만들어 대낮에 적의 침공에 의해서 이사가는 모습을 보여야 했고 12:4에는 포로 잡혀가는 시늉을 보이기도 한다. 밤에는 성벽을 뚫고 나가고 20:46에는 삼림을 향하여 예언하고 24:3-5에는 가마솥을 걸어 놓고 고기를 푹삶아야 했다. 특히 24:15-24에는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아야 하는 지시를 하나님께 받는다. 이런 일련의 예언 행위는 심판 날의 정황을 미리 징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인자 되는 선지자에게는 이미 심판 날이다. 성신이 계속해서 인자에게 임하여 이런 일을 시키고 계시다. 그것은 [인자]가 지닌 옛 성전의 파괴 원인을 함유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성신 아래 있으면서 과거 성전이 파괴는 원인까지 한 몸을 짊어지고 가는 이 에스겔의 운명을 바탕 속에서 새로운 성전의 주인공인 다윗 왕의 면모가 엿보인다. 즉 다윗 언약의 회복의 기운이 성신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37장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골짜기를 구경하게 된다. [인자]되는 에스겔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37:2-7)
이 본문에서, '뼈'가 나오고 '생기'가 나오고 '여호와'가 나온다. 즉 죽었던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거대한 군대로서 회복된다는 것이다.(37:10) 마치 창세기 2장를 다시 보는 것 같다. 인간을 창조하시는 분이 주의 영이 된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편 104:30) 죽은 이스라엘이 새로 창조 되었다는 이 말씀은, 다시 백성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신을 통해 맑은 물과 새 영을 제공받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인자] 위에서이다. 왜냐하면 그 만이 성전의 무너짐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라고 부르시는 것은, 새로운 성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에스겔에서의 성신의 일이란 1:12,20/10:17에 있는 말씀처럼 천사들을 모는 것이고 그 목적은 그 천사들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참된 성전을 이스라엘 속에 두시려고 하는데 있다. 천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까지 이끌어 제대로 된 성전을 건립하는 것이 성신의 목표이다. 이러한 작업의 중심에 바로 '人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존재한다.
성신의 활동이 人子를 통해서 진행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언약 중심이 되어 온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과 관련 있다. 인간 다윗의 자의적인 발상에 의해서 세워진 솔로몬성전은 그 자체로서 국가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도를 가름하는 척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성전이 우아하고 멋지게 지어졌어도 만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 있다(열왕기상 9:6-9). 그런데 도대체 인간들은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죄악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내놓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이었다. 문제는 마음에 있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에스겔 36:27) 예레미야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 포로 잡힌 데서 돌아오는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게 되는데 새 언약이란 딴 게 아니라 백성의 마음속까지 성신이 임하여 그들로 하여금 율례를 행하게 하는데 있다. 따라서 새로 지을 성전은 옛 언약적 방식이 아니라 새 언약적 방식의 성전이 된다. 성신과 연관되고 인간의 마음과도 연관된 성전이다. 성신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까지 침투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에스겔 선지자의 경우를 통해서 밝혀진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자]라는 호칭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신과 권능에 의해서 붙잡혀 있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신에게 붙잡혀 있는 형편이 한 마디로 말해서 고난이다. 즉 하나님께서 기존 옛 언약에 기초한 성전을 멸망시켜 버려야 하는 그 심정을 계시로서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이 임했기에 에스겔은 새로 돌아 올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고난받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 같이 심판 받고 있는 처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은 [인자]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고 계시다. 성전의 파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질의 죄 때문에 빚어진 사태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성전도 역시 이스라엘의 백성의 마음과 관련 있다. 여기에 새로운 마음이 필요한데 그 새로운 마음을 먼저 갖고 있는 자가 바로 에스겔이다. 에스겔이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권능으로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특별히 두 가지 대리 경험을 하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로운 성전의 건립이다. 먼저 이야기했듯이 시편 8편에서의 [인자]의 본질은, 하나님에 의해서 '초라함'과 '다스림'을 수행해야 하는 실존의 모습이다. 인자의 본질은 성전 파괴와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하는 위치에 있다. 하나님이 보시는 국가 이스라엘의 형편은, 단순히 성전이 파괴가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살았기에 성전이 파괴될 수밖에 없느냐를 따지시는데, 백성을 대표해서 선지자를 세워 그 선지자에게 인간의 본질을 따지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자' 개념은 성전이 파괴되고 사려져 버린 현 상황에 대해 책임을 반드시 져야 될 책벌의 상대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즉 `성전 없다'! 라는 말을 대신하여 성신과 결합하기 위한 계약적 조처로서 '人子야!' 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새로운 언약이 성취되어 새로운 인자가 등장된다면 여기서의 人子의 모습은, 새 성전이 되는 기반이 되는 인자이다. 새 성전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인자가 된다. 왜냐하면 옛 언약에 의한 성전이 파괴될 때에서 인자라는 실존에게 그 심판의 대리 경험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서 에스겔은 성신에 이끌려 장래의 성전에 미리 가 본다(41:1).
인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人子와 성전이 '여호와의 신'에 의해 절묘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새 언약의 중심에 성신 내림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성전 파괴로 인한 심판에도 성신이 관여한 것처럼 이제 새 언약 탄생에서 필히 성신이 관여하게 되는데 새로운 성전 마련에 인자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이방 나라로 떠나고 에스겔도 성신에 인도함으로 그들과 함께 합류하게 된다. 거기서 에스겔이 알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로 인해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부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인자가 되는 에스겔 위에 내려졌듯이 말이다.(39:21-29)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을 미리 장만해 놓고 계셨다. 새 성전의 구성 요건이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는데 있다고 한 37:24-28의 말씀과 연관 지어 볼 때에 새 성전의 범주는 어디까지나 다윗 언약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사실이 드러난다. 백성에게 성신이 부어지는 것은, 다윗 언약을 회복하고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지킬 만한 마음을 생성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데 그 성신이 이미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 선지에게 임하여 있다면 앞으로 새로운 성소가 될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바로 에스겔 선지자에게서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에스겔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성전 때문에 희생당하고 상처받고 고난 당한 자이다. 인자 되는 에스겔에게 수모를 안겨 준 자들은 성전 수호자들이요 에스겔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너지고 와해되고 붕괴되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 진짜로 성신 받은 자는, 에스겔이 [인자]로서 당했던 고난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새로운 성전에서 인자의 고난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윗 언약이 성취되려면 두 분의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한 분은 '인자'요 다른 하나는 '성신'이시다.
다른 표현을 하지만, 한 분은 인간의 성전 때문에 희생을 당하신 분이요 다른 한 분은 그 성전 안에서 계속해서 쏟아 내실 성신이시다.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다윗 언약에 맺고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다윗 왕이다. 다윗 왕은 다윗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 아들로 지칭되는 분이시다.(삼하 7:14/시 2편) 여기서 '하나님 아들'과 '인자'와의 연관성이 다윗 언약에 준해서 성사됨을 알 수 있다.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겔 37:24) 즉 장치 오실 하나님 아들로서의 다윗 왕의 모든 본질은 이미 '인자' 되는 에스겔의 고난 가운데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 왕은 영원한 성전을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성신을 계속 제공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신이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신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신 일을 담당하셨다. 동시에 인자가 되는 에스겔에게 성신을 부으시던 분이다. 이 두 가지 작업이 다윗 언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새 언약 주체로 등장되기 위해서는 인자가 새 성전의 중심으로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성신의 일관성 있는 작업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인자'란 그냥 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호칭이지만 이 호칭 안에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로의 내막이 다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 관해 이 호칭과 본질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점차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
이스라엘의 범죄로 하나님의 신이 잠시 성전 동쪽으로 떠나 천사들 속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10:18).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그 동편에서 다시 나타나신다(43:1-2,4). 다시 나타나시는 그 모습 은 전에 성전을 심판하셨던 그 모습이다.(43:3) 하나님의 신이 들어서시는 그 성전에 에스겔도 성신에 의해 같이 합류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에서 같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놓고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한다"는 것이다.(43:7).
하나님의 저주의 골짜기에 뼈들로 죽어 있었던 자들은 하나님 자기 백성들이었다(37:13). 그들이 그 무덤을 열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을 통해(34:23-25) 새로운 평화 계약을 맺은 덕분이다(37:26). 하나님의 신이 바로 이 평화 계약에 근거해서 성신을 그 뼈들에게 내려 그들을 살게 한 것이다. 이 계약이 바로 지금 에스겔에게 미리 보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에스겔이 人子의 자격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자란, 하나님의 새로운 평화 계약의 대상이 되는 다윗 언약의 기초한 인간의 대표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죄악으로 인해 심판 아래 있는 몰골을 하고 있는 이러한 인자를 하나님이 데리고 다니시면서 강조하시는 것은 성신이 필히 내려서야 하는 당위성에 관해서이다. 인간이 기껏 하는 행위들의 결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에 심판이 주어졌고 그 주어진 심판 아래에 인자가 되는 에스겔도 함께 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성신 안에는 이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성전을 지을 때에도 이와 같은 성신의 내용을 다 담아 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자가 주인공이 되지 아니하면 안된다. 즉 다윗 왕이 인자 되시는 분으로 다시 와서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야 한다. 왕으로 오신 이는 인자가 당한 수모와 희생까지 모두 포함해서 새 언약의 본질로 삼게 된다. 전에 있었던 왕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을 뿐이다.(43:7)성신은 바로 이러한 인자 되시는 다윗 왕과 언약을 성사시켜 새 성전의 주인공으로 삼게 된다. 새 성전은 새로운 의무를 지니게 된다. 왕의 행위에 따라 적절한 성신이 새 성전에서 쏟아져 나와야 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온전하게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면 성신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정확해야 하고 틀림없어야 한다. 새 성전을 소개하면서 치수 측량부터 먼저 나오는데 치수 측량자는 천사이다. 왜냐하면 새 성전의 건축은 이미 천사에 의해서 건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지어다 하더라"(3-4절) 너무나 치수가 정확하게 측량되기에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건축 할 수 없는 성전이다. 하지만 이 정확한 법도와 율례가 구비되어야 하나님께서 비로소 동쪽 문으로 들어오셔서 거할 만한 성전이 된다. 성전 구석 구석 철저하게 측량하는 천사의 행위는, 소실되었던 옛 솔로몬 성전을 염두에 둔 측량이기 때문이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성전의 완벽성은 제대로 된 왕을 맞이하므로서 드디어 온전한 제사가 받아드려지는 새 성전이 된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함께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새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자신의 명예와 이름이 걸린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39:25) 천사가 철저하게 치수를 측량하면서 그 광경을 인자가 되는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면서 확인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에게 앞으로 부어질 성신이 얼마나 완벽한 율법적 근거에 의해서 제공되는 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성신은,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 에스겔로 하여금 새 성전 안에서 활동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의 새 영을 받은 자에 한해서 다윗 언약에 의한 새 성전에 출입할 수 있다. 이것이 앞으로 새 성전에 안에서 살아가야될 백성의 조건이 된다.
문자가 아닌 마음의 영인 성신에 의해서 율법은 지켜지게 되고(36:26-27) 다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대해 얼굴을 가리지 않으실 것인데 그 이유는 성신을 그들에게 쏟아 붓기 때문이다(39:29).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24-28) 이 본문에 보면, [맑은 물]과 [새 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교체된 왕에게 소속된 백성에게 제공될 은혜이다. 몸과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올 수 없다.(44:9) 그렇다면 새로운 이 성전에서 제공될 이 [맑은 물]과 [새 영]은 어디를 근거해서 제공될 수 있는가?에스겔의 새 성전 안에는 필히 기존의 성전을 와해시키고 심판하신 그 심판의 정신이 함유되어 있다. 즉 그 어떠한 인간도 맑은 물과 새 영으로 받지 않고서는 이 성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이다.(36:25-27) 거룩이 유지되는 유일한 방도가 이것밖에 없다. 성신이 온 백성을 향하여 한량없이 쏟아진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47:1-2) 그래서 백성 자체가 곧 '성전'이 되는 새 시대가 전개된다. 여호와 삼마, 바로 여호와께서 백성들이 친히 성전이 되는 그 속에 계신다(48:35). 이것이 하나님의 장막에 사람들이 함께 있는 형태이다(요한계시록 22:3).
에스겔에 나타난 새 성전은 구조적으로 두 구획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솔로몬 성전과 유사한 안 쪽 성소 건물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그 성소 건물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뜰 구역이다. 이 성소 건물과 뜰을 함께 포용하고 있는 형태가 새 성전의 대략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이 성전에 들어오는 자는 두 단계의 거룩한 장소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전에 옛 언약에 기초한 솔로몬 성전 같은 것은 문으로 통과하면 바로 제단이 있는 뜰을 만나지만 새 성전에서는 문을 통과해도 제단이 있는 뜰을 곧장 만날 수 없다. 바깥뜰을 먼저 만날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것도 제사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다시 뜰을 지나 50m를 더 나아가면 비로소 마치 옛날 솔로몬 성전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것이다. 8계단을 밟아 나아가 올라서서(에스겔 40:31) 문에 들어서면 약간의 뜰을 대하게 되는데 왼쪽에는 번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커다란 물단지가 설치되어 있다. 직경만 해도 5m를 훨씬 넘는다. 왼쪽에 있는 제단에서는 희생 제물은 태워진다. 거기서 눈을 들어보면 웅대한 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을 수직하는 문지기처럼 버티고 선 것이 나타나는 것이 두 기둥이다. 솔로몬 성전에서 야긴과 보아스라고 이름 붙여진 높다란 60m짜리 기둥 둘이다. 이 두 기둥으로부터 시작해서 솔로몬 때에 그 성전을 다시 만나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열왕기상 7:21-22) 그런데 왜 기둥에다가 이름을 붙였을까?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겨야 되는 곳이 아닐까?
하나님의 이름은, 모세에게 직접 이름을 알려지기 전까지는, 어떤 특정 인물로 사용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인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 대상자의 이름 바꾸기를 통해서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은 감추었던 것이다.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창세기 32:29)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구태어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실 일은, 이름이 바뀌어진 그 인물을 통해 원리 원칙이 고정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의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그 대상이 되는 족장들을 통해서 언약이 미리 확정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언약의 범위 안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여호와의 이름이신 여호와이시다. 이와같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서 행하셨던 그 일이 성전 안에서 어떤 기능으로 연속되고 있다. '성전 의인화'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과 같이, 이 건축 구조물에다 하나님의 이름을 남기므로서, 인간들이 건축 구조물을 인간 자신들의 영광을 붙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의미가 있다. 인간의 죄는, 끊임없이 자기 이름과 자기 창작물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분명히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출애굽기20:24/열왕기상8:17,20/신명기12:5,11,14/14:23/16:2,6-7/17:8/18:6) 이 원칙은 신약까지 이어진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따라서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린 그 약속이 계속 운용된다는 점을 알린다. 다윗 언약이 성전 언약이 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다윗과 그 가문이라는 단일적 몸 안으로 이스라엘 전부를 통합시켜서 관계하시는 방법을 취하셨다. 따라서 성전이라는 구조물은,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 가졌던 몸의 관계의 연속선 상에 있다. 성전 안에서 제사가 매일 같이 반복된다는 것은, 참된 아들 됨의 기능이 하나님의 이름이 품고 있는 약속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즉 이삭의 경우처럼 인간이 직접 희생 제물이 되는 상황을 재현하고 반복하는 것으로의 참 아들 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성전의 몸체 부분을 떠받들고 있는 두 개의 놋 기둥에다 사람의 이름으로 별명을 붙이는 것은 성전을 이스라엘 전체를 인간 몸의 단일성으로 간주하시면서 언약적 관계를 맺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요한계시록 3:12)
이 기둥 사이를 지나 성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가 성소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지성소가 마련되어 있다. 지성소에는 천사 둘이 조각되어 있는데 매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얼굴 두 가지 형태를 하고 있다. 이것도 또한 전에 지었던 솔로몬 성전의 천사 형상과 동일하다.(열왕기상 7:36/에스겔 41:19) 그런데 전의 성전과 차이점은 언약궤가 없다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분명하게 언약궤가 있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열왕기상 8:6,9) 솔로몬 성전은 애초에 오직 언약궤 중심이다. 그런데 새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예레미야 3:16-17) 언약궤가 없는 이유는, 더 이상 문자로 된 돌판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에스겔 36:26-27) 전에는 불같은 하나님의 형상이 돌판을 통해서 드러내셨다.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손에 있었느니라"(신명기 9:15) 하지만 새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보좌의 엄위성은 두 천사의 얼굴을 통해서 드러낸다.(에스겔 41:18,25)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깨어진 언약으로 인해 솔로몬 성전은 깨어졌고 이는 계약의 파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계약의 파기가 또한 다가오는 새 언약 시절을 마련하는 토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새 성전에서의 계약은 인자 되는 에스겔 배 속, 즉 마음속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하니)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에스겔 2:8-10/3:1-5,12-14)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인자인 에스겔이 말씀이 먹는 순간, 성신의 감동을 받아 본인이 하나님의 권능과 보좌와 위엄 안에 삼키워지게 된다.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과 보좌가 있는 여기에서 성신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 되는 에스겔의 위상이 바로 끊임없이 성신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성전의 핵심 분야이며 지성소이다. 이와같이, 들여다 보기만해도 또한 붙들기만해도 저주받아 죽었던 언약궤였지만(삼상 6:19/대상 13:9-12) 이제는 인자되는 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겔 3:17-18/ 고전 16:22 참조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성소나 성전은 신이 없는 신전이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시편 78:59-60) 이처럼 처음부터 부재(不在)의 가능성을 함유한 성전이기에 이 성소나 성전이 새워져 있다는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면제받을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 성소나 성전은 하늘 나라의 가치 충만함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집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성전의 존재 의의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게 되는데 언젠가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의해서 '지워 버림'을 당해야 될 때, 참으로 하나님이 영원히 계셔야 될 집이 따로 존재해 왔음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텅 빔'이라는 성전의 공백적 속성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의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훌륭하게 증거하는 기능을 갖는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여호수아 22:34)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심판과 긍휼의 증심지로서 오직 유일무이한 하나의 공간으로 필요적절하다.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여호수아 22:19) 뭔가 누락되어 있는 그 공간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여호와께서 진정으로 말씀하시고자는 바를 확실하게 나타낸다. 즉 제단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희생 제물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의 일상성을 채우는 것은 농토를 경작하는 백성들의 노동과 삶이 아니라 제단 위에서의 죽음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다름이 아니라 이 제단 위의 죽음을 통한 속된 것의 제거 작업이다. 따라서 텅 빈 지성소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언약궤는, 제단 위의 피묻은 언약 행위의 근원을 하나님 편에서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언약의 내용은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천명이다. 그래야지만 거룩이 존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년에 한 차례씩 제단의 피를 가지고 언약궤 위에 뿌리는 것은, 거룩한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룩한 피에 죽음으로서 동참하는 것이다. 지성소 안의 신의 형상은 없고 오직 텅 공간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은, 만남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들의 노력도 하나님이 거부하고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만약 인위적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려든다면 이는 곧 우상적인 성전이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과 긍휼의 작용을 인위적 종교성으로 유발시키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왜곡 해석한 결과이다. 없어져야 될 것을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전환시켜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한다. 관계가 막혀버린다. 성전은 닫혀있는 곳이 아니라 활짝 열려 있는 성전이어야 하며 더나아가서 어떤 특정 인물을 지향하고 또 대체되어야 될 성전이어야 한다. 거룩을 가두어두는 데가 아니라 오히려 거룩을 향하여 열려지고 그 거룩성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는 곳이다.
이러한 성전의 공백을 하나님의 이름이 채우시려 하신다. 하나님 이름만이 빈 성전을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실 수 있다. 생명 나무로서 다가서시는 것이다. 새 성전에는 비록 언약궤는 없지만 그것을 대체해서 새로운 언약이 투입된다. 언약궤 역할을 인자 되시는 분이 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거룩한 피를 제공하실 수 있는 분이다. 제단 위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죽음을 늘 상 반복하시기 위해 나타나실 분이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공의를 가득히 담고 죽게 되실 분이다. 이 의인의 희생은 오로지 '언약 성취'을 위한 것이다. 그래야 거룩이 그 죽음 안에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분의 피 안에서만 비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하다. 만남의 장소가 공간이 아니라 이제는 마음 속으로 이동한다. 성신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다. 따라서 그동안 언약궤를 외롭게 지탱하며 안치해 주었던 텅빈 성전은 이제는 성신이 가득한 인물에게 모든 거룩과 영광성과 기능을 양도해 주어야 한다. 이런 탈공간 시점에 도달했기에 지금까지 성막이나 성전에서 행했던 제사 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제물 규정의 변동 사항은, 상황에 따라 드러난 죄의 진척도에 따라 그 죄가 인간의 마음에서 야기된 것임이 점차 알려지는 것과 연관있다. 즉 성전이 무너짐이 제물의 물리적인 흠집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의 부정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백성들의 정결을 위한 제사 절기와 짐승 제물도 이스라엘 전체를 겨냥하는 데로 비중이 실린다.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더 분명하게 조정된 제사 규정에 의해 더 확대된 죄 인식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 언약 시절의 제사법과 다윗 언약 이후의 제사법에 있어 제물에 관한 규칙이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1)상번제
출애굽기 29:38 에서는 매일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되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 양 한 마리를 드린다
민수기 28:3 수컷 어린 양 두 마리를 드리되 아침에 양 한 마리, 저녁에 양 한 마리를 드린다.
에스겔 46:13 에서는 아침마다 일년 된 흠없는 어린 양 한 마리씩 잡는다.
(2)안식일
민 28:9 일년 되고 흠없는 수양 둘을 바친다
에스겔 46:4 왕이 번제를 드리되 흠 없는 어린 양 여섯과 흠없는 수양 하나를 상번제 외에 추가한다.
(3)월삭
매월 첫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민수기 28:11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없는 수양 일곱으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로서는 수염소 하나를 바친다.
에스겔 46:6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 양 여섯과 수양 하나를 드린다.
(4)1월 1일
이스라엘에게 있어 정월 달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탄생한 달이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애굽기 12:2) 이스라엘에 있어 '시간'이란, 국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하나님 이름의 일을 보조해 주고 지시해 주는 기능이 될 뿐이다.
정월 달 이 날은 모세가 성소를 처음 세우던 날이다. "제 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출애굽기 40:17) 새로운 성전을 기약하는 에스겔에서 이 날을 절기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수송아지 하나를 바치는데 성소를 정결케 하고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 뜰 문설주에 바른다. 즉 성소를 새롭게 정결케 하는 속죄제의 의미가 강하다. (45:18-19)
(5)1월 7일
에스겔 45:20 역시 에스겔에만 나오는 절기인데 이스라엘 전체를 속죄하는 절기이다.
(6)유월절
제사에 대한 상세한 규정은 역시 민수기에 나와 있다. 민수기 28:16-23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흠없는 일 년 된 수양 일곱 드린다.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을 드리고 속죄제로서는 수염소 하나를 바친다.
에스겔 45:21-25 왕이 직접 드리는 절기이다. 송아지 하나를 속죄제로 드리고 7일 동안에 매일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이며 또 매일 수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린다.
(7)칠칠절=맥추절=오순절
레위기부터 제사 규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레위기 23:15-22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린다. 속죄제로서는 수염소를 드리고 화목제로서는 1년 된 어린 수양 두 마리를 바친다. 특히 가난한 자를 위한 양식을 배려해서 함께 추수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민수기 28:26-31에 보다 상세하다.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수양 일곱으로 드리고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양을 드리고 속죄 제물로는 수염소 하나를 드린다. 가난한 자의 배려는 나와 있지 않는다. 민28:31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에스겔에도 나온다. 46:11-12 제물은 유월절 절기와 같다.
(8)7월 1일
민수기 29:1-6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을 드리고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을 드리고 속죄 제물로는 수염소 하나를 드린다.
(9)7월10일
민수기 29:7-10 월삭, 유월절, 맥추절, 7월 1일과 동일한 의식이 치러진다.
(10)7월 15일 =초막절=수장절
대속죄일로서 레위기부터 제일 큰 의식이다. (레위기 23:34-44)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해 일년에 한차례씩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이다.
민수기 29:12-40 첫날은 흠없는 수송아지 13과 수양 2과 일 년된 수양 14를 드린다. 속죄 제물로는 수염소 하나 둘째 날에는 흠없는 수송아지 12과 수양 2과 일 년 되고 수양 14를 드리고 역시 속죄 제물로는 수염소이다. 셋째 날에부터도 역시 수송아지 숫자가 하나씩 줄어간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숫자가 7이 된다. 마지막 8일 째에는 거룩한 대회로 모이는데 수송아지 1과 수양 1과 일년된 흠 없는 수양 7을 드리고 속죄 제물로서는 역시 수염소 하나가 동원된다.
에스겔 45:25 에서는 유월절과 동일하다.
이상의 정리된 것을 볼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식사물인 제사는, 번제→소제→속죄제→화목제 이런 식으로 나열 되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지는 절차는 속죄제부터이다. 그 위에 번제와 소제가 드려지고 그 다음에 최종적으로 화목 제물이 바쳐진다.(민수기 29:39/레위기 3:5/9:22) 죄있는 것과는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겠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레위기나 민수기 시절에 있어, 제사 제물의 양이 1월달 보다는 7월달에 보다 급증되고 집약 된다. 그것은 7월에 민족 전체를 위한 대 속죄일이 있기 때문이다. 즉 대규모 죄를 겨냥해서 제물도 집중적으로 투입이 되는 것이다.
에스겔 때에 와서 죄의 개념 속에는, 인간이 만든 솔로몬 성전조차도 죄에 오염되어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모세 시절 때는, 백성들의 죄 씻음과 정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초점이 모아져 있지만 에스겔의 새 성전에서는, 솔로몬 성전 자체에 대한 정결이 우선된다. 그래서 초창기 제사법에 나오지 않는 절기인 1월 1일과 1월 7일 절기가 있다. 1월 1일은 원래 성막이 최초로 세워지던 날이었다. "제 이년 정월 곧 그 달 초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출애굽기 40:17) 그리고 새 성전에는 뜰이 둘 있는데 안 뜰을 감싸고 있는 바깥뜰을 제외하고서는 솔로몬 성전의 양식과 동일하다. 이와 같이 에스겔의 새 성전은, 이미 무너져 버린 그 솔로몬 성전을 다시 세워 놓고 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가를 회상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보여준 성전이다. 그렇다면 정월달의 절기란, 성전 청결을 위한 특별 절기로 한 해 제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출애굽 제사법에서는 7월 달의 수장절에 초점이 모아져 있는데 이는 유월절의 희생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름지게 한 언약의 근원이 됨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둔 제사법이기 때문이요 민수기의 제사법은 7월 달의 대속죄일에 비중이 가 있는데 이는 인간 제사장과 백성의 우상 숭배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전 국가의 죄 씻음에 비중이 두고 제시되는 제사법이다. 에스겔의 새 성전은 정월달의 제사에 한 해 제사 성격을 규정한다. 이 제사를 왕이 직접 집행자가 되므로서 왕 계약인 다윗 언약의 회복과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결 제사이다. 거룩을 유지하기 위한 정결법도 언약에 따라 종속된 채 비중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약을 따라 일하신다. 이것이 새 언약 시대의 면모를 보여주는 계시이다.
언약궤는 원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 피를 들고 뿌리는 장소이다. 그런데 언약궤가 없는 성전에서 피를 뿌리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문지방이다. 이 문지방에는 문설주가 있는데 이 문설주에 피를 바른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 하룻날에 흠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 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에스겔 45:18-19/43:8) 여기서 말하는 전 문설주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안 뜰 문설주란 바깥뜰에서 들어오기 위하여 통과해야 하는 남문, 북문, 동문의 문지방이다. 바로 이곳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새 성전의 문지방은, 거룩과 맞닿은 곳에서 거룩의 엄위성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실감해야 하는 장소이다. 부지 중에 거룩성을 훼손하고 침범된 점에 대해서도 그냥 용납되고 넘어가지 않는다. 원상 복귀되어 거룩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왕이 바친 속제제물의 거룩한 피뿐이다.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그릇 범죄한 자와 부지중 범죄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하여 전을 속죄할지니라"(에스겔 45:20) 거룩은 거룩대로 계속 유지되고 백성들도 그대로 하나님과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피 뿐이다.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마다 하나 씩 있어 총 6개가 있는데 이러한 방향 규정은 동쪽 문과 여타의 문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즉 출애굽기에서의 성소의 문이나 솔로몬 성전의 문은 오직 동쪽 한 방향뿐이다. 그러나 새 성전에서는 세 방향으로 문이 나와 있다. 왜 두 개의 문을 더 설치하셔야 하는가? 그것은 동향문의 의의를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에스겔 44:1-3) 이 본문에서 보면, 동쪽 문이 닫혀 있다고 했다. 왜 닫혀 있을까? 그곳은 오직 하나님만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절 못들어온다. 전에 있던 솔로몬 성전은 제사장과 백성들이 들어 왔었다. 그러나 새 성전에서는 이제 허용이 안된다. 성전의 온전함을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인간이 들어오는 문은 남쪽이나 북쪽 문에만 국한된다. 이 문들의 가치를 쥐고 있는 것은 이제 동쪽 문에 되었다. 이 문들은 동쪽 문에 종속된다. 동쪽 문의 '닫혀 있음'의 의미를 모르면 열인 문으로 들어와도 소용없다. 그런데 바깥 뜰에 있는 동쪽 문만 닫혀 있는 것이 아니다. 바깥 뜰에서 안 뜰로 통하는 동쪽 문도 닫혀 있다. 늘 닫혀 있는가? 아니다. 안식일과 월삭에는 개방된다. 그리고 그 날에 그 동쪽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마치 바깥 뜰의 동쪽 문을 유일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역할을 왕 자신이 해내는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 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육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에도 열고 왕은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에스겔 46:1-3) 다윗 언약에 의해서 왕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름답게 제대로 유지시키고 보존하는 책임자는 이제는 오로지 아들로서의 왕 뿐이다. 바깥 뜰의 동쪽 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새 성전에 들어오셔야 하는 이유는, 전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의 죄악성을 지적하고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당부하시기를,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에 대해서 주의하라고 하셨다.(에스겔 44:5)
그것은 이스라엘의 패역성으로 인해 출입구가 재조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원래 성전의 동쪽 문으로 출입해야 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맞게 순종하여 성전의 거룩을 유지해야 될 임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동쪽 문은 패역한 이스라엘로 인하여 성전을 더럽히게 한 출입문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에스겔 44:7) 따라서 하나님이 나서서 완벽하고 온전히 거룩한 성전을 새로 이룩하셨다면 인간들에게 더 이상 동쪽문은 개방되어서는 안되는 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일해 오신 모든 것이 동쪽과 무관하지 않고 연관있는 사역이었다. 동쪽과 연관있는 사역이란 바로 창세기 3:24를 두고 말한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와 인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방향은 오직 동쪽으로 난 길뿐이다. 그렇다면 그 동쪽에서 사역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딴 게 아니라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침투해서 자력으로 얻어 낼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친히 그 방향으로 오셔서 줄 수 있는 생명 임을, 동쪽을 차단시키는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쪽 방향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의 죄악을 기정 사실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만이 진실로 인간에게 의와 거룩과 생명을 제공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방향성이다. 그렇다면 동쪽 안 쪽에 설치되어 있는 모든 제사 시설물들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그것은 기존 인간의 생명을 죽이고 심판하기 위한 시설이다. 제사장들이 분주하고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들이 범죄 해서 망해 버린 성전을 (에스겔 44:10) 왕이 대표해서 다시 재건하는 것도 모두 온전히 죽어 없어져야 될 속된 목숨들을 처리하는 시설들이다. 새 성전의 왕은 온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기 위해 성전에 성전 안으로 들어서야 되는 왕이다. 마치 에스겔이 인자로서, 즉 말씀을 배속에 넣어져 있는 선지자로서 백성의 죄 때문에 당해야 되는 수난을 맞이한 것처럼 왕도 그런 심정으로 이 성전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동쪽 현관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왕이 온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온전한 왕의 헌신으로 율례가 완성되었다는 증거로서 그 동쪽 문지방에서 [정결한 물]이 흘러서 온 이스라엘 경내를 덮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영생을 주시고 있다는 증거를 방향 설정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것이다. 즉 동쪽 문을 유일하게 사용하실 수는 그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있음을 동쪽 방향을 가지고 설명하시는 것이다.(에스겔 47:1-2)
따라서 새 성전에서의 동쪽 문지방이라는 건축 구조물은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 나라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여타의 모든 건축 구조물도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다윗 왕과 거기에 속한 백성들을 의미한다. 동쪽 문이 하나님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어 언제나 닫혀 있는 문이라면, 다른 문들은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들을 이용한다. 단 새 언약 관계에 있지 않는 이방인들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에스겔 44:9) 오직 새로운 다윗 왕에 의해 언약이 맺어진 돌아온 백성들은 이 문들만을 사용해야 한다.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 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지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 대로 나갈지며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지니라"(에스겔 46:9-10) 왔던 방향의 문으로 도로 나갈 수 없다. 곧바로 직진해야 한다. 맞은 편 문만으로만 나갈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으로 설치된 것이다.(동쪽 문과 대립시킬 수 있는 문, 서쪽 문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반대편의 문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유일하게 동쪽 문 앞에서 제사 드릴 자격이 있는 왕이 행사하는 제사에 의미를 실어주기 위함이다.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 백성이 들어 올 때에 같이 드어오고 나갈 때에 같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백성의 중심 역할하는 왕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때는 동쪽 문도 열리게 된다. "만일 왕이 자원하여 번제를 갖추거나 혹 자원하여 감사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그를 위하여 동향한 문을 열고 그가 번제와 감사제를 안식일에 드림같이 드리고 밖으로 나갈지며 나간 후에 문을 닫을지니라"(에스겔 46:12) 백성들은, 왕만이 점유한 그 동쪽 문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왕의 일에 합류될 수 있다. 나갈 때에는 자기가 들어 왔던 문으로 도로 돌아가지 않음으로서, 왕에 의해 발생된 추가적인 언약적 가치를 인정하고 새로운 백성이라는 위상을 소지한 채 성전을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통과하는 성전은, 심판 받고 정죄받았던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바로 그 심판의 성전을 향하여 왕은 동쪽 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동쪽 문 앞에서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의 문으로서 동쪽문이 지닌 언약적 특이성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이처럼 옛 성전과 새 성전과 차이성은 문을 통해서도 인식된다. 새 성전에 등장된 온전한 율법 제시는, 문자 안에 들어있을 것같은 어떤 주술적 효능을 기대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택한 왕을 지향토록 하는데 의의가 있다. 이 왕의 제사로 인해 백성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또한 극복된다는 점은 세 문의 구조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옛날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성막과 그리고 솔로몬왕 때의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의 새 성전과 사이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성전을 지으라는 그 자체가 이미 백성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하고 또는 보여주므로서 자신들의 죽음을 확인시키겠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야곱이 외쳤던 '하나님의 전'은 특정한 건축물이 아니었고 따라서 야곱 자신의 행함이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