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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6. 다윗 언약 시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성경신학사무엘하

6. 다윗 언약 시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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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윗 언약 시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

사울 왕 때부터 이스라엘은, 왕으로 세움을 입은 자에게도 기름이 부어졌다.(사무엘상 15:1/사무엘하 2:4,7/5:3)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세움을 입은 왕이 등장한다는 말이며 더나아가서 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마치 전에 대제사장에 기름부음을 입은 것처럼 기존 언약 원칙에 의해 계속 적용받는다는 이야기이다. 다윗과 사울이 서로 갈등을 이르켰던 그 때에 다윗이 사울 왕을 간단히 죽일 수도 있었던 경우에 있어도 죽이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부었던 기름 부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미 하나님의 계약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이기에 죽여도 하나님의 손과 계약의 법칙에 준해서 죽이실 일이지 인간이 나서서 죽일 것은 아니다 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부음을 받은 자, 사울을 장악했던 그 하나님의 계약의 구체적인 내막은 어떤 장치로 얽혀져 있을까?

사무엘상 28:16-19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사울이 망하는 데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말렉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쏟지 아니함에 있었다. 그래서 도리어 블레셋으로 하여금 사울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침범하도록 조치하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각에 다윗은 아말렉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삼상 30:1-20)

아말렉에게 잃어버린 아내와 재산도 도로 찾아오게 된다. 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동시대에 등장하면서 기름부음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문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있어 아말렉이 점하고 있는 위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아말렉 족속은, 마땅히 저주해야 될 자들이고 진노를 퍼부어될 대상으로 간주하는 안목의 유무를 가지고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는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 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사장 역할을 짊어 진 이스라엘 왕은 아말렉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라야 한다. 하나님의 통분하는 심정과 일치된 마음 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진멸 되어야 될 상대자로 바라보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사명받은 자로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왕이냐 아니냐는 아말렉을 처리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사무엘이 그러했듯이 다윗도 아말렉에 대한 남다른 증오심과 분개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해서 언약 관계의 특이성을 아말렉 진멸이라는 형식으로 표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다. 신명기 25:17-19에 보면,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라고 되어 있다. 언약이란, 늘 하나님의 심정을 담겨 있다. 이 심정으로 일치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말렉 민족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본성으로 움직이는 종족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에게 노골적으로 대든 최초의 민족이기에 하나님 원수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신 바 있다.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민수기 24:20) 그러니깐 주님에게 원수 관계로 설정된 종족이 백성들에게 우호적인 관계로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깨어진다. 주님께 원수가 되면 필히 이스라엘에게도 원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은 언약 관계 안의 국가이다. 이스라엘에 기름부음 자를 세우는 이유는,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속 뜻을 이스라엘 속에 영원히 심어놓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어찌하든지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주의 이름을 훼손하고 지상에서 지워버리기를 획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라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시편 83:1-7) 이처럼 이스라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일생을 전쟁 속에서 지새게 되는데 주위에 널려 있는 주의 원수들과의 끝없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이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노리는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여호와의 이름을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 주의 이름을 보존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사울 왕은 이점에 실패했고 다윗 왕은 이름으로, 그 이름이 지닌 본질적 전쟁 방식대로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원수를 원수로 대하고 또한 주의 분노로 그들을 진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사울왕은,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자 백성들의 눈치와 동정 살피기에 바빠서 아말렉과의 전쟁을 권력 유지에 이용했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가지신 분노의 마음과 배치되는 마음이다. 이로서 사울왕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자격이 없다.

사울 왕은 나중에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전사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사울 왕을 죽인 자는 아말렉 소년이었다. 다윗은 이 아말렉 소년을 가치없이 죽여 버렸다(사무엘하 1:15-16) 이렇게해서 기름받은 자의 언약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게 된다.

왕에게도 기름을 바름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는 이제 하나님과의 제사장 언약에서 왕 중심 체제로 전환된다. 이스라엘 나라는 원래부터 왕이 있어야 될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이 요구되는 나라이다. 왕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으로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은 이방 나라의 왕처럼 단순히 독단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왕이 아니라 철저하게 제사장 제도에 의해 제한을 받이야 되는 왕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명기 17:18-20)

제사장으로의 왕 자리에 다윗이 이제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에 아무리 많은 왕이 왔다가 사라져도 하나님만이 여전히 왕으로서 오직 다윗과 맺은 언약에 의해 지상에 왕을 남기신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시편 18:50) 이들 왕의 가문은 하나님에게 소속되며 하나님의 판단력과 지시를 그대로 실시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 놓여 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열왕기상 8:28)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편 72:1)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 뿐이다.

만약 하나님의 왕되심을 제대로 천명하지 못하는 왕이 있다면 계약에 의해서 징계와 채찍을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계약대로 순종하는 참된 왕만 나타난다면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다시 회복이 된다. 하나님은 바로 이 언약의 토대 위에 새로운 왕과 새로운 성전을 마련하시겠다는 것이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의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에스겔 34:24-30)

이처럼 다윗을 통해 다시 왕이 등장되는 것이 이미 전부터 확정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시편 89:1-4) 다윗을 통해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은 도저히 변할 수 없는 언약인 동시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반드시 성사시키시는 언약이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다윗을 자신의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편 89:26-29)

아들도 그냥 혈통적 아들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요 언약적 아들이 된다. 바로 이것은, 약속이 실현되는 그 곳에만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쉴 수 있는 거처가 된다는 출애굽 때의 원칙과 변동 사항이 없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편 132:13-14/출애굽기 15:17-18) 다윗을 선택할 때 이미 시온도 같이 선택되었다. 즉 거룩한 인물 선택과 동시에 거룩한 성전이 있을 장소 선택도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편 78:67-71)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히 변할 수 있는 것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직 약속된 아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본질을 나타내신다. 만약 이 언약을 건드리는 자, 곧 아들(기름 부은 자)을 건드리는 자는 있으면 아버지가 가만 두지 않고, 반면에 아들을 환영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생을 보장하시는 계약이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 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편 2편)

이 본문은 '그 맨 것을 끊을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바로 이 강한 하나님의 의지로 인해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성전은 다시 재건된다. 이 강한 의지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이사야 9:7/37:32/열왕기상 19:31)

제사장 제도가 다윗 언약에서는 새롭게 이해된다. 혈통적이라해서 다 제사장 계열이 될 수 없다. 다윗 언약적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아론 자손 중에서 유독 사독 가문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 "북향한 방은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자니라 하고"(에스겔 40:46) 레위의 후손 중에 왜 유독 사독 만인가? 이점을 알기 위해서는 제사장 직분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민수기 25:10-13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이 본문에서 '질투심'이라는 말과 '평화의 언약'이라는 말과 '영원한'이라는 말과 '제사장 직분'이라는 말이 나온다. '질투심'이라는 말 빼놓고 나머지 세 가지를 연결시키면, '영원한 평화의 언약으로서 제사장 직분'이라는 말이 된다. 바로 제사장 직분이 유지되어야지 만 평화는 성취된다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 영원한 제사장직과 '질투심'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질투심과 동일한 질투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코 평화의 언약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서 제대로 제사장 노릇을 하려면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엘르아살가 지녔던 그런 질투심이 들어 있지 않는 자라면 제사장 노선에서 탈락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탈락된 자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이다.(사무엘상 2:27-36)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던가?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29-30)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질투를 느끼고 계시다. 즉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는 가차없이 언약 백성에서 탈락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비느하스와 맺은 영원한 평화의 언약으로서 제사장 언약 때문이다. 바로 제사장의 언약을 기초한 평화 언약이 유지되는 과정을 통해서 많은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영원한 평화의 언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성전에다 새로운 제사장까지 택하실 것은 뻔한 일이다.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에스겔 37:25-26)

그러면 사독은 어떤 인물인가? 사독은 비느하스 제사장의 후손이다.(역대상 6:4-8) 비느하스에게 가진 그 질투심은, 엘리 제사장 가문을 정죄하는 기준으로 작용했고 그 가문을 정죄하고 난 그 자리를 채울 자로서 새로운 조건의 제사장이 새로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충실한 제사장'이다. 그러면 이 충실한 제사장의 요건은 무엇인가?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사무엘상 2:34-35)

여기에 보면, 충실한 제사장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왕으로 삼기 위한 가문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왕과 가문을 위하여 충실히 일하게 되는 제사장을 두고 말한다. 충실히 일한다는 것은, 비느하스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영원한 평화의 제사장 언약 정신과 같이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왕 앞에서 소신껏 일하는 제사장을 두고 말한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이 충실한 제사장과 관련 있는 영원한 왕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가득찬 분이 될 것이다. 전에 비느하스와 계약을 맺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으로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민수기 23:21). 여기서 '왕을 부르는 소리'는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부르는 소리이다. 바로 이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장 비느하스과 질투심 하나로 영원한 평화의 계약인 제사장 계약을 맺게 된다면 사무엘이 예언한 기름 부음을 입은 왕이나 그리고 더불어 예언한 충실한 제사장 역시 모두가 이 평화의 계약에 예속되는 인물이다. 그 성격도 확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계약이 살아 있는 한 언약 구성원인 이 두 당사자는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사무엘 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사장 계통에 변화가 일어나 제사장 교체가 있게 된다. 이 비느하스와 맺은 영원한 평화의 언약이 실제 이스라엘에 제사장 제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충실한 제사장상은 사무엘은 왕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기 때문에 밀어닥친 적들 앞에 서서 넉넉하게 승리를 이끌어 낸다.(사무엘상 7:1-17)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상대적으로 가문이 망하게 된다. 하지만 사무엘도 늙게 된다. 사무엘의 이 제사장 정신을 이어받는 자가 새로 등장해야 한다. 사람들은 사무엘의 아들을 지목했지만 아들들은 합당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바로 그 공백에 사울 왕이 들어간다. 사울 왕은 철저하게 사무엘과 일치된 정신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전혀 사무엘적이지 못했다. 제사장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낼 지도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사무엘에 의해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제사장 역할을 해낼 왕은 누구인가? 바로 다윗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사무엘상 13:13-14/15:26/16:13)

위의 본문에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왕'이라고 다윗을 묘사했다. 따라서 다윗이 어떻게 해서 마음이 맞는지는 앞으로의 그의 행동을 따라가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원수들을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사무엘상 17:36,45) 물론 소년 다윗은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적이 다윗의 운명을 엄습한다. 사울 왕 패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여야 된다는 질투심이 결여된 채 오직 자신들의 이름을 지탱하려는 자들이다. 비느하스의 영원한 언약을 모독하는 자들이다.

또 다시 제사장 계열에 큰 변동 사항이 일어난다. 이번에서 다윗 왕과 연관된 제사장과 사울 왕과 연관된 제사장 사이의 갈등이다. 사울 왕과 더불어 그와 같이 붙어 있는 제사장 계열도 척결되어야 한다. 이 와중에서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은(아히멜렉) 다윗과 더불어 수난을 같이 받는다. 왕과 제사장은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다윗은 제사장밖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 떡까지 먹게 된다. 사무엘이 예언 한대로 제사장직이 새로운 왕직 안에 흡수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사무엘상 2:35)

사울왕이 제사장들을 죽였을 때에 살아남은 한 제사장이(아비아달) 충실한 왕인 다윗에게 제사장 살해 사실을 일러준다. 자신을 도와준 제사장의 죽음은 곧 충실한 왕 자신의 죽음을 노리는 원수들의 의견인 것을 알고 이 또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의미했다. 여기서 다윗 왕은 새로 등장한 하나님의 원수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나님 앞에 충실한 제사장으로 가지는 운명이다. 미움받고 배척받고 형제들로부터 추방당하는 운명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게 충성하는 제사장이 보여주어야 될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름부움을 받은 자의 위치에서 받는 고난은,하나님의 원수가 실체를 보다 궁극적인 드러내게 하게 만들었다. 무엇에 대해서 분노를 해야하는지, 무엇에 대해서 질투심을 가져야 하는 지를 보다 분명해진 것이다. 외부적인 이방 나라와의 전쟁만이 하나님이 치뤄시는 전쟁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기름부음 받은 위상과 관련된 전쟁도 하나님의 전쟁이었다.

다윗은 대내외적으로 끊임없는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왕이 자신이 바로 또한 하나님의 원수의 입장에 서 있게 되는 그런 사건도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다윗왕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본노가 질투심과 징벌이 자기 집안을 어떻게 갈라놓게 되느냐를 진저리나도록 경험하게 된다. 이 와중에서 왕직의 변화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직의 변화도 발생된다. 아비아달 제사장 계열과 사독 계열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다윗에서의 집이란 개념은 건물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가문 자체를 언급한다. 그러나 누가 다윗의 진정한 가문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혈통 서열로 결정되지 않음에 다윗 언약의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누가 진정 다윗의 차기 왕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언약 정신은 결정적으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 언약을 통해서 언급하셨듯이 다윗의 후손이 곧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특권을 지니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사무엘하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왕을 아버지로 모신다는 것과 그리고 진정한 아들에게 자신의 왕권을 넘겨주는 일, 이 모두가 다윗 언약이라는 범주 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을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 대외적으로 어떤 눈부신 실적을 남겼느냐(사무엘하 8장), 혹은 대내적으로 얼마나 정치제도를 안정되게 정비했느냐 보다는(사무엘하 9장) 다윗과 그 가문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며 그 죄를 하나님이 어떻게 긍휼로서 극복해 내셨는가를 보여주는 가문이 된다. 사무엘하의 많은 분량을 다윗의 사생활과 가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다윗 언약의 실체가 권력을 추구하고 인간들의 원초적 본능과 융합되면서 죄를 극복하는 의의 위력을 담아 낼 수 있다. 다윗 혈통 안에 있다는 것이 인간들에게는 권력에 대해 비언약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이다. 하지만 그 권력을 와해되어야 될 권력이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도 붕괴되기 때문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나단에게 지적 받고 난 뒤에 한 기도가 적혀 있다. 여기서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 했다는 것과 성신에 관한 언급과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상한 심령을 원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 성이 어떻게 유지된다는 점까지 거론하고 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에 행하시고 그때야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즉 율법 이전에 먼저 자신을 지탱하는 모든 힘이 붕괴되고 파괴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윗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윗의 신학이 정립된다. 다윗은 평소에 자기가 늘 공격했던 죄를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이다!'라는 나단의 지적을 하나님의 지적으로 받아 드린 순간 다윗은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이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이 파악한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 이외에 그 어떤 능력으로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알았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기를, "모친의 죄 중에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내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으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위치에 있는가? 여기에 대해 다윗은 하나님의 수많은 인자와 긍휼로 인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결국 왕이란 다윗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인자하신 하나님의 자리임을 인식한다.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이다. 다만 자리가 타인보다 왕의 위치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누구보다도 절감하여(시편51:4) 오직 긍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전하고 가르치기 위함이다(시51:13). 진정한 제사와 번제는 통회하고 상한 심정이다(시51:17/40:6).

다윗 언약에 의한 진정한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다윗의 통회하는 심정을 영원히 담아 둘 수 있는 출생의 경험을 지닌 자에 한한다. 이 일을 위하여 다윗은 다윗 언약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어느 가문이고 예외가 없이 지배받고 있는 죄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자신의 가문과 혈통부터 먼저 죄로 인해 붕괴되고 와해되는 것이 현상이 주어져야 한다.

이스라엘 내에는 다윗의 죄악 때문에 잃어버린 자가 있다. 그 인물은 바로 우리아이다. 우리아는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자기의 아내까지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윗은 이 죄악 가운데서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진정으로 분노하고 질투하고 죄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보이는 증거물로 작용될 뿐이다. 다윗은 이제 다윗 언약의 중심 되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그 잃어버림에 참여해야 한다. 다윗의 범죄로 잃어버린 자, 그 바탕 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가치가 없다.(사무엘하 12:15-25). 밧세바와 간통해서 생겨난 아이는 말없이 죽어야 될 아이이다. 다윗은 말없이 죽어 버린 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즉 자신의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저에게 가려니와'(사무엘하 12:23)

흔히 모세 제사법에서는 짐승 제물의 뼈를 제사장이 꺾는다. 그래서 번제를 드린다. 그러나 다윗은 알았다. 여기서 다윗은 용서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나님의 용서 행위는 '주께서 꺾으신 뼈에 참여시켜 그것으로 기뻐하게 하는 행위'를 두고 말한다(시편 51:8).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형식적으로 꺽어 드리는 짐승의 뼈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주께서 [친히] 꺽으시는 뼈이다. 사람 손으로 꺾는 뼈가 아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꺾는 뼈도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 드렸다. 죄의 원천을 알았다. 동시에 죄사함의 이유도 알았다. 자기 자신이 언약 안에 들어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주께서 친히 꺾으시는 뼈가 용서의 근거가 됨에 그는 눈을 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시편 51:7-9)

다윗은 그 아이의 죽음을 자신을 용서하시는 번제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죽고 난 뒤에 그는 안색을 바꾸고 일상적인 일로 확연히 돌아서게 된다. 오히려 의아해 하는 자는 신하들이었다.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사무엘하 12:21-23)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기정 사실로 받아 드린다. 즉 다윗이 자식이 죽고 난 뒤 알게 된 사실은, 자기의 애씀과 간구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다시 되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아를 죽인 죄악이 자기 자식의 죽음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되었다. 주께서 친히 치셨기에 죽은 자기 아기는 곧 우리아 죽음의 반복으로 다윗 앞에서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진정 이스라엘을 살리는 구원의 자리로서 왕의 후계자는 누구가 되어야 하는가?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로 등장되어야 될 인물이다. 그래야 예루살렘에 기거할 자격이 된다. 우리아 같은 정신의 소유자만이 다윗 언약에 맞는 후계자이다. 다윗은 다른 왕비를 멀리하고 오직 밧세바만 고집한다. 그녀는 우리아의 아내였던 여자이다. 우리아 쪽에서 나온 여인이다. 다윗의 죄인의 대표라면 밧세바는, 죄인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되어야 의인의 아내였던 여자이다. 바로 이 여자의 노선에서 후계자가 선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윗 에 대한 선택된 은총은 계속 이스라엘에 담긴다. 이 여인에게서, 죄인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다윗과 그 백성을 살리는 노선의 후계자를 낼 수 있다. 외부에서 날아 들어온 핏줄이 죄 덩어리에 불과한 본 핏줄을 구원해 낸 것이다. 이미 다윗 언약에 합당한 새로운 노선의 다윗 가문이 결정된 시점에 있어 기존의 다윗 가문은, 다윗의 범죄를 반복적으로 역사 속으로 표출하면서 그 여파로 와해되어야만 한다. 다윗 언약 중심의 세계는, 다윗 가문의 영원성을 잘못한 이해한 자들끼리의 야욕과 탐욕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다윗은 또 두 아들이 죽게 된다.

압살롬와 아도니야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열왕기상 2:24) 압살롬과 아도니야의 죽음은, 다윗 언약이 내비치고 있는 '기름부움'이 단순히 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이 '기름 부음의 원칙' 내부에는 무섭게 치뤄내야 되는 하나님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압살롬 반란 사건에서 참으로 신기한 일은, 압살롬을 직접적으로 힘으로 쓰려 뜨린 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압살롬의 죽음은, 그가 자랑하고 많은 백성들으로부터 탄성을 자아내었던 길고 멋있는 머리칼 탓이다. 이러한 정황은, 그 누구도 압살롬을 함부로 죽일 수 있는 자격자가 되지 못한 입장에 있음을 암시한다. 다윗 가문에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간섭하고 있는지는 사무엘하 13장에 다윗 왕가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로 시작된다. 한 왕자가 한 공주를 사랑해서 겁탈한 사건이다. 그리고서는 차갑게 그 공주를 차 버렸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배 다른 형제인 암논이었다. 여기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인물은 압살롬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암논 왕자에게 복수하는 것이 결국에는 다윗이 쥐고 있는 권력에 대한 탈취까지 이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도덕에 근거한 권력이 결국에는 다윗이 현재 쥐고 있는 권력까지 부도덕에 준한 권력인 것처럼 해석해서 그 권력을 지향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현재 다윗 왕가 권력의 한계였다. 이복 오빠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범죄는 다윗의 분노는 샀지만 결코 다윗으로부터 왕자 지위가 박탈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입장에 있는 왕자 압살롬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싸잡아 공격하고자 하는 기회를 차후에 갖게 한다(사무엘하 13:21-22).

그러나 이는 다윗 왕의 생각에 정면 도전하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다윗 언약의 기초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지 인간들의 정당성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복을 하고 보복을 해도 그 정당성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되어야 되는 이유는, 의와 죄에 대한 인식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내에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압살롬은 이러한 다윗 언약의 특성을 알지 못한다. 범죄자에 대한 아버지 다윗의 미지근한 태도를 염두에 두면서 압살롬은, 자신의 정의감을 기반으로 참신한 왕 인식을 백성들에게 주입시킬 생각을 먹고 실제로 왕으로 독립해서는 이런 식으로 민중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회유시킨다.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 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사무엘하 15:2-6)

여기에 동조한 자가 있으니 바로 요압이다. 요압의 눈에 다윗왕의 결정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다윗왕에 있어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암논의 다말공주에 대한 겁탈 사건을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던 왕은 이번에 또 압살롬이 양털 깎는 축제 기간에 왕자들을 몰살했다는 급서를 듣고도 압살롬에 대한 어떤 분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났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하여 슬퍼할 뿐이다(사무엘하 13:37-39). 당황한 쪽은 다윗의 명확한 정책 기준을 몰랐던 요압이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어떤지 시험해 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요압의 이와 같은 태도는 모호하기만 한 다윗의 의중에서 도대체 누구를 진정 차기 왕으로 등단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갖기 위해서다. 무의식적으로 압살롬을 미리 천거해 보는 것이다(사무엘하 14:1). 거기에 따른 다윗의 반응이 궁금했다.

연기에 능한 여인 하나를 내세워 여인 자기 집안 일 인양 사건 하나를 의뢰케 했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는데 그나마 남은 아들도 살인자로 해서 또 죽여야 하는가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요압의 이러한 비유는 전혀 압살롬과 다윗과의 사이에는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다윗 언약에 의하면 왕의 후계자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고 그 선택은 왕이 알고 하나님의 심정에 참여된 자에 한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알고 있는 간택 문제는 율법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율법에 의한 형벌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그것이 구현이라고 본 것 같다.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한 것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었고 사랑의 차원이었다. 다윗은 자기가 말한 것이 있어 아들 압살롬을 다시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도록 허락하지만 진정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얼굴 마주 대하기를 거절한다(사무엘하 14:24). 왕의 이러한 태도는 요압으로 하여금 다시 압살롬을 거론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아 그와의 관계에 부담을 갖는다(사무엘하 14:28-33). 이러한 추세가 압살롬으로 하여금 기존에서 탈피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거사에 대비케 한다(사무엘하 15:1). 향후 4년간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

왕의 색다른 이미지를 대중 속에 심어 나가는 일이었다. 감히 다윗 왕이 생각지도 못한 재판관 제도를 자기가 창안한 것으로 여겨 왕과 대중 사이의 대화와 삶의 유일한 창구를 틀어막아 버렸다(사무엘하 15:2-6). 그리고 제사 순례라는(예루살렘에서 헤브론, 다시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 합법적인 이유로 절차에 의해 왕으로부터 허락을 득한 후에 헤브론으로 빠져 버린다. 이는 압살롬 자기가 헤브론에 거처하는 것이 왕의 합법적인 승인에 의한 것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 다음 시행될 일도 어떤 합법성에 기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백성들에게 유도해 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초청 받은 유지들이 별 의심 없이 압살롬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다(사무엘하 15:7-11). 다윗성을 떠나 피난길에 나선 다윗왕은 후궁 10명을 궁전에 남겨 둠으로서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을 기대한다. 압살롬의 반란을 일시적인 일로 여기고 법궤까지 이동시키려는 레위인들에게 제자리에 놓기를 당부한다(사무엘하 15:24-29).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과 그 일행은 울음으로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사무엘하 15:30) 도대체 누가 이 참담한 혼란으로 이스라엘을 몰고 가고 있는가? 그 때 누가 이런 소식을 전한다.

아히도벨이 적군 쪽에 붙어 있다고 그 때 다윗은 그 아히도벨의 책략을 무산시키는 것 자체가 사태를 원상 복귀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고 그렇게 여호와께 기도한다(사무엘하 15:31). 이 기도의 본심은, 언젠가는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궤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갈 것이라는 신앙심에서 나왔다. 그래서 언약궤를 제사장을 통해서 이동시키는 것을 중지토록 한 것이다.(사무엘하 15:24-29) 과연 다윗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친히 압살롬에게 화를 내시셨다.(사무엘하 17:14) 다윗이 당하는 이 변란의 고난은, 평소에 다윗 왕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누구였는가 그리고 우호적인 자들이 누구인가가 명확히 구분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울 집안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의 사환으로 있는 시바가 왕의 호의에 대한 자기 주인의 변절을 이야기해 주면서 많은 양의 물자를 제공한다. 왕은 그에게 자기 주인의 것이 이제는 너의 것이 되리라고 약속한다. 주인이 바뀐 셈이 된다. 거기에 비해 베냐민 지파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나타나 다윗의 행렬을 보고 따라 오면서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심지어 돌과 티끌을 뿌린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 자신이 사울 지파를 피흘리게 한 그 범죄의 대가가 이제야 스스로 아들을 통해 완벽하게 보응 받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다윗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그의 모든 저주가 오히려 선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긴다(사무엘하 16:12). 모든 일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질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다윗 진영에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요압과 아비새는 그 자들이다. 이처럼 압살롬 반란 사건은 비다윗적 성향을 지닌 자를 구분시키는 계기로 작용된다. 물론 이러한 분열이 보다 노골화는 것은 압살롬 반란이 평정되고 후계자 선정에 들어가면서이다.

다윗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자신이 전쟁에 친히 나가지 않는다. 공격 이전에 다윗은 장군들에게 나를 봐서라도 압살롬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처리할 것을 부탁한다. 끝까지 아들의 생명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그것은, 다윗 자신의 죄 때문에 다윗 혈통이 붕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의 잘못을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자식이 만약 죽게 된다면 곧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3) 따라서 압살롬이라는 존재는 다윗 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죽여야만 비로소 죽을 수 있는 되는 자식이지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생명에 손 댈 수 없는 왕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압살롬을 단순히 기존 권세에 대항하는 모반자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힘의 논리일 뿐이지 다윗 언약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다. 다윗 언약이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 이스라엘 왕 사이에서 맺어진 언약이어서 아버지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 틀을 깰 수 없는 언약인 것이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아들의 안전을 군사들에게 당부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사무엘하 18:12)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압살롬 군대는 오합지졸이 된다. 압살롬 자신도 짐승을 타고 숲 속으로 도주 피신하려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외모의 장점인 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생포되고 만다. 그러니 그 누구에 의해서 체포된 것른 아니었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얼마든지 다윗의 말에 동감한 자 같으면 압살롬은 살았을 것이다. 압살롬은 결코 인간의 손에 의해 죽어서는 안되는 자였다. 압살롬이 산채로 나무에 매인 몸이 된 것을 처음 요압에게 보고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사무엘하 18:12) 요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왕의 명령을 위반하고 사정없이 찔러 버린다. 그리고 난 뒤 요압은 그 다음 사태를 염려한다.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보류할 것을 지시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구스인을 하나 보내어 일단 다윗왕의 태도를 엿보기로 한다. 예상대로 다윗은 전쟁에 승리한 병사들을 격려하기보다는 자기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비통해 한다. 그리고 요압에 저주한다. 즉 다윗 언약에 있어 하나님의 언약 상대자의 성실에 따른 것이었다(사무엘하 7:14/18:33).

다윗 왕가의 고유성은 단순히 죄지었다고 처단하는 그런 율법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다윗 언약의 사랑의 증표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남겨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압은 이러한 사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려고 했다. 다윗의 존재 자체를 기존 집권 세력의 정통성을 민중들에게 부각시킬 수 있는 핵심 요소로 보고 수구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즉 다윗 왕 복권에 미련이 있는 세력들에게 지파 대 지파 감정 대립으로 백성들을 몰아 자신들의 힘 규합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셈이 된다. 특히 군대장관 요압은 그 와중 속에서 자기 판단에 의해 전쟁을 수행했는데 압살롬의 살해는 왕의 부재중에 벌어졌다는데서 다윗이 없을 경우에 요압이 취할 태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왕의 의사와 반하는 승리는 다윗 언약 체제에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이방적이다. 다윗 언약에 의한 승리는 사사의 속성의 연장으로 힘과 다수에 의한 승리로 귀결될 수 없다. 인간들의 지략의 승리로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자기 세력을 증가시키려는 그런 자를 정죄하는 방식이 여호와 전쟁이다(사사기 8:2).

다윗은 군대 장관을 새로 요압에서 귀순한 아마사에게 맡기기를 원했다.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사무엘하 19:13). 그러나 그 사람도 다윗의 부재중에 요압에게 살해되고 만다(사무엘하 20:10-13). 여기서 요압과 다윗이 전쟁을 보는 견해에 차이가 나는데 요압의 경우 승리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며 전쟁 수행 중 다윗의 분노를 가지게 한 행위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사무엘하 3:27-28/18:14-15/19:13/20:10). 요압은 다윗으로부터 우리아를 제거하는데 가담했고 도와준 자였다(사무엘하 11:16-17). 요압이 생각하는 왕정 체제란 왕의 절대적 권한 하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이것은 오직 정면 대결에서 힘의 우위를 차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적과 동지의 구분은 정복당한 자와 정복자에서 결정된다고 여긴다. 왕이란 항상 이겨야 그 자격을 인정받는 것으로 생각했다(사무엘하 12:26-28).

요압의 이러한 견해는 귀순해 온 자에 대한 다윗의 파격적인 우대에 대하여 회의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조금 전까지의 원수를 전우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배신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이방인들과 전쟁과는 달리 국내 분쟁에 있어서는 그 의미를 달리 이해했는데 그것은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 살해 공작 이 후 시온성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시온성은 어떤 분쟁에 휩싸인다 할지라도 그 은혜성을 인정하는 자의 차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시편 51:18). 즉 다윗 언약을 힘의 통치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윗 자신의 범죄는 바로 다윗 언약이 내포하고 있는 그 은혜성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으며 그것을 간접적으로 가르쳐 준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헷 사람 우리아였다 (사무엘하 11:11/신명기 23:10). 시온을 세우고 예루살렘을 유지하고 다윗 왕가를 지탱하고 보호하는 이 모든 것은 오직 다윗 언약에 따른 하나님이 행하실 은혜의 결과 여부에 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언약에 대한 불신앙과 몰지각한 요소들이 다윗 왕가에 분란을 이르킨 것이다. 왕직+제사장직의 진정한 본질은 이러한 비언약적 오소와의 만남에서 보다 확연해지는 법이다. 우리아 장군이 지닌 하나님 언약에 대한 견해는 왕이 행한 형식적인 율법관과 달랐다(사무엘하 11:4/12:6).

언약에 대한 자신의 포기 내지는 헌신이었지 결코 자기 자신의 안녕과 번영과 유지를 위한 하나님의 언약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윗이 자신은 비록 왕의 위치에 있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위한 충실한 종을 자신이 살해한 셈이 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모아진다(시편 51: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이스라엘에서 범죄는 율법의 규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진정한 율법이란 우리아의 죽음에서 그 주체가 밝혀진다(시편 51:8'주의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편 34:20). 다윗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계속 왕으로서 존속되고 언약이 유지되는 것은 바로 우리아같은 의인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표로 하는 왕 즉 죄인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고 그 우리아의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여디디아) 새롭게 창조, 혹은 회복된 것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마태복음1:6) 이로서 다윗은 국내 분쟁의 와중 속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진정한 언약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고 모든 변란과 반란을 이 정신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로 간주한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를 의인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다시 찾아 나서시는 그 언약적 속성이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피어나고 있음을 다윗은 증명해 보고 싶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사명은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의 연속, 피흘림과 칼부림으로 인해 얻어낸 힘의 우위를 가지고 질서 잡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판이 있다면 이러한 다윗의 언약적 통치를 이해 못하는,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배반하는 자의 것이 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은혜성에 어두운 것이 언약과 무관한 자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압은 가장 비이스라엘적인 인물이며 그가 어떻게 제거 되었느냐를 통해서도 다윗 언약의 진행을 파악할 수 있다(사무엘하 22:25-26/열왕기상 2:32-34).

압살롬의 반란의 의의는 솔로몬이 꼭 후계자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언약적 당위성 때문이다. 즉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이러한 수치스러운 죄악들과 복수로 한데 듣혀진 반란 사건은 민중들 속에 다윗 왕가에 대한 불신앙적인 반발을 유발시켰다. 왕이라는 제도가 다윗 집안에게만 꼭 독점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사무엘하 19:41/20:1-2). 이와 같은 불만이 마치 왕이 자기들의 기업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사무엘하 20:19). 왕과 기업,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다 이스라엘에서 존속되어야 된다. 기업이란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라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이기에 왕은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을 지탱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다. 그것은 다윗 언약으로 인해 굳혀진 상황이다. 따라서 다윗 가문에 의한 왕 등극을 의미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도 용서받지 못한다. 베냐민 사람 세바의 반란은 이로서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 왕 중심의 기업이 되는 이유는, 왕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다. 다윗의 인구 조사에서 밝혀지듯 이 모든 것이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고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에 대한 종으로서 그들이 범죄 했을 때(사무엘하 24:1)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역할이 중심이다(사무엘하 24:25).

다윗 이후에도 다윗 언약의 틀은 깨어지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미 다윗 언약에 합당한 인물인 솔로몬이 등장되고 난 뒤에는 다윗은 그 누구하고도 동참하기를 거부한다(사무엘하 20:3/열왕기상 1:4).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생산된 후계자가 있는 이상 더 이상의 후계자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솔로몬 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후계 구도가 형성된다. 다윗 언약의 정신에 합치되는 후계 구도이어야 한다. 솔로몬이 차기 왕으로 등극함으로 비 우리아적인 존재들은 하나 둘씩 그의 면전에서 사라져야 한다. 솔로몬이 이 원칙에 충실하다. 다윗에 대들어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 정신을 재현하는 인물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든다.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과 그리고 새로운 왕으로 등극되고자 하는 아들은 다윗의 네째 아들 아도니야이다. 맏아들 암논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사무엘하 13:39/3:4) 이 세 사람은 모두 다윗 언약에 대들은 다윗의 죄악된 뿌리들이다.

특히 다윗과 늘 함께 하면서 지금까지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아비아달 제사장은, 솔로몬에 담긴 다윗 언약의 선택적 은혜성을 보지 못하고 아도니야 편에 붙어 다윗 왕 곁을 드디어 떠난다.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열왕기상 1:7) 여기서부터 사독 제사장과의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사독 계열의 제자장직 주도권 장악은이와같이 비다윗 계열인 아비아달의 계열의 축출을 재료로하여 다윗 언약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관계로 나타난다.(역대하 31:10/스가랴 7:2) 아비아달 제사장은 밧세바에서 태어난 아들이 필히 차기 왕이 되어야 된다는 그 원인과 신학적 근거를 전혀 모르는 위인이다. 이는 왕직+제사장직의 의의를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은 말이다. 솔로몬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다윗 왕의 의미도 원래 몰랐던 자가 된다. 아무리 아비아달이 그동안 다윗과 동고동락을 같이 했어도 기껏 요압처럼 외형적인 힘과 외모로만 지도자를 인식하는 인간일 뿐이다. 이는 제사장직 본래의 속성을 상실한 것이 된다.

제사장직이란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계시해 주신 내용대로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사무엘상 2:35)에 합당한 인물이어야 한다. 왕직의 영원함이란 혈통적인 영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원함이다. 아비아달과 및 아도니야와 정치적 편당을 이룬 인사들은, 백주에 다윗의 후궁들이 왜 압살롬에게 욕을 당했는지 그 원인을 다윗 언약적으로 전혀 읽어 낼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저 반란이 일으켰기에 힘이 있어 후궁을 차지했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따라서 자기네들도 압살롬과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지고 힘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스라엘에서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모르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말은, 그 하나님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왕이 반드시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여 거룩을 유지할 책임을 지고 그 자리에 앉게 된다. 정말 '왕 같은 제사장'이다. 제사장이란, 의로운 희생자 입장에서 서 있는 자이다. 솔로몬이 왕 된 것은 순전히 우리아의 신앙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아로 하여금 다윗의 원초적 죄로 인해 피해자 내지는 의로운 희생자가 되는 운명을 지니게 해서 다윗 언약 안에서의 다윗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솔로몬은 바로 우리아의 희생을 계속 이스라엘 속에서 반복하기 위해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다. 즉 거룩한 제사장 입장에 놓여 있다. 그 거룩 앞에서 세속적인 힘의 논리로 왕이 되겠다는 자들이 과연 용납이 될까?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솔로몬은 이들 수구 세력들을 척결해 나간다. 마치 민수기 25장에서 비느하스가 범죄한 자들을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찔려 죽여서 이스라엘을 심판에서 회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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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1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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