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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5. 인간의 몸과 성전성경신학-

5. 인간의 몸과 성전
제사법이 배출한 거룩이 제대로 담겨지는 거룩한 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처음 창조하신 그 원칙의 적용을 받는다. 맥추절에서 보여졌듯이 약속의 땅에 추수한 그 곡식으로 하나님은 화목 제물을 받으신다. 그리고 이 화목 제물에 전 이스라엘이 참여한다. 하나님이 받아먹으시는 양식의 본질에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참여하여 같이 식사할 수 있는 기회는 화목 제물을 드리는 시점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다.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레위기 7:16-18)
제사장이나 화목 제물을 주최한 그 당사자가 최종적으로 화목 제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만약 3일이 지나서 먹으면 화목 제물의 효과는 사라지고 오히려 정죄함을 받게 된다. 마치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자기 양식인 것처럼 먹는다면 이것이 죄가 된다. 화목 제물을 통해서 본 죄란, 하나님만이 드셔야 되는 거룩한 양식을 마치 당연히 자기들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양식화하는 것이 정죄함을 받는다. 즉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곡식과 고기와 양식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모두 다 받으시는 양식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하며 그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범위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양식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원칙을 잃으면 약속의 땅에서 죄가 된다.
출애굽기 16장에 나오는 만나 수확에 관한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 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3-20절)
이 본문의 끝은 모세가 노를 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모세는 만나를 주면서 화를 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 취지를 모르는 채 백성들이 만나를 수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한 생각이다. 만약 양식을 하나님이 제공하는 차원이라는 백성들이 좋아하는 애굽에서 먹는 음식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나 내림의 경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전혀 듣지도 보지도 맛보지도 못한 양식을 제공받고 있다. 이러한 이 만나에 대한 무지성에 입각해서 행동한 그들의 본능적 처신은 결국 모세의 화를 유발하게 만들었는데 그 원인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양식을 비축하듯이 만나를 비축했다는데 있다. 그 비축된 만나는 그 다음날 다 벌레 먹어 없어져 버렸다. '비축할 수 있는 양식'과 '비축해서는 안되는 만나'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을 백성들은 읽지를 못했다.
여기서 인간들이 근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죄성이 발각된다. 만나를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들이 양식 타령을 하나님에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와중에서 주어졌던 만나이다. 그렇다면 이 만나 안에는, 인간들의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그것을 죄인 것으로 정죄하자는 하나님 확인 기능, 이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신 보다 분명한 이유는 신명기 8장에 나와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 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2-3절) '네 마음이 어떠한지, 즉 네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만나라는 양식을 제공하셨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의 죄악은 딴 것이 아니라, 사람은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떡으로만 살아 갈 수 있다는 정신 속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양식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다. 생명이라면 인간은 곧 양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에서 양식을 끊고 물마저 끊어 버리셨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은 자기 본색을 드러낸다. "떡도 없이 물도 없어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그들은 항의했다. 그런 항의가 나올 줄을 이미 하나님은 아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셨고 또 앞으로 계속 주신다. 그들은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자신들의 죄가 그 개념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란 딴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신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 차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참하고 동행하므로서 그들은 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을 보인 것이 맥추절이다. 그래서 맥추절에서만이 화목제를 거론하신 것이다. 모든 절기에 다 화목제를 마지막으로 드리지만 (민수기 29:39)
그러나 특별히 이삭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맥추절에서, 그 돋아난 양식들이 나타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이 주셨기에 비로소 우리가 살 수 있음을 온 이스라엘과 심지어 밭도랑에 떨어진 양식을 주워 먹는 가난한 이들까지 그 뜻을 확산시켜 주고 있다.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 23:20-22) 제사장이나 가난한 이들이나 다같이 땅이 소유하고 있지 못하는 자들이다. 마치 광야를 유리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처지이다. 그러나 그 때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풍성한 만나를 공급받은 것처럼, 지금 맥추절 절기에 와서 그 맥추절의 정신이 말씀대로 성취되면 가난하고 땅없이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양식이 제공된다.
인간들의 노동에 의한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그 축복된 결과로 인해 그 양식에 참여된 것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 그들이, 하나님처럼 거룩한 양식을 먹게 하는데 있다. 속된 양식이 아니라 거룩한 음식을 말이다. 하나님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식사에 초대되어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자신이 영원히 거하시는 성소로 삼고자 하는 본래의 구원 작업의 본 뜻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런데 만나 안에는 인간의 원망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성과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한꺼번에 들어 있었던 반면에 이제 더 이상 만나를 수단으로 해서 계시하시던 그 본래의 뜻이 절기와 제사와 제물로 통해서 계시하셨던 것이다. 속죄제 속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왜곡한 인간의 무지성과 원망이 담겨 있고, 그 속죄 제물을 바치게 하므로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정죄성을 인식하도록 했으며 마지막으로 번제를 거쳐 화목제에 오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죄 지은 이 전 상태로 복귀가 된다. 이 와중에서 땅없는 가난한 이들과 제사장들은 자기네들의 양식들은 얻을 수 있다.
"또 너희는 그 화목제 희생의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아론의 자손 중 화목제 희생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가 그 우편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취하여 제사장 아론과 그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네 응식과 네 아들의 응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 희생 중에서 네 응식과 네 자손의 응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레위기 7:32-34/7:13-14)
제사장은, 거룩한 인물의 표상이다. 이들처럼 거룩하게 살아라 는 것이다.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실현되는 한 이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깨어지고 계약이 깨어진다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이들과 가난한 자들이다. 말씀이 깨어지고 계약이 깨어진다는 말은, 딴 게 아니라 계약과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절, 즉 애굽 나라의 삶으로 되돌아 간 것을 말한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은 그저 부르짖기만 했다. 제사니 말씀이나 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살려주심만 원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신 것은 진정으로 그들을 살려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참된 영생이란, 그들이 원하고 바라고 있던 애굽의 양식 안에는 들어 있지 아니하다. 영생이란, 죄악된 세상에서 처리될 문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의와 거룩성을 확보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흠없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권세에서 벗어날 때 문설주에 발랐던 피는 '흠없는' 양의 피였다. 자신들의 피는 발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피 발린 문설주 안 쪽에서 떡을 먹었는데 그것은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떡이다. 즉 일상적인 양식 종류가 아니다. 인간들의 죄로 인한 노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떡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누룩을 뺀다는 것은 신약적으로 말해서 죄를 뺀 거룩한 떡이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쌔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태복음 16:5-6) 죄가 빠진 거룩한 떡이기에 성소의 거룩한 장소 위에 12개가 두 줄로 나란히 놓일 수 있지 아니한가! 마치 하나님이 드실 만한 음식물처럼 상이 차려져 있게 된다. 거룩한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이 드실 만한 음식물인 것이다. 문설주의 피와 누룩 없는 무교병 같은 것들이 곧 '말씀의 성취'로서 계속 이스라엘 내부에 살아남아 있어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성소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매개체가 밝혀졌다. 그것은 '흠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흠없는 존재'가 희생자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흠없는 존재가 희생자가 되는 것이 핵심 내용으로 계약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스라엘과의 계약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언약(계약)이라는 것이 사실 창세기 3:15의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는 틀로서 지상에 등장된 것이다. 즉 생명의 자식을 이 역사 속에 등장시키는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인간에게 죽음을 유발시킨 원수의 세력을 꺽을 수 있는 생명의 인간을 만드는 것과 연관있다. 이 창세기 3:15에 의하면 이 인물은 여성에 의해서 출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이 남자는(요한계시록 12:5) 하나님에 의해서 지상에 나타나신 하나님 아들이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세기 4:1)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하와는 고백하고 있다. 하와는 창세기 3:15를 자기에게 적용시켜 적어도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여기서 아들을 출산하는데 아담이라는 남성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남자 대신에 하나님이 들어가신 것이다. 하와는 자신의 이름에 부합되는 (하와) 인류 역사가 시작되려면, 생명나무와 연관있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 즉 생명이라는 속성과 기능을 담아 내는 인물을 여인을 통해서 지상에 나타내시는 것이 창세기 3:15를 중심으로 일률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제사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 생명이란, 흠없는 제물의 희생적 자태로서 보여지는데 이러한 계약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분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시다.
여기서 창세기 3:15에 언급되어 있는 '여자'와 '후손'의 연결은, 모세계약을 통해서는, 계약 입안자와 흠없는 희생자의 연결로 이루어진다. 물론 전적으로 이스라엘인을 배제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거룩자와 희생자의 관계로 보다 구체화된다. 양쪽 다 같은 자리에서 생명의 매개체의 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야곱)의 부인인 라헬의 운명을 조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 즉 라헬이 낳은 아들이 두 명 인데 하나는 요셉이요 다른 하나는 베냐민이다. 라헬이 요셉을 잉태했을 때, 라헬은 어떤 차원에서 그 아이에게 이름을 붙였는가?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창세기 30:22-24) 라헬은 언니 레아와 마찬가지로 불임 여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 하사 아이를 하나 주셨는데, 이 아이를 가졌을 때에 라헬은 말하기를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말했다. 수치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아이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 나아가서 언니 레아보다 더 많은 아이를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했다. 이제는 수치를 지나서 언니와의 경쟁 관계, 싸움 관계에 돌입한 것이다. 라헬이 요셉을 가지기 직전까지 언니 레아는 자녀가 6명이나 되었다.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창세기 30:20-21) 딸 하나를 경계선으로 하여 이제 자녀 생산의 관심사는 라헬로 넘어온다. 하나님이 라헬을 통해서 주신 자식은 어떤 언약적 속성을 지니고 있을까? 요셉(더함)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추가적으로 언니처럼 자녀를 다 허락하기를 바라는 라헬의 개인적 염원이 담겨 있다.
즉 요셉으로 끝이 아니기를 바라고 끝은 요셉 이후에 태어난 자식으로 넘기기를 원했다. 그런데 라헬에 의하여 생산된 그 다음 자식은, 어머니 라헬로 봐서는 절망을 안겨 주는 자식이 되었다. (창세기 35:16-19) 그 자식 때문에 라헬 본인이 죽어 가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죽으면 자식도 죽고 모든 것이 절망으로 종결된다. 어머니 라헬은 죽어 가면서 자기 자식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로 정했다. 이것은 죽어 가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담아서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 자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언니의 자녀들과 경쟁해서 승리할 수 있는 자식이 된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세기 27:29) 야곱은 이름을 베냐민으로 정한다. 즉 '오른손의 아들'이다. 싸움에 능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출애굽기 15:6 참조)
베냐민의 형 요셉은, 다른 어머니 레아의 아들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까지 당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동생을 베냐민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근거로 해서 다른 형제들과 부모까지 살려내게 된다.(창세기 43:34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43:16,29/44:12/45:7-8.,12,14,22 참조) 이 베냐민에 대한 애정은 아버지 야곱의 속마음도 동일했다.(창세기 42:6,36) 어미 없는 자식이 어미 있는 자식의 주가 된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7:29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라디아서 4:26-27) 베냐민과 요셉의 어머니는 하늘에 가 있다. 이 지상에서는 피해자, 희생자의 모습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러면서도 역사의 주도자와 승리자는 이 라헬의 자녀들이 중심이 되어 버린다. 언니 때문에 수치를 당해야 했던 그 여인의 아들들이 역사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것이 경쟁과 싸움에서의 승리이다.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와 같은 언약 방식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내용을 일관성 있게 진행하는 틀이 야곱 언약이다. 이스라엘을 찾아온 하나님은 바로 이런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야곱 언약을 이스라엘 내부에 실천해 옮기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엄격하고 거룩한 제사법을 요구하신 하나님은 그 와중에서 베냐민 같은 새로운 아들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라헬 같은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다. 자식 경쟁에서 희생자가 되어 버린 표상을 담고 있는 어머니 상이다. '흠없는 희생자' 표상을 보여주는 희생 제물을 지켜보는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승리를 만들어 내신다.
인간의 힘과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에 의해서 생존과 생명을 누리는 백성들은 양산한다. 라헬의 수치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대로 하나님의 승리로 인하여 씻겨 내려간다. 이러한 어머니 상으로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이 이스라엘의 계약이 실시되면서 기존의 이방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아내 이미지'의 이방신들과 대결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특히 바알이라는 말은, 남편이라는 말이다. 신을 자신의 남편으로 간주하는 이방 종교 성향에 물든 이스라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약 첫마디의 지시는, 이방 신들의 접촉에서 새롭게 이해 할 것을 요구받는다. 과연 우리들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이미지로서 우리와 함께 동거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슨 관계로 맺어진 사이인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 안에서 이 관계를 알려면 아브라함 언약 때부터 출발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계약이 자신만이 아니라 아내 사라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될 언약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비록 자기 곁을 떠나 버려 자기 홀로 있어도 상관없이 이루어질 언약이라는 생각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애굽의 바로 왕에게 바치게 된다.(창세기 12:10-13)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나타나서 사라로 인해 큰 수모를 당하게 한다. 결국 바로 왕은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도로 가져가라고 요청한다. 왜 아내가 없으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 뒤 후계자에 관한 것도 동일하게 아내와 더불어 이루어 낼 일로 삼는다. 이삭이라는 이름도 사실 아브라함의 아내가 천사로부터 아들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을 때 숨어서 웃었던 일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창세기 18:9-15)
특히 이 대목에서 천사 셋이 사라를 찾았다는 것이 이삭의 출생과 관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창세기 18:9) 천사들이 사라를 찾았던 것은, 언약대로 태어날 자식은 반드시 정식 아내는 사라의 몸이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사라의 태가 죽었다는 것을 기정 사실로 놓고 간주해 볼 때, 아브라함에게는 참 이상한 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후계자로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제시했었고(창세기 15:2) 종인 하갈의 몸에서 태어날 자식은 이스마엘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죽은 태를 지닌 불임 여성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을 성사시키는데 있어 '죽은 태'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계약상 가지고 있는 위상은, 죽은 태를 활짝 열게 하는 권능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자식의 생산은, 인간으로서 이미 가망성이 없는 죽은 태를 가지고 이루어질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기적적으로 얻어진 자식 안에는 인간의 그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는 속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죽은 태를 가진 아내에서는 새 생명, 약속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 얻어진 생명이란, 분명 죽음을 극복한 생명임에 틀림이 없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체는, 죽은 인간의 태를 거쳐서 등장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가치는 드러난다.
이삭에게 있어 사라는 분명 어머니이다. 그러나 약속의 어머니이다. 약속의 어머니란, 비록 어머니 태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죽은 태를 가진 어머니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출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삭은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하게 되는 최초의 인물이 된다. 그런데 이 사라로 말할 것 같으며 아브라함 입장에서 분명한 아내이다. 하나님의 계약은 확실히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계약대로 성취는 것은 아브라함을 배제하고 오히려 아내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사라는 누구의 아내인가? 아브라함과 유관하므로서 무관한 아내로 되어 버린 것이다.
분명한 아내이면서도 남편 아브라함과 무관한 아내이다. 그러니 사라를 약속의 아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약 상대자가 된 후, 바로 이점을 배우게 된다. 나의 아내이면서도 나의 아내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이루는 실질적인 주체로서의 아내가 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약속의 자식, 새 생명의 자식(할례자)을 얻은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없는데서 있게 한 그런 자식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는, 맨 처음 하나님이 하와에게 주신 약속의 틀 안에 놓여 있다. 아내인 하와(생명)로 인해 죽은 아담(흙)도 생명의 노선 안에 들어 있을 수 있다. 아담의 7대손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늘로 간 사실을 미루어 보아서도 알 수 있다.(창세기 5:24)
여성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 이미지와 아내의 이미지는 둘 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 늘 등장되는 배경들이다. 반드시 태가 죽은 아내 이미지를 유지해야만 한다. 남편에게 떨어진 그 언약에 준해서만 아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게 되어 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그러하고, 이삭에게 리브가가 그러하고, 야곱에게 라헬이 그러한 관계이다. 물론 언약의 주체자는 남편이지 아내일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남성이란, 아내를 통해 직업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의 증거자로서 남편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들어간 가나안 땅의 종족들이 믿는 바알 신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들에게 조상들에게 내려 준 약속과 무관한 채 아내와 남편 사이로 맺어지는 종교들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세아 2:16)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음란'또는 '간음'이라고 묘사한다. 본 남편을 놔두고 다른 남편의 아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길 자유가 없는가? 우상에게는 여호와의 약속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약속을 담당하고 증명할 합당한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 계약이 깨어지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과 은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약속 성취력으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동력에 의해서 지탱되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우상을 섬기는 요인은, 언약 정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신과 종교를 선택하려고 할 때 우상을 찾게 된다. 계약이 깨어지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 입장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구상해 내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 사회를 통해 보고 겪으면서 수집된 정보를 가지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시도에서는 하나님의 계약 정신이 담겨 있을 리 없다. 인간 자아가 주체가 되어 그 공간과 시간성 가운데 자신을 한 가운데 앉히려 하는 성전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 성전이지 결코 하나님 성전이 아니다.
십계명 제 2계명에 바로 우상에 대한 지적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너를 위하여'라는 말을 먼저 달고 나오는 것이 우상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애굽기 20:4) 이 대목뿐만 아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동안에도 산밑에서는 아론의 주관 하에 쉴새없이 우상이 만들어졌다. 거기에서도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이 나온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애굽기 32:8/신명기 4:16/5:8/열왕기하 17:16) 후대에 이르러 이사야 때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에 대하여 평가와 해석을 내리시기를, '인간 손에 의하여 만들어 짐'에 대단히 강조점을 두고 계신다.
우상이란, 곧 없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실내용도 없고 허상이다. 실재하는 그 무엇이 없다. "과연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 뿐이니라"(이사야 41:29) 기껏 있는 것은 인간들의 자신들의 손수 만들어 놓은 금, 은, 등, 철, 나무 같은 것을 재료로 한 수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시편 115:4). 항상 계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 점을 강조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이사야 43:10)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이사야 44:6)
공예품같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이런 자들에 대응하시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작품으로 해석해 놓고 계시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이사야 29:16)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 스스로 계약을 파기하고 나름대로 이방 민족을 본받아 자기 신을 임의대로 선택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우상성에서 나온 태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작품과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창작품을 첨예하게 대조시키신다. 그리고 그 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지적하신다.
우상을 섬기는 행위는 곧 인간들이, 오직 같은 인간들의 결집력에만 기대를 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계약을 인간 대 인간의 계약으로 전환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스라엘은 각자 우상을 만들어 가지고 다닌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자기 우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에스겔 14:7,3) 이러한 우상적 사고 방식의 결과로서 패역한 이스라엘은 힘있다고 여기지는 이웃 나라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계약 파기이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 나사 악행 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이사야 31:1-3) 우상 섬김의 행위가 단순히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영광과 이름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단호하게 나서신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8:10-11)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하여 자기들이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만 존재해야 하는 나라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7/에스겔 36:22/39:25 참조)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시편 135:4)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에 결혼 계약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의 신을 마치 자기 남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섬기게 되는 패역함 때문에 자연적으로 새로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7-20)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의 수확과 제 때의 비내림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이지 결코 바알이라는 있지도 않는 헛된 우상의 은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은택과 축복은 오직 이스라엘과의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훌륭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벌거벗은' 주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약에 따를 것 같으면 참된 남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결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는 무계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사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12:16-17)
그 동안 바알과 남편-아내 언약을 맺은 것같이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그런 관계로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남편- 아내라는 관계 안에 무슨 은총을 담아 놓으셨는가? 그것은 창세기 2장부터 시작이 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세기 2:24-25)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었다는 최종적 상황은, '벌거벗었으나 수치스럽지 않는다'라는 점에 있다. 따로 따로 독립적인 개체로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몸이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넘어가서, 남자와 여자가 죄 짓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수치를 갖게 된 것이다. 독자적인 감정들을 따로 따로 가졌다는 말이다. 모든 관계가 끊어져 낯설고 어색해져 버렸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인간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수치심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인간 쪽에서 기껏 해낸 작업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몸을 가리는 것이다. 즉 수치를 '가리움'으로 대응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가죽옷을 해 입혀셨다는 것은,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생긴 수치심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는 행위이시다. 즉 여자로 하와(생명)로 전환하는 그 취지에서 봐서 이 수치심도 어떤 식으로도 방치되어야 될 문제가 아니다. 수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인간이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그 기준이 처음 부부 되었을 때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에 근거한다. 이스라엘의 계약이 하나님과 부부 계약임이 드러난 시점 이전부터 수치에 대한 해결책이 구원 문제에서 떨어져 나간 적이 없이 늘 따라 붙어 왔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5:9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애굽 시절 때, 자기 백성들이 할례 받지 상태에 놓인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럽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로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할례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나? 남성의 생식기 끝에 뭔가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럽고 속되고 죽이고 싶은 대상이 된다. 모세가 숙소에서 하나님에 의해 죽을 뻔한 것도 자기 자식이 단지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출애굽기 4:24-26) 또 예레미야 13:26에는,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눈길이 남성이나 여성의 생식기에 쏠린다는 사실을 예사롭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을 '음란'과 '간음' 문제로 다루겠다는 것이다. 본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관계하는 음녀같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 수치 되는 부분을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호세아 2:10) 하나님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것은 계약에 의해 본 남편이 되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의 죄로 인한 수치성을 여호와께서 다 덮어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죄를 덮어 주므로서 하나님 앞에서, 남편 앞에서 수치가 덮어진다. 모세 언약에 의할 것 같으면 7월 10일 대 속죄일이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의 죄를 씻는데 제물의 피를 언약궤 뚜껑에 뿌리는 일을 한다. 지성소에 놓여 있는 그 언약궤 상자 안에는 온 백성들이 지은 죄가 담겨 있다. 마치 성소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으면서 그 계약의 피를 백성을 향하여 뿌리는 그 의식을(출애굽기 24:8)
일정한 장소에다 고정화시켰다고 보면 된다. 뚜껑이 그 죄를 꽉 눌려 덮고 있는 것이다. 그 뚜껑에 피 뿌림으로 하나님의 성소는 정화가 된다. 죄로 인해 오염되지 않기에 하나님이 거하실 만한 장소가 된다는 뜻이다. 이 피뿌림은 언약궤 뚜껑의 기능과 일치된다. 즉 하나님 눈에 죄를 가려지고 덮는 기능으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마치 남편이 아내와 동거하기 위해서 아내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남편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무마해 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고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다.(출애굽기 25:18/26:34)
남성이나 여성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수치 되는 부분이 사라져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죄함을 받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치 않는다는 말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 올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이사야 50:7-9/54:4 참조)
하나님의 의가 있기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이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받게 되는 쪽은 바로 이스라엘의 주를 버리는 모든 자들이다.(예레미야 17:13) 특히 이방 민족들에게 해당된다.(예레미야 46:24/48:1,13,20/49:23/50:2/51:51) 이방 민족들의 우상으로는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수치가 해결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음란한 무녀의 씨앗이고 자식일 뿐이다.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틈에서 자녀를 죽이는도다"(이사야 57: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방 나라와 연합하려고 애쓰는 것은 그들의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훨씬 멋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말타는 자들과 준수한 소년이었느니라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것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용모는 다 존귀한 자 곧 그 고토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그가 보고 곧 연애하여 사자를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란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에스겔 23:12-17)
이스라엘이 이러한 음행으로 음녀가 되고 하나님과 갈라서게 된다. 곧 계약의 파기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에스겔 16:59) 계약의 파기는 성전의 파기로 이어진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 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예레미야 애가 2:7-8) 하나님과의 계약이 철수되고 나니 남은 것이 이방인의 도성, 그 자체이다.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에스겔 16:2-3)
제단의 파기는 새로운 성전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성전이 새로워지려면 새로운 계약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에스겔 16:60) 기존의 성전 파기는 왕의 불실에 그 원인이 있었다. "너희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한 너희 열조의 악과 유다 왕들의 악과 왕비들의 악과 너희의 악과 너희 아내들의 악을 잊었느냐 그들이 오늘까지 겸비치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열조 앞에 세운 나의 법과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여 재앙을 내리고 온 유다를 끊어 버릴 것이며"(예레미야 44:9) 이런 판국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성취됨이 없이 돌아오는 법이 없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1)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깨어진 계약은 반드시 회복시키고야 마신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 인줄 알게 하리니"(에스겔 16:62) 그런데 어디를 계약의 핵심 노선으로 삼아 회복시키시는가? 출애굽기 28:41에 보면,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기름 부음을 입은 자'가 등장한다. 기름부음을 입은 자는 백성을 대표하면서도 거룩한 일 때문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거룩의 속성을 담고 있는 몸으로서 분리되는 자이다. 그 거룩한 몸으로 인해 따라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로서 유지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거룩한 몸을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되면 제사장직도 영원해지고 제단도 영원해진다. 특정한 몸과 가문을 영원히 보장하기 위해 세움받는 자가 있으니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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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