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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4-3 제사장에 나타나는 심판과 긍휼성경신학-

4-3 제사장에 나타나는 심판과 긍휼
(3). 제사장에 나타나는 심판과 긍휼
아브라함에게 찾아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의 위상을 보여준 적이 있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도 제사장이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세기 14:18) 이 제사장이 왜 아브라함을 영접하려 왔을까?
멜기세덱은, 이름 이외는 아무 것도 없는 자이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이 본문에 의하면 '없음(부재성)'과 '있음'이 절묘하게 잘 결합되고 있다. 하늘에서 '항상 있는 계신 자'의 지상적(地上的) 형식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있는 자'이다. 예수님이 이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름으로서 이 세상에는 '없음을 나타내는 존재자'로서 나타나시게 되었다. 단지 주의 이름 이 외에는 아무 것도 핵심적이 것이 될 수 없었던 운명을 지니고 나타나신 것이다. '항상'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이 하늘의 항존성은 지상에서의 '없음'을 충분히 보상시켜 주는 의미로서 작용된다. 그러면 왜 멜기세덱은 아무 것도 없는 자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언약)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게만 맹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다른 이를 신임하거나 성취력을 인정해야 할 존재자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히 6:13-14)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서 자신의 약속을 담는 매개로 사용하시고 그 이름에다 성취력을 전부 일임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란 ('주의 이름'이란), 하나님 스스로가 언약의 상대자로 삼고자해서 설정한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의 자기 맹세의 대상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맹세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름 관계의 증거자로 등장된 것이 멜기세덱이기에 이 멜기세덱은 이름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자로 나타났다.
그런데 바로 이 멜기세덱이 모든 이스라엘 제사장 제도의 원형이 되기에 멜기세덱을 만났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무사히 언약 관계 안에 결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아브라함 언약을 지탱해 주는 이상, 아브라함은 '항상' 복받는 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은 이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증언하려 아브라함에게 나왔던 것이다. 소돔 전쟁에서의 승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 것임을 말하려고 나왔다. 그렇다면 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앞으로 이 지상에서 진행시켜 나가는 사역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말할 수 있고 계시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그 위상은 멜기세덱과 같은 왕으로서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애굽에 포로잡혀 있던 히브리인들을 찾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동일한 내용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 뻔한 일이고 바로 이러한 전쟁에서의 만약 승리가 주어진다면 이 승리를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증언자도 역시 멜기세덱 같이 왕 같은 제사장임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 바친 것과 일반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친 일은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즉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준 것은, 이번 전쟁의 승리가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공로라는 것을 고백하고 증언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나아갈 때 가져야 되는 심정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다가가는 심정과 같아야 한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이 예물의 의미는, 이 정복된 땅의 소산물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당신 아브라함에게 드린다는데 있다. 아브라함은 그 중의 10%를 도로 드림으로서, 모든 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인정한다. 십일조에는 이 원리가 늘 담기게 된다. 특히 멜기세덱이 살렘이라는 도성의 왕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약속의 땅에서의 참된 왕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해야 하는 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왕이라면 마땅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내에서 왕이란 어디까지나 제사장을 통한 하나님의 거룩의 연장으로서 등장되어야 한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명기 17:18-19) 이처럼 왕과 제사장의 연결체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형식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전쟁을 치뤄야 할 왕, 하지만 그 왕은 제사장적인 거룩을 함유해야 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진정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역할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통해 표현해 낼 것이다. 무엇으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악을 제하려 하시는가?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를 통해서 이 일을 수행하시려 한다. 이 점에 있어 제사장이 차지하고 있어야 될 거룩의 내용은 악에 대한 정복하고도 충분할 만한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정당성이 유지되어야지만 거룩한 나라로서 제사장 나라는 유지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애굽기 19:5-6)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므로 제사장의 바른 위치를 말씀해주고 있다. 오직 제사장하고만 만나겠다는 것이다. 제사장의 위상은 오직 언약으로만 규정될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긍휼의 결과로서 생성된 제사장직이기에 결코 혈통적 기득권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만약 누구든지 이 제사장직을 혈통을 준해서만 이해하고 그 위상에 도전한다면 이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성과 긍휼성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 민수기 16장에서 레위 가문의 고라라는 자가 나서서 모세와 아론의 제사장직분에 도전했다. 하나님은 향로를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 향로에 담기는 불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로서 보이시는 심판의 불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그 향로에 담다가 그 불로 인해 죽임을 당한 대목이 들어 있다. 민수기 16장에서도 같은 차원의 일이 벌어지는데 향로에서 불이 쏟아져서 250명이 산 채로 죽게 된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니 이번에는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나선다. 그들의 불만의 이유는, 여호와의 백성을 모세와 아론이 나서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염병을 퍼뜨려 순식간에 죽이려고 하니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즉시 향로의 그 불과 향으로 백성을 위한 속죄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백성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어 버린 후였다. 이처럼 제사장의 임무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어 하나님의 거룩함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한 평화의 언약을 지속하기 위해 상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임무는 거룩한 분의 심판 행위를 제사장이 끊임없이 실시해야 한다는 점이 기본이다.
민수기 25장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6-13절) 여기서 비느하스의 기능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백성을 심판하고 죽여 버리는 행위이다. 물론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근거해서이다. 하나님의 질투심이란 다른 말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계속 이스라엘 내부에서 살리기 위해서 비느하스는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중매하는 중간 위치에 놓여 있게 된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나온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25절-29절) 이스라엘 중에서 누가 모세의 심정을 이해했는가 하는 것이다. 모세는 방금은 하나님을 뵈옵고 산에서 내려온 입장이다. 모세의 심정을 헤아린다는 말은, 곧 산 위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지상에서 이들의 심판 행위로 말미암아 구현되었다. 레위 지파의 이런 행위를 가지고 성경은 '헌신했음'으로 묘사했다. 이들이 이런 헌신 정신이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 안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즉 거룩으로 인한 죽음 사건의 연속이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고정된다. 죽음과 심판 행위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거룩 작업이 이스라엘에 유지되려면 제물과 제사장과 성전이라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미 거하고 있는 자가 아니면 그 자체로서 결코 하나님의 거룩을 구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 세 가지 요소 모두다 늘 심판 가운데 상주해 있어야 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히브리서 5:1-3)
이 본문에서, 사람에게서 뽑힌 제사장의 한계를 말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이 한계로 인해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용납'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제사장은 일반 백성과 동질성과 지니고 있으면서도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둘 다 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되지만 다른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용납할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 난다. 그렇다면 그 '용납할 수 있는 기능'의 영원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연약에 쌓여 있는 제사장들은 계속적으로 은퇴를 해야만 한다. 곧 죽음이라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제사장 뿐만 아니라 제물도 그러하고 성전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1-12). 이렇게 보면, 제사장(레위 지파도 포함)과 제물과 성전 이 모두 다 언젠가는 죽음과 파멸로서 하나님의 거룩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될 때가 있다. 모두 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사라질 때가 온다는 것이다.
제사장은 어떻게 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는가? 그것은 제사장과 언약의 만남 때문이다. 즉 희생 제물 때문이다. 희생 제물의 피가 제사장의 옷과 몸에 직접 바르게 되어 있다. 제단도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된다.(출애굽기 29:19-25) 피란 생명을 뜻한다. 피는 생명과 일체이다.(레위기 17:10-14)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입어 거룩하게(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희생 제물 자체의 거룩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거룩한 사람에 의해서 희생 제물이 무사히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백성들의 신체나 옷에 희생 제물의 피가 묻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 없다고 간주하는 것은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정리되어야 한다.
첫째, 백성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꼭 거룩한 인물인 제사장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제사장 자신의 죄를 씻는 제사장은 누구인가?
둘째, 백성들이 제사장처럼 직접 옷이나 신체의 일부에 피를 묻히지 않더라도 거룩한 백성이 된다면 왜 제사장도 같은 백성의 일원으로서 직접 신체에 피를 묻히고 옷에 묻혀야 거룩한 사람이 되는가?
위의 두 가지 물음을 함축적으로 답변이 되는 제도가 바로 도피성 제도이다. 부지 중에 사람을 죽여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된 자가 보호를 받는 제도이다.
그에게 사적인 복수를 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그가 제사장이 상주하는 도피성에서 제사장과 함께 거주하기 때문이다.(민수기 35:22-28) 도피성이란 제사장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하나님으로 인해 우연히 발생된 살인사건은, 비록 그 와중에서 한 사람의 생명이 억울하게 하나 죽었지만 이 억울한 생명의 희생은, 역설적으로 살인자 생명의 보호라는 측면으로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어지는데 이 와중에서 '제사장과 더불어 있음'이 가져다 주는 대리 징벌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 죽임'이 '제사장 죽임'으로 대리 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은 오로지 인간 자체의 정의성에 맡길 수 없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비로 살려주시는 하나님 행위에만 그 근거를 두기 위함이다. 제사장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는 이스라엘의 모든 이를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관리되는 대상임을 천명하고 '살려주심'에 의한 그 거룩한 상태를 유지시키는데 있다. 여기에 '대신' 한다는 속죄 의미를 부가하셨다. 즉 진정 모든 백성이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그들을 대신 하는 지파가 존재하고 그 지파가 또한 직접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그런 관계 안에서 수립하도록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 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민수기 3:11-13) 이러한 '대속' 사상은, 이스라엘 국가가 처음 생기는던 날 밤에 있었던 거룩의 침투를 상시화 시키려는 의도에서이다. 희생 제물의 죽음 안에서 이스라엘 국가가 솟아나왔다면 그 이후의 이스라엘도 여전히 그 거룩 안에 존재해야만 이스라엘다운 것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제사장 제도는, 제사장이 희생 제물과 일체가 되는 의인화가 이루어지고 또 완벽한 의를 소유하고 있는 제사장이 나타남을 전제로 한 체제이다. 완벽하게 거룩한 어떤 인물이 직접 희생 제물로서 자신을 제공하되 그 인물이 백성을 대표할 만한 사람일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이 덧입혀진다. 제사장의 신체에 직접 피를 묻히는 것은 그 제사장이 바로 희생 제물의 인격화임을 보여주고, 그분이 백성을 대표로 했기 때문에 다른 백성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는 어른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레위기 21:4) 그리고 누구든지 제사장을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이도록 되어 있다.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신명기 17: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동물 희생 제물을 들고 성소에 들어서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직접 사람을 위한 대리 제물로서 등장되지 못함을 지적하기 위함인데 이는 백성들 중에 뽑혀 온 그 어떤 아론 반열의 제사장도 완벽한 의인이 못된다는 것을 뜻한다. 제사장들도 성소에 들어갈 때는 백성들의 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서도 짐승 희생 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것이 늘 반복적이어야 한다. 제사장들이 온전하지 못함을 온전하지 못한 희생 제물로서 반영하는 것이다.(히브리서 7:26-27/5:3/9:12/레위기4:3) 희생 제물에 모든 주도권이 있는 제도가 모세 언약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중에서 거룩한 인물이 나타나 거룩한 희생 제물과 일치되어야 하나님의 거룩은 온전히 이스라엘에 구현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온전한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왕이 지상의 인물이 되어 이스라엘에 나타날 때 그분이 바로 희생 제물과 일치를 이룰 분이 된다. 올바른 왕이 제사장이 되는 경우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개입되며 그럴 때 거룩은 완성되고 이것이 하늘나라이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도 죽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온 이스라엘의 백성 전부에게도 희망 사항이다. 거룩함 속에 내포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제사장의 거룩이 자기의 본성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물의 생명에 근거한다고 봤을 때, 그 거룩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지게 된다. 희생 제물을 일단 거룩한 제사장에게 바치면 그 제물은 다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된다. 만약 그 제물이 제대로 열납되면 그 백성도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거룩이란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이나 희생 제물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희생 제물이 거룩하다는 말이다 제사장의 삶이 성소를 중심으로한 거룩을 지키고 유지하고 방어하는데 치중하는 것은, 이스라엘 내의 거룩이란 희생 제사가 드려지는 그 공간에 한정됨을 말해 주는데 주력하기 때문이요 그리고 그 제물이 '대속'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밝혀주기 위함이다. 이를 위하여 특별히 12지파 가운데 레위지파가 뽑혔다. 그들은 제사장 언약을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전 지파를 '대속'하는 의미로 뽑힌 지파이다. "장막 앞 동편 곧 회막 앞 해 돋는 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민수기 3:38-41)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국가 이스라엘이 전쟁 활동에 나서는 것은, 제사장의 거룩 유지 행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군사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전쟁의 승리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모두 독차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하나님께 드리는 몫을 제하고 난 뒤 그 다음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일정량을 주어야 한다.(민수기 31:25-47) 이스라엘이 싸움은 사실상 언약의 싸움이요 거룩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군대는 어디까지는 이 제사장의 거룩에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법궤를 앞장 세우면서 전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거룩한 희생 제물은, 인간의 죄악으로부터 분리된 깨끗한 창조의 원형을 지녀야 한다.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신명기 17:1)
그리고 이 깨끗함은, 세상의 죄악을 드러내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개입되고 이스라엘도 이 거룩 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전쟁에서 승리는 보장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흠없는 희생 제물과 더불어 성소 안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제사장 가문도 일반인과는 구별된 거룩스러운 몸을 지녀야 한다.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과 상관없었던 원래 창조 상태를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되는 것이 제사장 가문의 위치이다.(레위기 21:5-22:16) 그렇다면 희생제물로 표현되는 하늘의 거룩과 인간의 신체의 거룩과는 어떤 연결성을 지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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