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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4-2 제사 드리는 제물에서 비쳐지는 심판과 긍휼성경신학히브리서

4-2 제사 드리는 제물에서 비쳐지는 심판과 긍휼

이름 : 관리자(IP:122.47.57.66)

4-2 제사 드리는 제물에서 비쳐지는 심판과 긍휼
(2). 제사 드리는 제물에서 비쳐지는 심판과 긍휼

제사법과 생활법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제사를 속죄제로 간주하고 있다. 이미 지시된 율법에 준해서 볼 때, 그 규칙을 위반했을 때 그 위반을 충분히 시인하는 자에 한해서 속죄제를 드림으로 사태가 원상 복귀 시켜 주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칙 위반에 대해서 위반자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에 따라 속죄 제물에 등급이 결정된다.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전체의 과실은 황소 제물, 지파의 족장에 대해서는 수염소, 평민들의 과실에 대해서는 염소나 양 중에서 암컷을 드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레위기 4:3,22,27,32) 그렇다면 제물의 등급과 사회등급 간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단순히 그 신분에 속한 사람이 전체 이스라엘에게 줄 수 있는 죄의 영향력 크기와 비례되는 것이 아니다. 제물 자체가 지닌 사회적 차등 구조는, 이스라엘 전체를 세심한 사랑 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배려에 기인된 것으로서 구원 행위를 다양하게 되풀이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그 사랑이, 제사장 나라라는 구조 안에서는 제물 등급을 가지고 시행되는 특정한 원칙을 유발시켰다. 하나님의 구원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 민중들에 몰지각함과 오해와 오류로 인해 '대신 죽음'가 드러내는 의미의 깊이도 다양하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죄의 결과로 주어진다.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시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사태에 이른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게 된다. 이 살인 사건은, 죄가 인류에게 제공한 그 본질을 공개한 계기가 된다. 타인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행동 지침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타인을 살해하고 싶은 심적 상태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간음이라든지, 도적질이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심지어 상호 이성(異性)을 찾아 다니는 짝짓기 행위에도 살인 충동이 바탕이 되어 일어난다.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짝짓기에 동원되는 애정은 상대방을 정복하려는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욕정의 배후에는 살인 충동으로 비롯된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신비롭게도 이미 알는 상태에서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인간 배후에는 죽음의 세력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인간들은 자아의 죽음을 대리할 수 있는 방도로 모든 행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브리서 2:14-15) 자기 존재성을 보장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자기 살해를 대신할 거리를 찾아 행동에 나서게 된다. 자기에게 찾아드는 죽음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미리 차단하기 위해 인간들은 부지런히 활동을 벌린다. 타인의 죽음을 기대하고 그들의 무가치함이 눈에 띌 때 상대적으로 자신의 죄로 인한 수치성을 감출 수 있다. 결국 자기를 둘러싸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다 죽고 없어져야 인간은 비로소 자기 존재의 타당성과 의로움을 확인하게 된다고 여긴다. 이러한 살인 충동을 하나님에게까지 적용시킨다.

신을 향하여 대리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같이 죽는 죽음이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알아서 죽어주는 죽음을 인간들은 기대하게 된다. 신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고 신의 소생을 보고 찬양하는 이교적 풍습들은, 죽음 인식을 근원으로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한계를 말해주는 현상이다. 신에 의한 대리 죽음이라든지 속죄 사상은 모든 종교의 보편적 속성이다. 인간에게 붙어있는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늘 수치감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당당함이 자아임을 자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바로 이러한 안타까움 때문에 사람들은 신에게 하소연하게 된다. 그동안 지은 죄를 씻어서 제발 당당한 존재자로 살게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하늘에게 법을 내려주시고 그 법대로 시행한 자에게는 죄 없는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걸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자신의 죽음을 기초로해서 일어나는 종교적 사상이라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속죄제 거룩한 하늘의 존재를 가로막고 훼손하고 있는 지경을 호전시켜 말끔하게 거룩이 거룩답게 계시되는데 초점을 둔 속죄제이다. 그리고 이 거룩을 보다 풍성하게 증거하기 위하여 속죄제물에 있어 각가지 기준과 규칙이 제공되는 것이다.

대제사장으로 뽑혀나온 아론은 자신의 제사장직을 위해 실제로 4번씩이나 속죄제를 드리고 있고 (레위기 16:6,11,17,24)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의 속죄를 위하여 3번을 드리게 되며 (10,17,24절), 성소를 위해 한 번 드리게 된다.(20절) 물론 속죄제물의 종류가 같이 않는 것은 물론이다. 대제사장 자신을 위하여는 수송아지를 잡게 되고, 회중들을 위해서는 수염소 둘을 마련하게 되고(5절) 지성소를 위해서는 속죄소를 위해서는 수송아지와 수염소가 동원된다.(18절)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와 거룩한 인물의 만남에 최상급 제물이 사용되므로서 이 만남을 제사장 나라로 최종 구현 상태로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원활한 만남이 성사되어 하나님께서 영원히 자기 백성 안에 거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취지는 이미 밝혔듯이 출애굽 할 때부터 예언된 것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출애굽기 15:17-18) 자기 백성이 없으면 성소가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동시에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백성들로 같이 거룩해져 있지 아니하면 성소가 성립되지 못한다. 거룩하지 못한 백성을 거룩한 백성으로 전환하기 위한 고정된 장치가 제사제도이다.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이 하나님의 긍휼을 사회 전반적으로 구석구석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생활법이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출애굽기 22:20-27)

즉 하나님 이름이 하시는 그 약속의 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말씀이다. 이 약속의 자비성이 속죄제사 제도 안에서 희생 제물의 차등화로 말미암아 보다 균일한 강도로 다가온다. 족장이나 제사장은 이스라엘 사회가 제사 정신에 입각하고 있는 지를 관리하고 감독하고 통치해야 될 책임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만약 이들이 스스로 제사장 제도에 균열을 초래하는 죄를 범하게 되면 이 죄악은 일반 평민들 다수의 범죄를 함유한 죄악이다. 족장이나 제사장들의 범죄는 그 죄값이 아무런 죄도 없는 평민들까지 떨어지게 되어 있다.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레위기 10:6) 다윗의 범죄로 인해 그 죄값이 온 나라에 떨어진 예도 있다.(사무엘하 24:15)

족장이나 제사장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훼손하게 되면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사적인 범죄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지는 그 계통 자체가 화해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보다 큰 비중 있는 제물을 준비하도록 하나님이 조치한 이유는, 보다 큰 희생이 하나님 쪽에서 마련되어야 자비가 유지됨을 보여주시고자 함이다.

즉 제단 불로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 제단 위에 올라 올 제물로서 다른 것보다 비교적 고급스럽고 가치 있고 비중 있는 짐승을 아낌없이 제단 위에서 죽어 없어지게 만들므로서, 하나님의 거룩성과 자비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란 사실상 하나님의 더 큰 희생을 뜻한다. 더 큰 희생의 요구될 정도로 하나님은 엄청나게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을 제사장과 족장들은 다른 이들보다 많이 보여주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단순히 제물의 등급을 통해서만 보여 질 뿐 아니라 제물의 피가 최종적으로 뿌려지는 성소 내의 위치를 통해서도 구분된다. 즉 범죄자의 인물이 클수록 성소 가운데도 더욱 접근된다. 족장이나 개인의 잘못은 바깥 제단 수준에 머물지만(레위기 4:25/9:9/14:19)

제사장의 범죄를 씻기 위해서는 성소까지 제사장이 희생 제물의 피를 들고 들어가야 하고 (레위기 4:3-7,16-18) 지성소까지 들고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과 제사장 전체의 죄를 위하는 경우이다.(레위기 16:16) 성소의 공간 등급과 제물의 등급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같이 동거하시는 성소에서는 시간과 제물과도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이 식사하시는 시기와 연관하여 제물이 다양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민수기 28:2) 국가 이스라엘의 거룩화 작업은 하나님께서 철저하리 만큼 인간을 무시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기존의 인간을 부정해 버리고 그들을 말살해 버리려는 정열을 가지고 거룩화 작업에 임하신다. 그런데 레위기에서 담고 있는 짐승 제물이 어떤 내용으로 하여 거룩케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를 규정하기 위한 대화를 나누신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속자로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말씀하셨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손이 된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믿었는데 그 믿음의 내용이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 분명히 현실화됨을 확정짓기 위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물을 준비할 것을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9절)

이러한 내용물은, 차후에 실제로 아브라함 몸에서 태어날 약속의 씨가 되는 이삭을 겨냥한 것이다. 이삭의 출생 과정과 합치되는 내용이 된다. 하나님이 요구한 이 제물은 그 근원이 암컷 쪽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삼년 된 암소와 삼년된 암염소라는 큰 비중 있는 제물이 우선적으로 등장된다. 그 다음에 삼년 된 수양이 나온다. 여기서 삼년이란 말은,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수행할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행하는 일임을 말해 준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세기 18:19)

이 본문에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일이 무엇일까? 약속의 씨 생산에 있어 세명의 천사들이 처음부터 관여해 왔음을 짐작케 하는 일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세기 18:2) 이 세명의 천사가 밥이나 얻어먹을려고 아브라함에 찾아든 것이 아니다.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에 합당하기 위해 찾아들었다. 세 명의 천사는 약속의 자식이 출생하는 비밀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이삭같은 존재는 그 전에 이 지상에서 전혀 없었던 인물이다.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형이다. 다른 이들과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세 명의 천사가 이삭의 출생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거에 의해 출생되는 이삭이어야 한다. 세 명의 천사가 합작해서 시도하려는 그 계획의 초점을 제물로서 표현하면 무엇이 될까?

삼년이라는 기간과 관련되어 포용당한 제물은 세가지이다. 암소, 암염소, 그리고 수양이다. 즉 등급상 상위급에 속하는 제물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레위기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짐승 제물을 수컷이다. 왜 암컷 제물이 의도적으로 등장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암컷이 왜 수컷 양보다 높은 등급에 적용되는가? 이삭은 분명히 남성이지 결코 여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 이삭이라고 하는 남성은 아브라함의 육체와 무관하게 출생된다. 아브라함과 무관하게 출생된다는 것은 지상의 남성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창세기 3:15의 약속에서 '여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미 '여성'이라는 성별이 약속 성취에 있어 독자적 자기 의미 범주를 갖고 있다.

이 '여성'이라는 의미 범주는, '뱀'과 '뱀의 후손'를 규정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 뱀의 의미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밝혀진다. 여성과 뱀이 원수지간이 된다는 것이다. 여인이 낳은 자식이 뱀과 여인 사이를 원수라는 관계로서 중재하게 되는 위치에 있다.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다가온 죽음이라는 상황 안에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각자의 역할이 있는데 이 역할로 인해 이 안에서 약속된 분이 오시게 된다. 이 약속된 분은 여인과 뱀 사이에 개입되어 있다. 여인은,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한 뱀의 공격을 받게 되고 또한 여인이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서 뱀의 머리를 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이처럼 죽음 안의 상황이 약속을 배태하는 환경으로 전환되었다. 여인에게 과연 자식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창세기 2장에서의 여자는 다른 피조물 사이에서 기존 '사람'이라는 지칭되는 존재물을 대리하는 입장에서 등장된 존재물이다. 여자가 남자로부터 파생되었다고해서 사람에게 담긴 창조성이 남성이라는 한 존재에게 도로 귀속되기 위함이 아니라 창조 사역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에게 도로 돌려드려지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대리적 위치로서의 여성은, 남성으로 하여금 늘 자기 앞에서 하나님 창조 준칙을 파악케 만드는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아담으로 인해 선택당했기에 나타난 존재인 양 남성 앞에 서 있는 것은, 이 때부터 인간의 대변자인 남성이 지닌 인간성 자체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원리로서 한계 짓기 위함이었다.

즉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 남성의 대리물을 새로 창조하시므로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여성은 항상 남성의 선택의 대상으로 다가서 있다. 그리고 여성은 철저하게 남성 의존적이다. 그러면서도 남성은 자기 멋대로 여성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수순에서 선택의 대상으로 간주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남성은, 자기 속에 있는 인간성을 대표하는 자이지 결코 이제는 여성과 대비되는 자신의 성(性) 자체인 남성을 대변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품위와 인간의 권위와 영광성과 위세를 떨치기 위한 선택으로 여성이 있는 것이지 남성 자신의 영광과 위신과 체신과 권위를 위해서 여성이 있는게 아니다. 여성은 인간의 모델이지 남성의 모델이 아니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으로 인해 오히려 그 대표적 인간성이 제한받고 규제받는 위치에 있다. 자신의 선택대상이 되는 여성의 존재로 인해 남성은 자신의 운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선택당한 입장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어야 했다.

오직 하나만으로 형성된 인간상에서 이제는 둘이 한 몸으로 형성된 인간상을 지닌 것은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채로 있으며 그 선택 작용에 따른 연결 고리를 자체적으로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여자는 생명의 원조로, 남자는 흙(죽음)의 원조로 나온다. 여자의 이름은 하와(생명)이지만 남자의 이름은 아담(흙)이다. 부부란 자식을 생산하는 모체이다. 정상적인 부부에서만이 정상적인 자식이 생산된다. 그런데 범죄한 이후의 부부는 원래의 구조에서 뒤틀려져 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6) 여성이 남성을 사모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들 때부터의 속성이다.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것은 처음 창조 때의 정상적인 남성상을 향한 집념이다. 원래의 남성을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남성의 자리에 있어야 될 정상적인 남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원하는 배우자 자리에 진정한 남성이 없다. 그러면서도 여성은 원래의 남성 이외의 다른 남성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니 남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하나의 '유혹처럼' 보이는 것이다. 원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여성으로서의 희구는 구체성이 상실한 외침이나 열망에 불과하다. 여기서 배우자가 누락된 '결핍으로서의 아내' 모습이 역사 속에 등장된다. 여기에 비해 남자는 새로운 여성을 찾게 된다. 원래 창조된 여성상이 아니라 남성으로부터 지배를 받아야 마땅한 여성으로서 모든 여성을 해석하게 된다. 유혹에 약하고 힘에 약한 자 존재이기에 관리의 대상으로서 여성을 인식하게 된다. 남성에게는 그저 비정상적인 여성만 눈 앞에 뛸 뿐이다. 이처럼 여성에게는 진정한 배우자가 없는 셈이 되고, 남성에게는 기껏해야 지배해야 될 배우자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부부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이 오히려 약속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원된다.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그 자식이 지닌 생명의 원천에 대해서 여성과 남성의 관련성이 서로 다르다. 남성에게는 자기 소유이지만 여성에게는 세상으로부터 이탈된 자식이 된다. 왜냐하면 여참된 배우자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난 약속의 자식일 뿐이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세기 4:1) 그런데 그렇게 해서 태어난 자식이 진정 생명으로서의 구원이 가능한 자식이 되려면 죽음의 범주 안에서 약속의 본 모습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 즉 누가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죽음으로 희생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불리워지는 자식이 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배우자가 누락된 채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태어난 자식이 참된 구원을 이루어질 희망의 자식이다.

이 희망의 메시야의 관점에서 볼 때의 여자의 위상이란, 약속의 범주 안에서 남성을 제끼고 주체로 등장된다. 즉 비정상적인 부부 가운데서 여성이 지향하는 구원과 남성이 지향하는 구원이 상호 다른 것이다. 남성은 자기 소유로서의 자식을 통해 자신이 생명에로 구원이 되려고 한다. 하지만 여성의 구원은 일단 자신을 자식으로부터 소외된 입장에 놓게 된다. 이 말은, 구원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차단성이야말로 죽음의 범주 안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손수 실현해 내시는 약속의 장이 된다.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 31:22) 구원으로부터 소외된 관계자로서의 여성의 입장은 계시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상징적 주체로서 자리잡게 된다. 바로 이 관계가 생명을 제대로 잉태하는 약속의 장이 되는 것이다. 약속 안에서의 여성의 이러한 위상으로 인해 남성적 구원관과는 전혀 상관없이 엇갈리게 교차한다.

엇갈림으로 안에서 여성은 힘없는 연약한 노선을 형성하고서 고난의 역사를 엮어간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이란 여성과 남성 간의 성별 차이성을 가지고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약속된 메시야를 영글어내는데 있어 희생되어야 짐승의 차원에서는 암컷 수컷이라는 징표로 내세울 수 있을 뿐이다. 즉 암컷은 약속의 아들을 제공하는 쪽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수컷은 실제로 희생되어야 하는 희생의 주체 역할을 표현하는 쪽이다. '죽음의 범주' 안에서는 '죽음'만이 약속의 최종 본질을 드러내어주는 매개가 된다. 죽어야 될 존재로서의 아들과 그러한 아들을 죽이는 아들인 아벨과 가인의 사이에서 여자의 후손은 고유의 특성과 범주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약속대로 이삭은 태어나지만 그는 또한 약속대로 죽어야 될 인물이다. 문제는 이 이삭이라는 어떤 식으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생식력이나 또한 아브라함에게 예속된 여성으로서 사라의 생식력과는 무관하게 태어났다.

즉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이삭은 어머니 없이 태어난 것이다. 갈라디아서 4:26에서는 이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참으로 아담의 역사와 무관하게 태어난 인물은 약속 안에서 희생 제물이 될 짐승의 징표가 덧붙여진다. 즉 실제로 이삭이 제물로 바쳐져 죽을 뻔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되살아 난 것은 그 근처에 수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창세기 22:13) 이 수양은, 이삭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죽음을 매개로하여 하나님과 주위 사람과 관련됨을 보여주는 희생제물적 표상이다. 따라서 이삭을 겨냥했던 삼년된 수양의 가치를 결정짓는 근거는 여자의 후손, 즉 상위에 있는 암컷 제물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삭같은 속성을 지닌 거룩한 국가를 창조하는데 있어 출애굽 사건을 주도했던 희생 양은 실제로 1년된 수양이었다.(출애굽기 12:5)

이 수양을 있게 하는 것은 상위 등급의 제물이 말해주는데 그것은 삼년된 암컷이다. 그리고 이 삼년된 제물들은 두 동강이가 나누어진 상태로 하나님께서 드리게된다. 서로 마주보게 배치하라고 하나님은 지시했다. 이 지시는 본질의 본질을 개방하기 위함이다. 희생당해야 하는 이 제물이 어디에 출처를 두고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밤에 하나님이 횃불이 되어 이 쪼개진 사이를 통과하셨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쪼개지는 제물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이삭도 나중에 제물로서 죽어야 된다는 것도 이 언약에 따르는 운명이다. 세 천사가 출처가 되어 생겨난 약속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 이삭 출생의 비밀을 위하여 특별히 제물의 암 수 구별은 요구되었다. 아브라함에게 내려 준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창세기 3:15에서 언급한 그 약속의 큰 밑그림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약속의 배경은 어디까지나 처음 창조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부재성(不在性)을 안고 세상에 등장되는데, 이는 죄악이 주는 영향력 안으로 모든 실재하는 것들이 이미 장악된 상태에 있기에 전부를 부정하는 제 차원을 '말씀 창조로 인해 있게 되었음'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처음 만드실 때, 즉 남자가 있을 때에 여자는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 점이 남녀 간에 있어 기본적인 요소이다. 남자에게 있어 여성이란 늘 '없는' 존재이다.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 '없음'을 말하기 위해 여성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언제든지 남자에게 흡수되고 통합될 대상이기에 결국 남는 것은 남성으로 불리워지는 '인간'이라는 하나님의 창조물 한 몸 밖에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늘 남성과 더불어 있다. 그것은 '있음'을 지향하는 '없음'의 속성이 겸비될 때 비로서 남성을 통한 인간 창조의 의미가 매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남성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남성이 곧 인간이다. '여성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해서 미완성이다' 고 말해서는 아니된다. 아직 사람이 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된다. 반밖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꼴사납다고 해서 창조가 불실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에 관해 다 창조되었고 결국 온 천지 창조가 다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성을 만드셨다. 있는 남성으로부터, 즉 인간으로부터 여성을 만드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과는 달리 남성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은 '없는 데서' 만드신 것이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의 차별화가 생긴다. '있음'(남자)에서 나온 '없었음의 있음'(여자)으로 인해 이 '있음'(남자)는 자기 존재 내부의 성격을 파악하게 된다. 새로이 등장된 '있음'(여성)으로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인식이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차원에서 구성되어야 했다. 자기와는 분명 다르지만 그래도 자기와 똑같은 인간이 자기 앞에 새로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담은 창조 행위의 새로운 원리에 눈을 뜨고 아내를 주신 것에 대해 찬양하게 된다. 이 차별화는 창조 원리를 영원토록 새기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의 한 몸이 된 채 창조된 아내와, 이미 한 몸으로 살아가는 남편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 가운데 새로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또한 구원의 원리로 계속 채택된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계 21:9) 즉 하나나님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남녀 관계로 구성된 창조 원성은 그 성은 차이성이 누락되지 않은 채 계속 구원의 그날까지 계속 없어지지 아니하고 살아남게 된다. 바로 '없음'에 해당되는 여성이 도리어 '생명'이라고 불리워지면서 참으로 현존해 계시는 그 생명을 향해 지향하도록 하게 하신 것이다. 즉 여성 없이 남성이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속성상, 새 생명으로서의 인간 창조도 역시 '없음'이라는 인식을 함유시킨 채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구속이란 하나님의 새 창조 행위이기 때문이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창조 행위는, 인간의 범죄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을 생명과 연계 시켜주는 고리가 된다. 이 '없음'을 통해 참으로 '계시는' 생명 되시는 분이 이 땅의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다. 즉 땅에서 아직 '없었던 분'이지만 하늘에 이미 '계신 분'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여성의 '없음'을 속성과 '어머니' 속성을 비유로 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 땅에 '없었던 분'과 그러면서도 자기 백성을 그 없는 가운데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주체자'로서 소개하자는 것이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6-27) 따라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한 이러한 약속은, 이 악한 인간의 '있음'만이 통하는 세계에서는 도리어 '있을 수 없는', 혹은 '생겨날 수 없는', 늘 '없는' 약속으로 취급받아 무시되고 천대받고 핍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없음'이 인간 세계에 죄가 들어오고 난 뒤부터 '죽음'이라는 대변된다는 사실이다. 즉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덤'이 동원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것이 '빈 무덤'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요구되었다. 무덤은 있었다. 그대로 인채. 하지만 그 무덤의 주인공은 없어졌다. 여기서 따라서 죽음을 통해서 '없어졌음'이 곧 '생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생명으로 통하는 죽음은 인간 세계에 내려진 저주와 척박한 환경 안에서의 고통을 반영하는 말로 쓰인다.

범죄하고 난 뒤 여성은 해산하는데 있어 고통을 유발하게 된다. 이 고통의 원천은 죄, 곧 죄의 결과인 죽음과 연관성 때문에 생겨났다. 죽음이라는 저주를 함유한 생명 탄생이기에 고통 가운데 잉태되는 것이다.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성만이 고통을 갖는다는 것은, 남성과는 별개의 관계로서 약속 성취를 위한 '여자의 후손 생산'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고통인데 이것은 뱀과 투쟁해야만 하는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여자의 후손에게 닥칠 운명은 이미 여성 안에 내재되어 있는데 (뱀의 후손에게 닥칠 운명이, 뱀 안에 이미 들어 있는 저주성에 함유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미 죄로 물들어 버린 우주 속에서의 피조물들의 위치가, 새로운 구원 구조를 형성하는 얼굴들이 된다. 여성은 별개의 구원 노선을 갖는다. 구원의 망에서 상호 대치 관계를 유지하는 여자와 뱁이 유일한 구심점이다. 남성은 소외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여성이 볼 때는 여성 쪽이 구원에 대해 아무런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뭔가 힘보다 더 큰 힘으로 자기 쪽으로 당기는 매혹만 느낄 뿐이다.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보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스더 5:1-3) '남성의 있음'의 견지에서 볼 때에 연약한 여성은 마치 아무 것도 '없음'을 드러내는 존재로만 인식된다. 그러나 자식의 생산은 남 여의 육체의 관계로 이루어지지만 각각을 통제하는 연결선은 따로 갖게 되었다. 생명 잉태에 남성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새로 제시한 그 약속 안에서만이 여성은 독자적인 약속 노선으로 뱀의 세력과 맞서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의 고통은, 감추어진 힘으로 생겨난 아품이다. 고통은 은닉된 약속의 구원성 때문에 생겨났다. 여성은 아기를 해산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자식은 어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여성의 고통은 죄로 인해 고통이요, 죽음을 인한 고통이요 뱀과의 투쟁을 위한 고통이며 그리고 죄를 지은 자를 대신하기 위하여 태어날 자가 뱀으로부터 공격받을 운명을 함유한 고통이다. 하지만 여인이 이 고통을 안고 죽어도 약속은 인간 세상 속에 출현되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는 다 죽는다. 그러나 남성은 생명에서 소외된 채 사라져가는 죽음이지만 여성은, 죽어 가고 있으면서도 생명과의 고리가 연결된다. 따라서 생명은 남성의 힘과는 무관하다. 여성과 생명과의 고리는, 죽음의 권세자인 악마에 의해서는 끊어지지 아니한다.

하나님이 이러한 여성과 자식과의 관계 위에다 자신의 영원한 약속을 담아 내신 것이다. 따라서 약속의 성취는, 여성을 통해 출현된다. 남성의 역할은, 생명으로부터 계속 멀어지는 인간 생명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역할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인의 살인 행위와 아벨의 죽음은, '남성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가인이라는 남성과 아벨이라는 남성은, 하나님에 제사 차별 수납 방침에 의해서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벨은 죽은 채로 사라지고 가인은 벌받아 산채로 자기 세계를 수립하기 위해 하나님 면전에서 사라진다. 악의 세계를 따로 구축하려 떠난 것이며 제 2의 아담이라는 남성 위주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떠났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세기 4:23) 라멕이라는 남성이, 두 여자인 두 아내 앞에서 자신의 남성됨과 동시에 힘에 의한 소유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라멕은 또한 가인이라는 남성과 자기를 우열을 의식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모든 것이 힘의 원리에 기초한다. 결국 아벨이 드린 제사의 제물인, 양의 첫 새끼는, 아벨 자신의 운명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벨 자신도 양처럼 악의 힘의 희생물이 된다. 즉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바른 제사의 성격을 최초로 보여주게 된 인물이다.

이 제사의 구성 요소는, (1)가해자가 있으며 (2) 희생될 인물이 있으며 (3)희생된 그 남성이 곧 하나님이 예언하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시기적으로 맨 처음 죽은 아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 없이 태어난 인물을 두고 말한다. 남성 없이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성에게 직접 생명으로 작용해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드려지는 모든 하나님의 제사는 이 세 가지 원리로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났기에 마귀라는 가해자로부터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남성의 모습을 담아 내는 제물이 바쳐지는 제사가 바른 제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하나님의 엄위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제사에서, 제물이란 곧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어야만 한다. 인간 세계의 죄와 하나님의 긍휼이, 거룩이라는 엄위함을 바탕으로 하여 드러나야 한다.

죄로 인한 지속적인 남성 살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제사장은 남성이어야 한다. 남성이 죄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사장이 남성이기에 짐승의 제물도 대다수가 수컷이어야 한다. 남성으로 등장된 악의 화신은 다른 남성을 희생물로 삼는다. 남성이 다른 남성을 힘에 의해서 계속 지워 버림을 당하면서 진행되는 역사, 이것이 인류의 죄악된 역사이다. 남성을 계속 부재 시켜 나가는 것은 하나님의 여성 위주의 약속 성취 방침 때문이다. 이러한 남여의 관계는 이스라엘 국가 탄생과 연관해서 야곱의 가계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야곱은 자기에게 나타난 약속의 하나님의 흔적을 죽어 가는 라헬에서 찾고 있다.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신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창세기 35:16-22)

이 본문에 보면,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어 가면서 아기를 하나 낳게 되는데 그 아기를 얻은 대신 아내 라헬이 죽고 만다. 아기를 낳는 라헬은 이 사태를 비극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목숨이 끊어질 때 아기 이름을 '베노니'라고 칭하기를 요구했다. 그 뜻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이 아이의 출생을 생각했다. 여자의 죽음과 맞바꾸면서 태어나는 이 아기야말로, 야곱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약속의 결정체로 본 곳이고 하나님의 능력의 소산이라고 안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베냐민'으로 정해 버린다. 그 뜻을 풀이하면, '오른손의 아들'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여기서, 이 막내둥이와 야곱의 맏이라고 불리는 르우벤과 대비시키고 있다. 베냐민의 출산은, 여자의 희생의 산물인 반면에, 혈육적인 맏이 르우벤은 오히려 약한 여성을 악으로 지배하는 악의 화신으로 등장된다. 나중에 르우벤의 아버지 야곱은 르우벤에게 다음과 같은 운명을 예고한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창세기 49:3-4) 르우벤의 이런 행위는, 야곱 자신의 폭력적 남성을 대변해 주는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위의 본문에서 밝혔듯이 르우벤의 야곱의 '기력의 시작' 위치에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남성이 약속사 안에서 '소외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 계시이다. 반면에 여성은 구원의 약속을 은익한 채 고통으로서 약속자의 잉태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계 12:4-5,13) 야곱의 12지파 가운데 이 라헬상의 여성을 함유하고 있는 지파는 어느 지파인가? 그것은 다말이라는 이방 여인과 관련되어 있는 유다 지파 뿐이다. 유대지파가 야곱의 아들을 대표하는 지파가 된 것은 이러한 여성을 통하는 구원 노선이 뒷바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 1:2-3) 다말은 유다 가정의 죄로 인하여 희생된 여인이다. 창녀 흉내까지 내어야 했던 여인이다. 그러면서도 기어이 유다로부터 '의롭다'는 평가를 받아낸다.(창 38:26) 남성으로부터 소외된 여성이 도리어 남성을 구원하는 근원이었던 것이다. 유다는 오직 다말로부터 비로소 약속과 관련된 자녀를 얻을 수가 있다. 이 약속의 자식은 야곱의 언약을 책임지고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정립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여성이 맡은 생명의 역할은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그 증거가 되는 말씀이 레위기에 나온다.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20:18) 비록 아내가 되었든 다른 여자가 되었든 월경 중에 있는 여성과는 성관계를 가지면 안된다. 왜냐하면 여성의 근원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정기적 피 쏟음을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이 파괴됨을 보여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 현상은 그 무엇으로도 가리워져서는 안된다. 죄로 인해 무너져 버린 생명은 생명의 근원적 본성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인간들의 평상적인 생명 활동으로 하여금 이 근원적 생명의 본래적 작용을 침범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여성의 성기는 생명이 생산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차지하는 계시적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남성은 여성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여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곧 남성의 '여성 다룸'에 있어 특별히 주의해야 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들의 아내니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 너는 여인이 경도로 불결할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레위기 18:6-19)

흔히 인간 사회에서 '근친상간 금지 규칙'이라고 일컫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취지는 딴 데 있다. 단순한 도덕성 정립이라든지 사회 규범 문란이라는 차원이나, 능률적 가계 번식을 위해 재산의 일종으로서 물물 교환 차원에서 금지된 사회적 무의식이 아니라, 본문에 나와 있듯이 아내의 하체의 관장할 자격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단 한 명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부를 겁탈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네 아들의 아내'이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부는 오직 아들의 여인이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서 이루어야 될 약속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만 약속된 생명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 내부에서 참 생명을 대해 보여주는 책임을 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계시를 혼잡스럽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레위기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 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 일을 지나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된 어린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의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12:1-8)

자식을 낳은 여성이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아기를 낳을 때도 피도 같이 쏟아지게 되어 있는데 이 피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일정 기간이 흐르고 난 뒤 제사를 통해야 비로소 그 산혈로 인한 몸의 더러움은 씻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큰 구분이 있다. 아들을 낳으면 일반 월경 때와 마찬가지로 7일 동안만 부정하고 산혈을 33일이 지나야 되지만 반면에 여자아이를 낳으면 14일 간 더럽고 산혈이 깨끗해지기까지 66일이 걸린다는 것이다. 마치 여성은 날 때부터 남성보다 배나 더 죄인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결에 관한 기간의 양적 차이를 가지고 단순히 죄의 양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생명의 관해서는 이 지상에서 중심자로서 남성보다 여성이 담당하고 있기에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월경의 연속선상에서 아기 임신을 다루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을 수 없는 계시적 현상을 여성은 한평생 지니면서 살아가야 될 입장에 있다. 아기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처리해야 될 정결은 여성이 직접 제사장에게 제물을 바치므로서 해결된다. 남성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덴에서 있었던 처음 범죄 사건을 재현해 내는 차원에서 해산을 처리하는 것은, 생명 파괴 현상을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방침이다.

생명이 원천이 하나님과 여성 사이에서 시작하는 반면에 이스라엘 제사에서 거의 모든 짐승 제물이 수컷에 국한되고 있다는 것은, 여성에서부터 시작되는 약속된 남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3:15와 창세기 4:1("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이 낳아 주신 남성이라야 희생 제물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흠없는'이라는 형용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흠없다'는 말은 '거룩'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구체화하는데 기초가 된다. 이 거룩한 제물은, 거룩한 하나님을 대하기 전에 먼저 거룩한 제사장으로 양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거룩을 만들어가는 핵심적인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제물의 죽음이다. 제물의 희생이다. 백성들이 가져온 흠없는 짐승과 거룩한 제사장의 만남에서 '신성하고 거룩한 죽음'을 창출해 내게 된다. 제물들은 죽기 위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간다. 성전은, 거룩한 그것들이 서로 만나게 주선해 주는 공간이다. 결국 거룩에 의한 심판이 인류의 역사이다. 거룩이 이 인간 세상에 침투하므로 말마암아 우주의 질서는 이 거룩에 의해 재편성된다. 거룩 되지 못한 것은 사라지고 오직 거룩한 것만 남는다. 그런데 '거룩의 침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거룩에 의한 새 창조를 위해 거룩한 전쟁을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기존의 생명을 대신할 새로운 생명의 창조를 위해 기존의 인간은 대가를 치뤄야 한다. 이런 작업은 거룩한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죄인은 합당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거룩이 정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자신을 숨겨준 기생 라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여호수아 2:17-21) 여기에 보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고 있다. 거룩한 여호와 전쟁에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것은 언약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서로가 언약을 준수하고 있다는 표시는 '붉은 줄'이다. 이 '붉은 줄'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는 것'을 대신한다. 이스라엘이나 라합 가족이나 양쪽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전쟁을 배경으로하여 계약이 성사되었다. 우주를 거룩하게 만드는 창조 사업은, 속된 것과 교체되는 과정인데 이 일은 반드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이루어진다. 희생 제물이란 여기에 대한 계약의 증표이다. 거룩과 마주칠 때에 인간은 죽음에 직면하게 되지면 그 죽음을 도리어 정당하고 마땅한 것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자기 세계 안으로 수용하는 계기로 삼게 된다.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작업의 일부로서 새롭게 나타난 새 인간상을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를 표현해 주는 것이 희생 제물이다.

제물이 수컷이 주종을 이루는 것은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아들의 위상을 대변하기 위함이다.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꺽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낳은 것을 사람의 장자로부터 생축의 처음 낳은 것까지 다 죽이신 고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으로 드리고 우리 장자는 다 대속하나니"(출애굽기 11:12-13,15) 이 본문에서 '대속'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 속에는 지금 대상물을 '대리'하는 새로운 존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대리물을 찾고 계실까? 그 대상체와 직접 바로 관계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본질을 지탱하기 위해서일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대리 행위가 불필요하고 성가시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구원하려는 대상체의 죄를 직접 그냥 툴툴 털어 주고 구원해 내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리물을 중간에 집어 넣어 버리면 대리물도 구원해야 하고 구원의 원 대상체로 구원해야 하는 이중 작업이 실시되어야 한다. 집어넣었다가 다시 빼내는 부질없는 작업만 추가적으로 실시될 뿐이다. 하나님께서 대리물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출애굽기 13:2에 잘 나와 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 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애굽인들의 맏이를 치는 심판 작업이 끝나고 난 뒤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이 소지하고 있는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을 하나님은 거룩한 존재로 전환시키려 하신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리니깐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 버렸다. 왜 그랬을까? 어린 양의 피를 핵심으로해서 이루어진 관계를 죽음의 사자가 거룩이 생성되어 있는 것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음에서 면제 된 후 다시 예전처럼 자신들의 장자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어린양의 피로 살아남은 장자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다. 과거의 자신의 입장과 구원받고 난 뒤의 자신의 입장 사이에 단절이 생겼다. 이 단절로 인하여 다시 옛날처럼 자기 부모에게 속한 맏이가 되지 못한다. 결국 부모 입장에서 봐서 자기 집안의 장자 하나 잃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차지해서 가져가 버린 셈이다.

이 원리가 '대리' 혹은 '대속'의 원리이다. 사람의 것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는 날 밤, 바로 대속의 어린양은 희생되어야만 했다. 즉 어린양이 죽어 피가 문설주로 발릴 때 이미 그 히브리인의 맏이는 바로의 장자나 애굽인의 장자들처럼 이미 죽어서 없어져 버린 존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집안의 맏이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로 살아 있다. 이미 죽은 자인채 살아 있는 것이다. 남의 자식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 자식으로는 없어져 버린 존재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장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살아 있음은 흠없는 어린양의 '대신 죽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인간의 소유물이 하나님의 소유물로 전환되기 위한 '대속'이었고 '대리 죽음'이었다.

그런데 흠없는 양은 왜 죽어야 하는가? 여기서 '흠없는 어린 양'은 새로이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신분을 획득한 살아남은 장자들의 입지를 설명해 주는 지시물이기 때문이다. 즉 살아남은 히브리인들의 장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므로서 어린양이 가지고 있었던 평가, 즉 '흠없는' 자라는 평가가 자신의 신분이요 위상임을 확인 받게 된 것이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통해서 볼 때, 희생 제물은 바로 이와같은 출애굽 당시의 장자의 신분 변화를 계속해서 확인하기 위한 언약적 조치로서 반복된다. 즉 "과연 너희들이 거룩한가? 거룩의 속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거룩해진 것인가를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레위기 4장-5장과 민수기 15장에 보면, 속제제물의 의의가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부지 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레위기 4:22,27/5:2,3,17,18) 거룩한 백성이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실에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 시켰을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거룩을 훼손 시켰는지 아니시켰는지를 무엇으로 판정할 수 있는가? "너희가 그릇 범죄하여 여호와가 모세에게 말한 이 모든 명령을 지키지 못하되 곧 여호와가 모세로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여호와가 명한 날부터 이후 너희의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회중이 부지중에 그릇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하나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제사장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면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니 이는 그릇 범죄함이며 또 그 그릇 범죄함을 인하여 예물 곧 화제와 속죄제를 여호와께 드렸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도 사함을 얻을 것은 온 백성이 그릇 범죄하였음이니라"(민수기 15:22-26) 바로 속제제물이 거룩 유지에 효력이 있는 경우는, '부지 중'에 그릇 범죄한 경우에 한 한다.

'부지 중'이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깨달은' 상황을 말한다.(레위기 4:13,22 참조) 여기에는 반드시 '자복한다'는 심적 요소가 함유되어 있어야 한다.(레위기 5:5) 그리고 백성이 자복할 때면 자신의 범죄 때문에(비록 부지중 이라고 할지라도) 추가적으로 무엇이 더 소모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내다보고 그점을 깨달은 상태에서 자복하게 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소모될 것은 결코 자신의 윤리적인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이 훼손은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속제제물에 관한 언약뿐이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제물의 대리적 속성은, 하나님 자신이 내세운 그 율법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거룩 유지의 유일한 방식으로 이미 확정지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백성으로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하는 것도 하나님 언약의 거룩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방식에 불과하다. 거룩하지도 않는 자를 위해 무엇인가 대신 희생시켜 거룩을 유지시키려는 의도도 율법의 거룩성을 계속 내비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은 범죄 후에 다시 거룩한 상태로 되돌아오는 데는 조건이 붙는데 그것은 '부지 중'에 벌어진 범죄라는 것과 사태를 알고 난 뒤 '자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이유가 되어 거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언약 관계에 들어가 있기에 거룩해진 것 뿐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희생 제물과 백성들 사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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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77건 중 1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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