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전의 원형
3. 성전의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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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전의 원형
축복의 중심되는 민족이 지정되고 말았다.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다른 민족은, 그들의 선택적 의지를 지닌 채 이 하나님 선택성 작업에 부응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 사이가 대결 구조로 지향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주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것이다.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2:30-32)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곧 네 사방에 둘러 있는 민족 혹 네게서 가깝든지 네게서 멀든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는 민족의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한 자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너는 이 진멸할 물건을 조금도 네 손에 대지 말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더하사 너의 열조에게 맹세하심 같이 네 수효를 번성케 하실 것이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신명기 13: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명기 17:2-7)
인간이 행하는 모든 선택 행위의 바탕에는 어떤 신을 근거로 한 행위인 가를 규정해서 처벌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처럼 인간 행위의 가치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게 된다. 만약 아브라함의 나라에 대해 저주하는 식으로 선택적 의사를 표시한다면 하나님의 선택 규정에 의해서 그 민족은 저주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의 내용이 되는, '네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안간들의 바벨탑 건립 동기를 의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건립하면서 자기네 이름, 즉 자기 네 가문은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랬다. 흩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탑을 건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잘못 건드리면 저주, 즉 대가 끊어지는 수모들 하나님으로부터 당한다.(창세기 20:17-18)
이제 그들의 가문의 이름들은 무의미하다. 온 땅에 아브라함의 집만이 이름 값 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니 성전이냐 하는 것도 우선적으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난 언약의 하나님에게로 수렴되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수렴되지 아니하는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연결은 오로지 아브라함 하나님이 제시하는 약속을 타고 이루어지겠금 되어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신 아브라함 민족의 이름을 온 지면에 창대케 하시면서 그 약속 성취를 위하여 지상에서 싸움이 시작하시는 분이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1) 아브라함의 싸움은 곧 하나님이 하시는 싸움이다. 여타의 민족들의 악을 고발하고 심판하고 정복할 임무가 있는 싸움이다.(창세기 15:16/22:18/24:60) 기존 민족과의 차별화를 유발시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제공되는 '의'에 있다. 다른 신은 결코 이러한 '의'를 제공할 수 없다. 아브라함 민족은, 하늘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하게 의로운 민족이며 이는 하나님의 약속된 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세기 15:6)
즉 의가 없는 민족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결단을 아브라함 민족을 통해서 비로소 전달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 가문이 지니는 중요성은 다름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 한가운데 있는 유일한 의의 가문이라는 점에 있었다. 이 의란 오직 하나님이 일관되게 일하시는 그 약속을 수용함에서 오는 의이다. 곧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믿는 자를 의인되게 하는 의의 근원이 함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아브라함 자신의 손으로 잡게 한다. 즉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죄를 위하여 희생 제물의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일관한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믿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분이 스스로 내려주신 자신의 약속물로 통해 증명해 내심을 알았다. 이것이 믿는 자의 표본이다. 아비멜렉의 가문에 태가 열린 것도, 조카 롯이 소돔성에서 무사히 빠져 나온 것도 무엇에 관해서 최종 믿어야 되는가로 인도해 주는 사건들이다. 이제 복이라는 것이 아브라함 중심으로 일어난다. 아브라함이 가진 가축들이 예상 외로 번성된다. 우물이나 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툼이 종식된다. 진정 이 땅에서 생명을 누리고 살 자격자가 누구가는 이제 분명해졌다. 아브라함이 바친 이삭, 그 이삭의 씨로 인해 대적의 문을 얻는다.(창세기 22:18) 이것이 제사장의 위치이다. 거룩, 무서운 거룩 앞에 서 있는 그 약속된 자식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이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를 만드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출애굽기 15:17-18에 분명히 나온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즉 '주의 처소'를 만들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하셨다. 처소가 결국에는 하나님에게로 수렴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백성이 영원히 거하실 성소가 되기 위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셨다. 이 나라 건설은 오직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람을 이기고 세상 신을 이기는 그 결과로 생겨지는 나라이다. 그리고 난 뒤 친히 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주의 처소로 데리고 들어가게 하신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애굽기 15:13) 애굽 신들과의 싸움에서 히브리인들은 손을 놔야 한다. 하나님이 이들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었다. 전쟁이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애굽기 14:14/ 시편 46: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
이러한 처소 개념은 이미 야곱의 하나님을 통해서 암시된 바 있다. 창세기 28:17에 보면, 야곱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사다리가 자기 머리 설치되어 있고 천사가 그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이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던 장소가 나온다. 벧엘이다. 하나님이 그 장소에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 장소는 천사들이 사다리를 통해 땅과 하늘을 상호 연락하는 장소이다. 천사가 분주하게 일하므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과 통하게 된 그 상태에 대해서 야곱은 하나님의 문, 혹은 하나님의 전이라고 지칭한 것이다.야곱이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전이란, 폐쇄된 건축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개방된 관계를 두고 말하는데 그 관계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린 언약이다. 즉 하나님의 전이란, 언약의 상대자와 의사 소통이 가능하도록 유지되는 하나님이 떠나지 않고 영원히 언약 상대자와 함께 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8:15) 여기서 '허락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야곱이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했으니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그곳에 돌을 하나 기둥으로 워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 행위와 같은 맥락 속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들은 야곱의 생각과는 달리 어떤 특정 지역에 의미를 두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인물을 겨냥해서 활동하게 된다. 그 이유는, 야곱이 언약을 입은 장자이기 때문이다. 에서와 야곱이 함께 출생될 때에 이런 약속을 품고 태어났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세기 25:23) 야곱이 받은 이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의 내용을 한걸음 더 진전해서 구체화 시킨 내용이었다. 같은 씨에 의해서 이어져도 각기 상이한 민족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민족은 전 세계의 민족을 상대로 전투하고 전쟁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쟁에 의해서 생겨난 민족을 하나님이 자신의 처소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즉 제대로 된 하나님의 전은, 이미 약속된 어떤 인물이 나타나는 것을 겨냥하는데 있지 결코 고정된 건축 구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전을 지정된 공간성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의 죄악성을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를 보여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전은 이미 하늘에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성전은 언약 안에서 이 지상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바로 이스라엘이 수립되는 사건 안에서 그 본질이 나타난다.
장차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총회'가 된다. 이 '여호와의 총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집단이기에 이 은혜성이 상실된 이방 민족이나 거룩성을 더럽히는 자는 이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신명기 23:1-25) 야곱이 실제로 마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게 되는데 (창세기 32:2) 이 군대의 사명은 곧 전쟁이었다. 이 천사 부대들의 사명이 곧장 장차 국가 이스라엘의 사명으로 연결되어지는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와같이 천사 부대의 연관성 때문이다.(출애굽기 7:4/12:41) 이 전쟁은 속성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얍복강 가에 야곱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도 밤이라는 시각을 통해서이다. 밤에 이루어진 이 하나님과의 싸움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지상에서 벌릴 진정한 전쟁의 의미를 남기기 위해서이다. 전에 야곱이 벧엘이라고 하는 곳에서 밤에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나님과 지상의 인간이 유일하게 상호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 되어진다는 야곱 언약은 반드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서만 실현될 뿐이다. 야곱은 이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상대로 밤 새도록 싸움을 하게 되는데 이 싸움하는 과정을 통해 야곱은 하나님 언약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즉 언약이란, 인간이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야곱 자신의 노력과 지혜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약속을 가지고 찾아드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싸우시는 싸움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야곱은 하나님보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야곱은 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으며 왜 하나님은 그 요구에 거절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란, 언약이 완성이 되어서 생겨나는 완성체에게만 이름이 담겨져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 야곱의 이름 안에 이미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은폐시켜 놓고 있었고 그 약속의 내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은 그 안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야곱에게 내려준 약속대로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여호와'임을 모세에게 알렸다.(출애굽기 3:13-15/6:2-3) 그리고 그 이름은, 조상에게 약속한 내용대로 빈틈없이 성취해 나가시는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국가 이스라엘이 생겨났는데 그 날 밤이 바로 '여호와의 밤'이었다.(출애굽기 12:42) 즉 여호와께서 친히 야곱에게 축복하신 대로 그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날이다. 이제 하나님의 집은 벧엘이라는 특정 공간도 아니요 야곱이라는 특정 개인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언약 안에 놓인 야곱의 12지파인 국가 이스라엘이다.(창세기 49:1-28/신명기 33:1-29/마태복음 10:1-7/요한계시록 7:5-8/14:1-5/21:10-27)
이스라엘(야곱)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참된 하나님은 계속 구원의 원칙을 고수하신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거룩한 나라요, 의의 나라요, 구별된 나라요, 하나님의 군대이다. 이들 이스라엘 국가가 차지하는 땅 점유는, 기존의 인간 국가들이 점유하는 땅과 구별된다. 그리고 그들의 악을 징벌하고 정죄 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는 것은 모두 무너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를 거부하고 이방 나라들과 같이 자신들의 처소를 되기 시작한다면 이는 언약을 무효화시키는 행위들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언약에 따라 참 이스라엘만이 존속될 것이다. 이 원리와 원칙을 이스라엘 스스로가 박차고 벗어난다면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멸망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 치뤄내야 하는 싸움은 힘의 싸움이 아니라 '의' 즉 정결의 싸움이요, 맹세의 싸움이다. 마음을 낮추어야 될 싸움이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좇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9:5절)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의 대신 자꾸 자신의 의로운 능력을 의존하게 되면 그 전쟁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전쟁이며 거룩과 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번제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신명기 12:1,5,11,13-14)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영구화하기 위해 택한 땅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자기 백성에게 제공하신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내용을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출애굽기 3:13-15/6:2-3)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서 일하시는 곳이라면 항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리신 그 원리를 따라서 일하게 된다. 이 원리로 인해 이스라엘 국가는 기존 세계로부터 '떠남'을 계속 유지해야하는 나라이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출애굽기 12:29-31)
이스라엘로 하여금 떠나게 하는 배후의 능력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나왔다. 이 언약이 적용되는 한 이스라엘 내부에는 '떠남'의 정신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과의 동행이나 결합의 정신이 필연적으로 이방 나라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의 정신을 요구하게 된다. 만약 이 정신이 희석되면 곧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입장에서 언약 위반이라는 사태에 놓이게 되고 이것은 곧 거룩에 의해서 저주와 심판이다. 바로 이러한 현실을 통해 '언약'이 지닌 하나님의 창조 정신에 입각한 결합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이 떨어진 그 현장의 특수성을 말한다. 이 언약의 특수성은 모든 인간의 지혜와 죄악된 사고들을 무가치하게 폭로내는 능력이다.
인간의 철학적 사고 있어 가장 큰 난맥상은, '동일성' 문제이다. 늘 고립적이고 개별성을 속성으로 하는 자아가 어떻게 타자(他者)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자아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있어 그것이 접촉점과 융합점 구실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아예 주체성은 없고 단지 타자가 상징화 되어 자아를 대체하여 자리잡고서는 지속적인 변화와 변천를 이르킨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인간은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전체성 속에 들어 있으며 그 원형들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일종의 '집단 정신'을 상정하며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해서 개체적 '나'를 고집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라는 의식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신비로운 일이다. 이미 주체가 '나' 하나로 고정된 입장에서 주체 중심 이동에서 필히 야기되는 주체 증발 현상을 수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자아라면 여기 개념화된 '자아'는 새로운 '타자상'을 지닌 제 3의 실존 개념인 '자아'가 되어버려서 지금 자신이 느끼는 자아상과 차이성을 보여줄 게 뻔하다. 이러한 철학적 해명의 난맥성은 조직 신학을 구성하려는 소위 신학자들의 철학적 작업에서 여지없이 침투된다. 예를 들면, 옛날 그 아담과 지금의 '나'와 같은 '아담'이라고 간주되는가를 논리적으로 만족스럽게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롬 5:14)
만약에 신학이라는 것이 철학과 같이 인간 긍정을 원칙으로하여 궁극적으로 인간 구원을 겨냥해서 전개한다면 전혀 이스라엘 나라 존재부터 해명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상이 인간학 수준으로 추락해서 실시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의 초월성과 영광성과 거룩성과 그 찬양을 위해 모든 지면을 할애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인간을 실제로 구원해 내지 않는다면 하나님 존재 자체가 의의가 없다고 믿고 다짐하고 있는 인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복음으로부터 차단된 세계에 그냥 놓여 있게 된다. 이스라엘이란 오직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생겨난 나라이며 동시에 언약을 위하여 또는 언약으로 인해 없는데서 창조된 나라이다. 따라서 그 나라는 언약만 구현하는 현장으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지 결코 인간의 구원이나 죄인된 자에게 또다시 하나님 형상 회복되고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일과 상관없는 일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가 한 몸이 된다는 사상은 언약 안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밝혀진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13:1-2)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가정의 맏이가 어떻게 '내 것(하나님 것)'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으로 인한 창조 사역 때문이다. 이 창조적 언약 안에서는 여전히 천지 창조의 위력이 거침없이 발휘되고 있다. 언약은 여전히 이어지는 하나님의 주도적 창조 사역이기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현상만을 남긴다. 따라서 이미 유(有)가 되어 있는 인간에게 있어 도로 무(無)로 돌아가서 하나님 창조 사역에 준비된 자로 드려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능력이 없다. 즉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면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모든 인간들의 배제되어 있다. 기껏해야 바알이나 아세라 선지자들처럼 유를 가지고 한없이 무에 접근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학대하는 일밖에 못한다.(왕상 18:28) 그러나 이런 행위조차 어디까지나 유의 범주 안에서만 국한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신 말씀이지 그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이 제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 아니다. ― 심지어 베드로는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하여 버렸다고 나섰고(막 10:28) 죽겠다고 나섰다(요 13:37)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바로 전형적인 유의 속성이다.
유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일을 결코 있지 아니하다 ―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이렇듯 유의 한계를 확정하고 굳게 닫혀버리게 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기존 인간들이 지닌 자기 지혜로는 이 언약에 대한 이해조차 허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언약을 가지고 일하신다. 자기 백성도 자신이 언약 안에서 임의로 창조해서 만들어 나간다. 그러니까 처음 창조 사역을 중단없이 유지해 나가시는 것이다. 처음 창조 시의 등장된 그 조건이 바로 언약이 되어 계속 창조 사역을 실어내고 있는 것이다. 남 녀가 한 몸 된다는 것도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창조 조건이며,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것도 창조 조건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창조 사역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언약 안에서의 동질성', 혹은 '언약 안에서의 동행'이다. 처음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미 없는 자로서 또는, 죽은 자로서 언약 실시밖에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창조 사역성을 지닌 언약을 복음의 중심으로 잡지 아니하고, '하나님/인간' 이라는 고정된 틀을 미리 다져놓고 거기에다 '언약 발전'이라는 구속사 흐름을 집어넣고 또 히브리적 사고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허공에 뜬 '초인간주의' 사유 양식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제시한 참 복음은 오직 언약 성취만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결코 언약을 통한 인간 구원이나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 형상 회복이나 ― 현 인간에게 밀착하는 그 무엇 ―, 혹은 하나님과 영원한 함께 사는 삶, ― 현 인간에게 추가적으로 제공되는 주는 멋진 생존 환경 ― 에 목표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상들은 유사 종교이며 유신론 철학이기에 기존 인간 철학의 가벼운 변형에 불과하다. 신의 존재와 성품을 재료로하여 인간들은 얼마든지 화려하고 감동적인 복음(?)을 만들어 낼 정도로 상상력들이 풍부하고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신학 테마적 아이디어들은 그저 인간의 염원이 내포된 가능성으로만 머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언약은 다른 진리를 나타낸다. 즉 언약 달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하나님만의 작업이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성막과 더불어 시작된다.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애굽기 40:34-38)
여기에 나타나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벗어날 때에 처음 생긴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영인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와 구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길을 떠날 때는 앞부분에 피어올랐지만 애굽 군대가 뒤따라왔을 때는, 구름 기둥이 진 뒤로 이동하여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출애굽기 14:19)
이러한 구름 기둥이 성막이 만들어지고부터는 하나님이 계시는 지정된 장소 위에서만 피어올랐다. 그 장소는 성막이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렀더라"(신명기 31:15)
왜 하나님은 장막 위에서만 나타나시는가? 장막은 또 하나의 분리된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은 거룩한 땅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기 위해 조치를 취하셨다. 그들 속에 특별히 거룩한 영역이 마련하는 것이다. 어떻게 마련되나? 그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훼손된 거룩을 정결케 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출애굽기 29:44)
회막과 제사장이라는 자들을 세워 거룩을 유지케 하는데 이 성막이나 제사장을 세우는데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 기반으로 들어간다. 즉 전에 애굽에 있을 때 히브리민들을 통해 국가 이스라엘로 되게 한 그 약속이 담겨진다. 그것은 출애굽을 유발케 했던 유월절 희생 양 제도이다. 그 어린양의 죽음 안에 이스라엘 계속 들어 있어야지 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인간의 피도 아니요 인간의 수고나 노력도 아니다. 흠없는 희생 제물의 피가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의가 사라지면 죽음만 발생된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 죄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하자면 따로 의를 지상에서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의는 하나님의 약속에서만 나온다. 무엇이 약속일까?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애굽기 24:4-8)
이 말씀에서 '언약서'라는 것과 '언약의 피'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언약서'가 존재하지 아니하면 '언약의 피'의 의미도 사라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피를 짜내기를 요구하신 것은 아니다. 언약의 피는 짐승의 피이지 사람의 피는 분명 아니다. 그런데 언약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짐승보고 언약을 지키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언약서대로 다 지킨다면 더 이상 '언약의 피'는 필요 없는 것일까?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만약 못 지킨다면 그때 가서야 짐승의 잡아 '언약의 피'를 내어 바치면 모든 문제는 무마될까? 아니다. 그렇다면 만약 언약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짐승들도 죽이고 이스라엘을 죽인다는 뜻일까? 아니면 짐승은 살리지만 이스라엘은 죽인다는 뜻일까? 여기서 출애굽 때의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가 되살아나야 한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던 밤, 모든 계약은 어린양과 죽음의 사자와의 계약으로 종결된다. 단 히브리인들은 집밖으로 나가면 아니되고 집안에서 죽어 피를 낸 그 양고기를 먹고 있어야 했다. 즉 양을 잡고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양고기를 먹는 자는 분명 히브리인들이지만 실질적으로 피로서 언약에 참여되는 상대는 희생 양이지 결코 히브리인들의 자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따라서 언약의 주체는 하나님과 그 자신의 이름, 혹은 약속이다. 언약서는 바로 하나님 이름으로 이루어질 사실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들이다. 언약서와 언약의 피는 영원히 힘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이 실현되는 가운데 자기 처소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거룩 유지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거부하고 자기 약속으로 안에서만 인간과 만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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