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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 사람들이 남기는 것성경신학-

1. 사람들이 남기는 것
흔히 문화라고 말하는 것은 인공(人工)의 산물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들은 인위적인 것을 남긴다. 자연속에서 태어나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인간이지만 이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기만의 것을 남긴다. 창조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창조란 새로움이다. 새로 시작하는 행동이다. 자연 속에 이왕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자연에 대들고 거스리는 속성을 지닌다. 아담이 선악과를 선택하고 따먹은 순간부터 자연과 우주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이미 지혜를 잃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한다. 시간도 자기를 위한 시간이어야하고 공간도 자기를 위한 공간이기를 기대하면서 창조력을 발휘한다. 성경은, 인간의 죄짓고 난 뒤의 최초의 행위를 수치심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준다. 자기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마음이 인간 창조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말이다. 문화란 곧 수치 제거 작업이다. 창조력이 동원되어 만들어 놓은 독자적인 자기 세상 안에서 인간은 수치가 제거된 자기 모습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 인간 세계에서 변변한 자기 것이 없는 자, 곧 거지나 실업자나 노예들이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 수치를 가려줄 시간이나 공간이 제대로 장만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만의 공간이 있는 자들은 그 안에서 작은 신(神)이 된다.
그 안에서 자기를 위한 축제를 즐긴다. 이것은 일종의 놀이요 게임의 형태로 삶을 형식화시킬 수 있게 된다. 놀이에 있어 인간은 스스로 규칙 제정자이다. 인원수 조정, 공과에 따른 상벌 규정, 스케줄 관리, 게임 방해자에 대한 벌칙 조항, 게임의 다변화, 새 게임 개발, 외국 게임 수입하기, 모든 놀이에 대해 균등한 가치와 의미 부여하기, 상호 존중하기 등, 모든 범례(패러다임)를 관할할 수 있게 된다. 이 놀이 동산의 개최한 자들과 즐거음의 주인공은 오직 인간들 뿐이다. 신과 천사와 짐승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사회, 그리고 그 관리를 인간이 하는 사회, 바로 이러한 놀이 동산에서 인간은 계속 신으로 행세한다. 절대적 존재자, 즉 법 제정자 위치에 있으면 있을수록 수치심과 죄 의식이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그 어떤 법칙부터라도 탈피하고 싶어하는 자유 의식이 삶을 놀이 동산으로 전환시켰다. 이 놀이 영역이 바로 가정이요, 국가요, 직장이요, 교회이다. 이것으로서 신의 지위에 대응한다. 수치로부터 자신을 꺼집어내기 위해 자기 창조성만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전부다 종교인이며 신앙인이다. 자신의 창조성에 최후의 기대를 거는 그런 교리를 가진 신앙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력 발휘를 통해서도 일정한 자아상을 본인이 확고히 붙잡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나'인지, 어떤 모습이 '나'인지 모르기에 끊임없이 자신과 일체화 시킬 수 있는 대상을 찾아다닌다. 자아가 품을 수 있고 또한 자아를 감싸 줄 수 있는 사물과 접촉을 시도한다. 이미 자아를 신으로 생각하고 거들먹거리면서 행세하고 있지만 그 신의 참된 모습과 본질이 명확하지 않고 자꾸만 달라지기에 참된 자아상을 정립하기 위해 한평생 헤매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고정된 자아상만 확립이 된다면 더 이상 인간에게 있어 무수한 변화에서 오는 불안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세계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시작은, 자기 만은 꼭 구원되어 안정감을 얻겠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성전을 짓는 것도 그 성전과 자아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고 예수를 믿겠다는 것도 그 예수와 자아를 일체화해서 새로운 자아성을 확고히 다져보겠다는 염원에서 나온 행동이다. 주변에 있는 것은 뭐든지 다 자기와 일체화 시켜서 자아로 환원시키는 가운데 필연코 적합한 자아상으로 고정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도 공간도 인간에게는 그저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요소에 불과하기에 거기에 관한 이해와 해석도 오직 자아 중심적으로 집약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구원관과 종교관의 본질이다.
이런 의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름대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규정이 있고 원칙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는 구원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하고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자의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인간들의 요구와 소원을 들어서 해주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참되게 지으시는 성전과 인간들이 벌써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신전으로서 혹은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성전도 역시 확연히 다르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일절 거절하시므로 인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성전이나 교회 이외에 다른 성전이나 교회는 이교적임을 드러나게 하신다. 동시에 인간은 항상 죄짓는 존재임을 밝혀내신다.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러했다.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하셨더라"(왕하 21:15)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인간들의 악에 들러싸여 솟아 오른다. 하나님 뜻이 구현된 주변에는 인간들이 구상해낸 온갖 잡신들이 너절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에 의한 성전의 신화화이며 사이비화이다. 인간은 성전이라는 것과 교회라는 것을 모방해서 제조하므로서 자기만의 자기 역사와 자기 계시를 장만해서 출발시키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스스로 신비의 중압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자기만의 외투를 뒤집어쓰고서 그 안에 잠식되어 신의 일과 사역을 창작해 나가는 짓을 해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성들과 구약에서 연관지으면서 그 가운데 참된 성전을 말씀하신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죄만 짓는 백성들과 동행하는 가운데서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들 편에서 계속 올라오는 거짓된 성전, 거짓된 여호와, 거짓된 메시아 개념 속에서 하나님은 심려하시면서 끈질긴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수록 조직적이고 체계화되어가는 죄악의 깊이에 대해서 하나님으로서 취하시는 처방도 갈수록 점점 과격해 진다. '피'라는 것은 가장 극단적인 사태를 암시한다. 결국에는 피가 쏟아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관계는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상대로서 마주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피'를 가운데 두고 동행하고, 피를 통해서만 의사 전달이 가능하고, 피를 뿌려야만 생존이 보장되는 상태는 이 세상의 모든 인위적 방식에 대한 전면 거부를 전제로 한 것이다. '피' 이외에 모든 여지는 무너졌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사람들은 황당함을 느낀다. 하나님을 위하여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다 무의미하고 오직 자기 목숨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요구하고 있다. '거룩한 피' 안에서 자기 죽음을 자연스러운 기정 사실로 받아 주기를 원하고 계시다. 목숨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행위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목숨바쳐 하나님을 사랑한 자의 피에 동참하기를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십자가 사건, 이는 참으로 과격스러운 하나님의 몸짓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롬 8:32) 라는 본문에서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아야' 비로소 일이 성사됨을 하나님은 신중하게 결정하셨다. 다른 방법이나 대책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만드는 모든 성전과 교회에 대해 하나님은 이 '아들의 피'로서 되받아 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마저 내다버릴 만큼 그렇게 처절하고 비참한 사태로 세상을 간주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의 피, 인자의 피, 이런 표현은 하나님이 지니고 계시는 분통과 격분의 최종 표현 양식으로 표출된 형식이다. 이 하나님의 아품에 의해 생산된 것이 성전이요 교회이다. 따라서 성전과 교회는 온통 피로 범벅 되어 있다. 피를 기초로하여 세워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로 교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교회와 성전 이해는 하나님의 피(행 20:28) 안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견해 밖의 해석는 용납 될 수 없고 용납해 봤자 엉뚱한 교회관만 산출 한다. 교회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이다.
인간들의 사회란 질서의 바탕 위에서 존립하고 질서란 통합되는 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므로 성전이나 교회라는 것을 부정할 때도 그 만큼 새롭게 마련된 질서체에서 뿜어내는 권력에 준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늘 어떤 권력이든 권력의 포로가 되어 있다. 출생할 때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 질서 안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 태어나기 때문에 평소에도 권력이 주는 중압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사회는 참으로 침착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침착한 악마의 손 안에 놓여 있기에 이미 악이 제공한 권력에 맛들어 있다고 보신다. 인간들이 자신의 '있음'을 자기를 둘러 싸고 있는 '권력 있음'과 조정하면서 삶을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시집 간 새색시가 그러하고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 그러하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러한 질서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 내용에 대해 담고 있다. '권력 있음'에 대해서 '권력 없음'으로 바꾸고 새로운 권력 안으로 탈출을 하게 되는 낯선 경우를 성경은 하나님의 일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계신다. 교회나 성전에 관한 이야기도 이와마찬가지이다.
성경적으로 봐서 교회나 성전은 원래 '없음'을 본질로하여 나타난다. 머리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만약 세상적으로 본 '있음'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이 '있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영구히 자기 소유화하기 위해 재주들을 총동원할 것이 뻔하다. 예를 들면, "날자나 시간상으로 언제 예배드리면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겠는가?", "예배 처소를 장식하는데 있어 어떤 인테리아를 선택할 것인가?", "목사직은 몇세부터 몇세까지로 제한 할 것인가?", "어떤 언어들이 인간들의 종교적 감흥을 불러 이르키겠는가?", "구제를 위한 바자화를 일년에 벌리는 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효과적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교회라는 이미지를 심겨줄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선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목사, 장로들에 대한 정기적 신임 투표를 통해 교회 개혁을 달성하자"등 등의 관심들이 솟아나기 마련인데 이런 관심사 앞에서다 "나의 수치성을 가리기 위하여" 혹은 "나의 자존심을 위하여" 혹은 "나의 영광을 위하여" 혹은 "나의 과거 역사를 위하여" 혹은 "나의 명예심 유지를 위하여" 라는 부사구를 붙이고 읽으면 이들의 본질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들은 자기 노동을 통해 자아를 추겨세우게 되고 결국에는 자기에게로 의미들을 최종 소집시킨다. 이런 일들이 교회와 그 존립 여부를 중심으로해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일이 예수님이 친히 세우신 교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이런 식의 종교 단체를 교회라고 우기고 싶어하는가? 바로 이점이 성경 안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늘 벌어져 왔던 대립 구조였다. 구약에서부터 줄기차게 내려오는 내용은, 신전과 성전과의 대치성이다.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는 신전 노선으로 등장되는 교회가 있는 반면에 참된 성전 노선과 이어지는 교회가 따로 있다.
신전 노선은, '있음'을 기초로하여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반면에, 성전 노선은 '없음'을 기초로하여 이 사실에 대해 사람들에게 믿음으로만 다가설 것을 요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만약에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가짜라면 그러면 한국 땅에서 천국갈 사람은 없지 아니한가? 과연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천국이 텅텅 비도록 내버려 두실까? 그럴 리 없다. 따라서 한국에도 분명 이상적인 교회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같은 것이 '있음'에서 출발한 사고 논리이다. 반대로 "사람들이 무엇을 교회라고 하든지 상관없다. 단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참된 성전인 그리스도 몸 뿐이다"라고 여기는 것이 '없음'에 기초한 교회관이다. 교회란 기본적으로 사람이 교회를 만드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한다. 주님이 독자적으로 창조하시는 창조 행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99마리의 양이 아니더라도 한 마리의 양이 회개하고 돌아와도 99마리의 양이 안돌아오는 상황에서 얼마든지 큰 잔치가 벌릴 수 있는 있는 속성이 하늘 나라이다. 만약 이점을 수용한다면,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관이 확정될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예'가 될 뿐이다.(고린도후서 1:20) 주님의 일에 차질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하늘 나라의 바로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들로부터 끊임없이 미움을 받는다. 인간 사회는 오로지 자기 것'으로서의 '자기 교회 만들어'로 생겨나는 교회만을 교회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 교회와 대결하는 맞은 편 위치에서만 참된 교회가 자리잡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들은 문화적 유산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배척하시면서 참 성전과 교회를 창조해 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벌리시는 거룩한 전쟁이다. 그만큼 인간들은 악의 지배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전쟁의 결과로 등장된 것이 참된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예수님만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악을 이기신 그 사건만이 영원히 경배의 이유로서 자리잡게 된다.
오늘날에 있어 교인들을 자주 방심하게 만드는 상황이 되어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많은 예배당들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디로 둘러보아도 늘 교회가 있는 이상 당장 구원에 매달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다급할 때 교회 안으로 뛰어들면 금방 구원받은 자로 인정해 주고 보장해주는 행정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를 보고 있기에 오직 하나의 교회라는 생각을 못갖고 있기 싶상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나라에서 쫓겨나 있고 밖에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나라를 다신하는 다수와 복수의 교회들이 신임받고 있는 교단의 울타리 안에서 계속 제조되어 나오는 현상을 보고 안심하고 있다. 교회도 아닌 것을 교회라고 간주하고 싶어하는 심정이 비극스럽다. 참된 교회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오히려 구원되어야 될 현실을 평가한다. 참된 교회의 조건은 무엇인가? 교회의 조건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교회의 조건은 언약이다.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특별히 언약으로만 관계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만 유일하게 드러내실 뿐이다. 구약이 이러하다면 신약 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조건은 오직 새언약 뿐이다. 이 언약말고 다른 수단,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교회는 모두 가짜 교회이다. 참 교회는 새언약의 내용만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의 양상은 인간의 손과 노고를 거부한다. 사람의 종교적 노력과는 무관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십자가 사건이 종말 때의 모든 인간의 죄악을 다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악의 권세 밑에 있는 것이 인간 조건이다. 그 누구도 이 권력 천장에 구멍을 내고 탈출에 성공한 자가 없다. 그런데 이 조건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들어오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에게 떨어졌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이라는 새로운 인간 조건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는 그들의 느낌이나 변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생존을 위한 욕망과 본성에 준해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직 이 언약 안에 놓여 있어야만 백성이 된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한다면 우상숭배자로 전락된다. 그런데 이들 언약 백성들 속에서 처음으로 성전이 나타냈다.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생각할 때도 필히 이 점을 고려해서 이 성전과 관련성을 지녀야만 한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염두에 두신 피조물하고만 성사된 계약이다.(창 9:1-17)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본래의 위치를 고수하게 된다. 그런데 언약에 의해 포섭된 인간은 언약 안에 자리잡고 있는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제 위상을 파악하게 되는데 그 위상은 전위(轉位)되어 있다. 인간의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죄와 연합되어 있는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대립되는 세력자 임을 언약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으로부터 손을 떼게 하신다. 인간은 피를 먹을 수 없다. 피를 소실시켜서도 아니된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3-6) 생명에 대한 모든 관여는 오직 언약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 형상을 지닌 그 분 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생명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흘려지는 거룩한 제물의 피, 곧 생명 때문이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아무도 피를 먹지 말며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라도 피를 먹지 말라 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레 17:10-14)
구약에서 언약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피에 대한 인간의 접촉 금지를 표현하는 것과 같다. 철저하게 인간을 생명과 단절시킨다. 신약에 와서 피에 대한 금지는 도리어 예수님의 자신의 피를 마셔라는 대목에서 도리어 더욱 강조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3-57) 그 당시 유대인들은 피를 마시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 규정을 준수하므로서 생명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통로마저 역으로 완벽하게 차단하시는 것이다. "내 피를 먹어야 사느니라!" 곧 구약에서 피(생명)에 대한 인간들의 접근 금지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과 생명은 따로 존재함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바로 이 따로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죄악된 위상 언약 안에서 서로 짝을 이루어 형성되어 있다.
이 언약이 양식은 다양하게 보여진다. 씨에 대한 언약적 규정, 땅에 관한 언약적 규정이나 혹은 성전, 제물, 제사장, 제사 행위 같은 것도 나름대로 언약을 지향하는 형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피에 대한 금기는 이 모든 양상의 뿌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양상과 형식과 제도들은 '피 언약'의 깊이나 본질을 충만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본 책은, 성전이나 교회가 바로 '언약'이라는 조건을 표현하는 양상 중의 하나가 됨을 여러 가지 다른 양상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설명하게 된다. 약속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이 성전이나 교회 안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그 약속(언약)을 보여주고자 하시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 작업을 하시는데 있어 왜 인간들은 온전한 성전과 교회와는 무관할 수밖에 없는 가 하는 점도 같이 거론되어야만 한다. 인간들의 이러한 죄악성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구성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전담하기 때문이다. 비언약적인 성전과 교회 개념을 끊임없이 정죄하면서 참된 교회는 존재한다. 왜 참된 교회는 세상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는가? 그것은 야곱에 의해서 비로소 계시된 바대로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의 영광성과의 관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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