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 3- 5 / 빛과 날
빛과 날(창 1:3-5)http://222.231.1.74/woorich/성경강해/창세기-2001/002강-창1장,3-5(빛과,날)-gene010708.mp32001년 7월 8일 2강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네가 가진 종교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혹자는 기독교이다, 혹은 천주교이다, 혹은 불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종교를 논하고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무슨 기독교와 천주교나 불교라는 구분이 있습니까. 창세기의 구분의 전체 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빛이 있는 기간을 낮이라 하고 빛이 없는 기간을 밤이라는 구분뿐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때부터 인간을 통째로 잡아서 그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구분 짓기를 원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 시대에서는 예수님의 의를 기대하고 바라보는 자를 빛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있어 어두움이란 그리스도의 의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둠을 가지고 나누는 것은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가졌다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빛이 되고 어두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 취업하면서 면접 볼 때, 종교에다 기독교라는 것을 적지말고 차라리 '무'라고 적으라고 했습니다. 종교적 구분에서 오는 이득을 아예 품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종교에 예속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종교라도 예수님의 의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그 자체로서 자유입니다. 인간에 의해서 그 의가 조절되고 반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만 증거하면 교회이지만 인간의 의를 증거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성도 되고 아니 되고는 예수님의 의가 증거 되느냐 아니 되느냐로 기준 잡아야 합니다.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뭘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창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인간들아 너희들은 밝음과 어두움이라 틀 속에 존재해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 여기에서 '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라는 말씀은 저녁이 되고 밤이 되었으면 걱정과 고민 같은 것은 짙은 어두움 속에다 집어던져 버리라는 말입니다. 해가 졌느냐? 그렇다면 낮에 가졌던 분노나 적개심 같은 것은 잊혀져야 될 거리로 지워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푹 잠이나 잘 자라는 것입니다. 보통 교인들의 한이나 풀어주기 위해 철야 기도회를 곧잘 여는데 한이 맺혔다는 것은 방금 보았던 마태복음 6장의 말씀과 어긋납니다. "한이 맺혀 있느냐? 잊어버려라"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한이 맺혀 있느냐? 철야해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밤이 찾아오면 주무시는 것이 좋습니다. 생물학을 공부해 보면, 인간들이 아무리 위대한 문명을 발명하고 거기에 도취되어 까불어도 기껏 순수한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인의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대자연의 원리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젊을 때 인간들은 천하를 움직인다고 꿈을 꾸지만 연세가 많아지면 인간은 자연에 고개 숙이게 되어 있습니다. 커피까지 먹어가며 억지로 기도할 생각 마시고 주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주무시되 편히 주무시는 것은 그 다음날의 문제는 순전히 하나님 소관임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부자가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놓고 말하기를 "내 영혼은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밤중에 인간이 잠 잘 때 인간은 결코 자기 의지로 잠자고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되었던 완전히 하나님의 처분에 맡겨져 버린 대상이 되어 잠을 자게 됩니다. '한 날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날을 통해서 우리에게 피조물임을 주지시켜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로 밤의 나를 지배하겠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까불고 노력해도 낮을 못이기고 밤을 못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진정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일까요? 행함일까요? 아닙니다. 낮과 밤입니다. 밤이 되면 인간은 감추어진 무의식이 활동하는데 그 내용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음란과 잔인함이 꿈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저속한 놈이구나 내가 이렇게 악랄한 놈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잔인한 인간이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의 잘남을 남에게 과시할 수는 있으나 그러나 그 밑둥치는 여전히 추악한 본능으로 움직입니다. 인간은 빛과 어두움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피조물입니다. 낮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을 뜨고 일어나게 되고 눈을 뜨고 무엇인가 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아시고 제발 밤에는 잠 좀 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말입니다. 창세기를 펼치면서 우리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피조물로서의 '나'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만 바라보고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는 내가 내 잘난 맛에 살아왔는데 염치 불구하고 예수님의 화목제물만 기대며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화목제물이 뭐냐 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를 발하십니다. 그래서 중간에 예수님은 들어서시어 자신의 살과 피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의 분노를 사랑과 용서로 뒤바뀌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역할이 예수님이 하신 화목제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것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새색시가 시집을 왔는데 밥을 할 줄 압니까, 김치도 담글 줄 모르지요 찌개 하나도 끓일 줄 모르지요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비해 시어머니는 빨래 박사, 요리 박사입니다. 하루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얘야 너희들 새 가정을 꾸몄으니 고만 너희들끼리 나가 독립해서 살아라"했다고 칩시다. 그럴 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아이고 어머님 감사합니다. 얼른 독립할게요"라고 나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머님, 왜 이러십니까 저를 버리려고 하십니까 저는 어머님만 기댑니다. 어머니만 믿습니다. 저는 어머니 곁을 죽어도 못 떠나겠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발적인 사랑 같은 사랑만이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주님이 너무 고마워서 자발적으로 기대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예수 믿으라고 강요하기 이 전에 본인이 먼저 마음 당겨서 사랑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에서는 이런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칭합니다. 성도라고 해서 결코 피조물에서 벗어남이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피조물이라고 규정짓는 그 틀은 안 벗어집니다. 혹시 어떤 사람이 묻기를 "당신은 무슨 종교입니까?" 물으신다면 "나는 창조를 믿습니다"라고 답변하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낮을 믿고 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밤에도 평안의 이불로 저를 덮어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신약 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 하루 종일 저를 화목제물의 이불로 덮어주옵소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틀이요 곧 피조물의 틀입니다. 날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고 빛을 만들므로 빛이 없는 어두움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에베소서 5:8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피조물로서 만드신 이유는, 하늘에 빛의 세력도 있고 어두움의 세력이 있다는 점을 인간을 통해서 나타내게 하시고자 했습니다. "저 인간은 어두움이네, 오... 이 인간은 빛의 자녀이네"라고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땅의 어두움의 속한 사람은 하늘의 어두움 세력과 내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너는 빛의 자녀이다"라는 말은 "너는 하늘의 선한 세력과 관련된 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비롭습니까. 에베소서 6:12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같은 뜻으로 말한 것이 바로 '악의 영들이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어둡다는 말은 악하다 나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절하는 그런 대상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은 온통 빛과 악의 싸움인 것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싸우는 자라고 하십니다. '내가 또 누구와 원수지려고 교회 나온 것이 아니라'고 어떤 이들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어두운 세력자인 악의 정체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 어두움이 세상 주관자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스스로 자기 행함에 의지토록 합니다. 쉬어야 될 밤의 의미를 아예 이들은 거부합니다. 인간들이 설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없다고 이들은 강조합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도움은 이웃이나 식구나 인간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이 모든 것에 저항하면서 '행함의 신학'을 내세웁니다. 모든 것은 '내 행함'으로 달성한다는 주의입니다. 내일이 주는 불안감과 염려는 오늘의 내 행함으로 해소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이런 신학에 반대되는 것이 '관계 신학'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믿음이 바로 관계 신학입니다. 즉 자신은 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바로 빛과 어두움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 세력에 예속 받는다는 말입니다. 저녁이 되면 편히 쉴 줄 아는 겸손함이 바로 피조물다운 태도입니다. 혹은 신약적으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오죽 잘 알아서 빛과 어두움을 만들었겠습니까 저는 화목제물만 의지하고 편히 쉬겠습니다"라는 겸손함입니다. "오늘밤에도 주님의 의만 의지하겠습니다"라는 정신입니다. 거지 나사로나 스데반 집사는 이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 다음 차례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성도는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창조 뜻에만 따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하에 어리석은 것이 우리이면서도 남들에게 똑똑한 척 했습니다. 교리 몇 개 알고 있다고 천당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빛 되시는 주님의 의만 기댈 수 있는 겸손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