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6-13 /하늘과 땅
하늘과 땅 (창 1:6-13)2001년 7월 15일 3강“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성경이 어렵다는 것은 창세기를 보면서 다시 느끼게 됩니다. 창세기는 여러분들도 수도 없이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많이 보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물리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창세기 1장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연세계를 어떤 경로와 방법을 따라 창조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꼭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의 궁금증도 그 쪽으로 쏠립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성경을 보는 한계입니다. 다윈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진화해서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데 성경은 단지 6일만에 다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자, 둘 중에 하나는 틀린 것이 분명하니 어느 것이 틀렸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 쪽이 틀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비상식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들은 성경도 나름대로 두둔하고 나섭니다. 무엇이냐 하면 과학적으로 봐서 성경이 틀린 것이 분명하지만 성경은 나름대로 인간들에게 교훈 주는 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사야 45장에 보면, 이와 같은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말해주고 있습니다. 45:4-8절에 보면,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인간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라는 대목을 귀담아 들으셔야 합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자기 입장에서 자연세계를 보고 하나님을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모르게 되느냐 하면, 나의 택한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선택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내러준 그 사랑의 범주 안에서만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이 이사야의 계시는 아무에게 던져 준 계시가 아니라 오직 사랑하는 자녀인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만 그러합니다. 이사야 49: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바로 이런 관점을 가져야지만 창조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찾아내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창조 해석이라면 그건 잘못 해석한 것이 됩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 할 때에 자식이라면 "아, 부모님의 은덕이 이토록 높고 크구나"하고 감탄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며칠만에 낳았는데요? 어떻게 내가 생성되는데요?"라고 따진다는 그 정신 자세는 결국 뭐냐 하면, "부모님, 너는 너도 자식인 나는 이제 나다"하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되어서 자식보고 하는 말이 "애야 내가 너를 낳았단다"라고 물으시는 취지가 그 자식에게는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것입니다.여러분들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짝사랑이든 아니면 누군가를 간곡히 그리워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물바다가 된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행복은 계속되게 됩니다. 생존투쟁이라는 전쟁터에서도 시름을 잊고 괴로움을 잊게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대리 사랑이라도 간절히 찾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행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대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 신혼 초에, 물론 연애를 7년씩, 8년씩해서 지겨워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경우에는 신혼도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 사귄 지 두 달만에 결혼한다든지 선 본지 한달 만에 결혼한다든지 하면 신혼 초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빠져서 말입니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내가 요리를 잘하든지 못하든지 상관없이, 단지 그대 있음에 마냥 행복한 겁니다. 사랑에 뒤덮여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게 됩니다. 부질없는 걱정도 그 안에서 녹아져 버립니다. 물불을 안 가립니다. 내 곁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하늘을 만들었다는 그 사실도 사랑으로 받게 되고 하나님이 땅을 만들었다고 그 사실도 사랑으로 알고 받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 사람을 하늘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제가 말하는 것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더 확실할 것 같습니다. 시편 136:5-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낮의 해를 바라보고, "저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사랑의 증표로서 만들어 주셨구나"를 외치는 자에게 더 이상 창조에 대한 해석할 그 어떤 건더기도 남아 있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창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창조의 해답이 궁금하십니까?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창세기 1장을 백날 드려다 봐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진화론하고 이 성경 기술하고 어느 것이 맞지?"에만 신경을 쓸 것이 분명합니다. 시편 136편의 고백처럼 해와 별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는 자가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보게 되면, "세상에서 깊은 산 속에 있는 약초하나도, 기찻길 옆에서 자라나고 있는 감나무의 감 하나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을 가리켜, '창조를 믿는 사람, 창조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간곡한 사랑 때문에 모든 일상 생활이 평안해지고 여유 만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것으로 인해 과연 우리가 행복해 질 것인 가를 생각해 보세요. 사 놓은 땅이 값이 올라야 하는데 과연 올랐다, 사 놓은 증권 값이 올라야 하는데 과연 올랐다, 자식이 좋은 대학을 가야하는데 과연 좋은 대학 갔다, 자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이 다 되었을 때에 여러분 과연 행복하던가요? 제가 장담하건데 절대로 행복 안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행복해지는 바로 '나'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행복합니다. 이유 없이 행복합니다.하지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 해도 내가 자발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해석이 어려운 이유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심에 있는 십자가 위에서 창세기 1장을 봐야 합니다. "얘야, 네 위해 내가 죽는단다. 그러니까 너는 이미 나의 사랑의 대상이야"라는 것을 알 때만 창세기 1장이 전체로 사랑 장입니다. 이사야 49:15의 말씀처럼, "어떻게 어미가 자기가 나은 자식을 잊겠는가. 그 정도로 너는 내 자식이다"라는 사랑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창세기 1장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창조 과학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진화론의 허점을 지적하고 나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 사람들이 천하에서 제일 신앙이 좋은 분들 같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을 포기하고 버리고 나온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의 메카니즘이 뭐냐, 즉 창조된 과정이 뭐냐를 따져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부모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다' 하는 것은 진화론자들도 믿고 창조론자도 믿는 바입니다. 그런데 창조론자들은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모를 통해서 자식을 낳은 것을 믿습니다!" 누가 안 믿습니까. 과학자라면 그 과정까지 세밀하게 따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라면은 냄비 물이 섭씨 100도 될 때 넣어서 끓이라고 되어 있으면 100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지 50도 될 때 넣고 기도하면 라면 맛이 울어나던가요?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토록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빛도 만들고 하늘도 만들고 땅에 만들었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컴퓨터를 사주니까. 자식이 어머니에게 따지기를, "어머니는 인터넷을 아십니까? 어머니는 컴퓨터를 아십니까? 그래놓고도 어머니로서 도리를 다 할 수 있어요?" 하고 대들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이 건방진 자식, 내가 컴퓨터 뺐어 버릴 때 보다"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감사해야 이게 자식된 도리이고 컴퓨터 사주신 것에 대한 합당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 말하는 천사의 말은 하나의 소음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의 진정한 의의는, 내 자신부터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점검하는 계기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둘 째 날과 셋째 날의 이야기인데 간단한 내용입니다. 복음의 내용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땅을 배경으로 하여 설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 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는, 하늘 안에도 복음이 들어있고 세째날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는 땅 안에서도 복음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과 복음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둘 째 날에 만드신 하늘 개념은 노아 홍수 때 그 취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위에서 뭐가 떨어졌습니까? 물이 떨어졌습니다. 하늘이 구멍이 뻥 뚫리면서 하늘이 머금고 있던 물이 왕창 지상으로 떨어진 것이 바로 노아 홍수입니다. 우리들이 화장실에 큰 볼일보고 난 뒤 무엇을 당깁니까? 수세식 화장실에는 물탱크와 관련된 레바를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요즈음 식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마는 옛날 식 화장실은 물탱크가 위에 있어지요. 그 위에 있는 물탱크 안에 고여있는 물이 확 쏟아지면서 변기를 깨끗이 청소하게 됩니다. 창조 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만 하면 항상 위에 있는 물이 지상으로 쏟아지도록 그런 구조 안에서 우리를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복음과 사랑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인간이 별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뭐가 사랑이요 자비입니까? 하나님께서 위에 있는 물탱크의 줄을 안 당겨 주시는 것이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고맙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나오는 무지개 약속이라는 이런 내용입니다. 다시는 너희들의 죄로 인해서 세상을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는 너희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은 날 때부터 악하지만 노아가 바친 깨끗한 희생제물을 보고서 너희들은 물로 무지개로서 너희들을 보호하겠다는 표시를 자연에다 새겨 박은 것입니다. 이 무지개 언약의 취지는 곧 "인간들의 너희 한계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서 존재 하겠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네가 인간이야?"라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우리는 무심코 "예"라고 말하고 싶지요.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지" 이런 대화가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에 갇혀 있는 존재입니다. 이 자연은 인간을 보호하는 포대기입니다. 셋째 날은 땅에 관한 것입니다. 레위기 25:55 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땅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노동자입니다. 하나의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면서도, "땅은 네 것이다"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의 주인은 여전히 나이다"하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대들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시와 엉컹퀴가 나오게 해서 우리가 이 땅을 사는데 괴롭게 그지없게 됩니다. 소위 저주이지요.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면, 그 때는 우리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지요.결국 이 말씀은 우리 인간들이 건방지게 "이 땅은 내 땅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살 거야"가 허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언약이 있는 땅이기에 언약에 위배되는 사람이 이 땅에서 살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이 되었든 땅이 되었든 인간은 결국 포대기에 싸여 있는 그런 입장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포대기가 짐이 된다고 여기면 그 자는 악인이요 이 포대기가 은혜라고 느껴지거든 내 백성이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5:43-46에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즉 우리 인간들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다같이 같은 포대기에 싸여 있으니 이 사정을 알거든 원수라고 해서 미워해서는 아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끈이 닿아져 있는 사람이라고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너와 나라는 수평적 관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수직적 관계로 해결책이 출몰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라는 인간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자비를 베푼 까닭이다"는 것입니다. 하늘 관계가 끊어졌다면 남을 사랑하든 아니하든 그 사람은 이미 이방인과 같이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아는 쪽에서 먼저 사랑하는 것이 도리라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랑한 것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상대하는 그 원천이 나에게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어떤 혜택을 입고 있느냐를 근거가 되어 옆으로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양편에 두 강도가 있었는데 둘 다 지옥 갔습니까? 둘 다 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둘 다 지옥은 안 갔습니다. 한 사람은 안 갔다 이 말입니다. 안간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도 짓 안 했습니까? 그냥 망만 보던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늘의 자비와 연결된 사람은 지옥에 안 들어갔습니다. "예수여, 하늘의 자비자요, 하늘의 용서자요, 저를 생각해 주옵소서 그 용서로서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마음 그를 살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포대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포대기에 쌓인 채.. 창세기 1장을 다시 봅시다. 모든 햇빛과 공기도 자연물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의 선물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과학에서 배운 것과 성경에서 배운 것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과학적으로 따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