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22-24 /생명나무에서의 추방
창세기 3:22-24 /생명나무에서의 추방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생명나무에서의 추방
2001년 10월 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2-2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게 참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행동이란 사람들이나 취하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무나 돌이 행동을 취한다면 우리는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숭이나 개가 행동을 취해도 우리는 시시하게 여깁니다. 그 짐승들이 행동을 취해봤자 무슨 영향력을 남기겠습니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중요한 행동은 오직 인간들만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이 어떤 행동에 나서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행동을 다 할 줄 압니까?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었습니다. 감히 인간을 말입니다. 인간을 누가 함부로 건드립니까? 누가 여러분을 건드리면 여러분도 가만 안 있지요. 싸우려고 덤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쫓아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두려움을 느낍니다. 마치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인물이 실제로 걸어나와서 인간을 공격한다면 이처럼 경악스러운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내용은 이런 경악의 연발입니다. 하나님이 행동에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름대로 행동에 나서시는 기준이 이미 서 있다는 것입니다. 양보 없는 기준을 말입니다.
이미 기준이 서 있다는 것이 추가적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공포입니다. 마치 새댁이 시집살이하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요구하시는 확고한 기준에 눌려 있듯이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그 기준에 위배된다면,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신 그 기준에 의해서 우리도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겁나는 상황입니다. 이 추방의 원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하신다는 이 원칙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신자들이 불쌍합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겁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전모입니다. "저 사람이 너를 미워하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사나?"하면서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들을 미워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사람에게 쫓겨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면전에서는 쫓겨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기준이 2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 근처에서 쫓아내는 겁니다. 생명 나무 있는 곳에서 생명 나무 없는 곳으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해서 딴 게 아니라 생명 나무 길로 가는 길만을 차단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고수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계속 저주받은 상태에서 그 상태가 영원토록 이어지고 이어지는 것을 걱정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과실은 현재의 운명을 영원히 고정시켜 놓는 열매입니다. 만약 선악과를 따먹고 이미 저주받은 입장에 놓인 인간이 만약 거기에서 영생하도록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그 저주가 어디가 가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지옥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셔서 생명나무 근처에 오지도 말도록 추방 조치를 내리신 겁니다. 미워서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살려주기 위해 쫓아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다보면서 하나님이 미워질 때가 있지요. "왜 하나님은 나의 길을 가로막습니까? 왜 하는 일마다 꼬이도록 하십니까? 하나 해결하면 저 문제가 터지고, 왜 그렇게 인도하십니까?"하고 원망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것은 인내와 연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인내와 연단은 앞으로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흔들림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은 초대 교회처럼 교회 다닌다고 핍박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평함이 오히려 교회로 안일과 태만에 잠기게 합니다. 즉 "교회 간다고 핍박을 받으면 나 예수 안 믿으면 그만이지 뭐 누가 답답해 할 일이 있나. 하나님이 살아 계실 것 같으면 당연히 핍박 정도는 안 생기도록 사전에 조치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교회 오는 것을 기적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로 봅니다. 이 분주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아무도 예상 못하는데 그 분주한 사정을 뚫고 들어와서 교회 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선택해서 행동한다고 여기지만 절대로 선택이 아닙니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누가 조성합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땅의 일을 더 흠모하고 유혹 받기 쉽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항의하기를, "이 목사같이 가르치면 사람들이 마음놓고 죄 짓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써 죄 지어 보세요. 죄지어 지는가. 절대로 함부로 혹은 자기 원대로 죄가 안 지어집니다. 아무리 애쓰고 죄 짓고자해도 죄가 우리 뜻대로 안 지어집니다. 웬 놈의 팔자가 죄도 마음놓고 못 짓는 팔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심령 속에 누군가 들어 계셔서 그분이 죄를 거부하면 죄는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초전도체에는 자력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달려들어 쇠 덩어리를 붙이려고 밀어도 극구 반발되는 힘이 내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 못 짓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즐겁게 죄악들도 이제는 시시하게 보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백성을 다루시는데 있어 특별한 관리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결코 저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들을 연단을 시킵니다. 저주받지 않는 상태, 즉 의로운 상태가 되고 난 뒤에 그 다음 생명나무를 먹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어서 저주가 없는 상태가 될까요? 갈라디아서 3: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보기에 거북합니다.
예수님이 저주받는다는 것이 생소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여러분, 저주라는 것은 죄가 풍성한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형벌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저주받는 것일까요? 이 본문에 보니 '속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미 저주 안에 놓여 있는 우리를 그 저주에서 빼내어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벌리신 일은 항상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네가 저주받을 자냐 아니면 저주 안 받을 자냐?"라는 항목뿐입니다. 이 구분만으로 인간을 바라보십니다. 네가 나이가 몇이냐? 직업이 무엇이냐? 교회 내에 직책이 무엇인가? 인품이 어떤가? 라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신자들을 이 땅에서 고생을 시키느냐 고 의문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지닌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체험케 해서 결국 그것을 해결 지우신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더욱 더 풍성히 알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좀 더 체계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구원하시는데 그냥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고 구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와 차이납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가 하면, 그 사람이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차이 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송편과 만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의 차이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신 죽음'과 '대신 저주 받음'의 의의를 무산시키는 요소는 빼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입니다.
이 자기 의를 빼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각종, 각양 경험을 성도가 당하도록 하십니다. 같은 상황 속에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나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죽옷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혔지만 그 인간을 또한 에덴 동산에 쫓아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진정한 가죽옷의 의미는 이 세상으로 추방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분명해집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생은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는 그 죄악마저 거뜬하게 이겨내시더라 이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맨 처음 일어난 사건은 바로 살인 사건입니다. 성도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덮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뭘 하십니까? 동생 아벨이 죽기 직전에 극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죽도록 방치해 놔버립니다.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은 살인자에게 찾아오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은 죽음까지 이겨내니까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런 태도를 가져야 근본 된 토지를 가는 추방된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죄라는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스러운 것인가를 느끼는 가운데 대신 죽으신 희생의 능력을 인정하는 정신이 속에 가득 차 있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명기 1:29-3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여기에 보면,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만나더라도 무서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 저주 안에 있는 자를 무서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사야 2:22절에 보면 더 노골적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람을 가지고 숫자 취급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생명 나무 과일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는 자만이 생명 나무 과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영원히 그 의가 빛나고 그 의로 인해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고린도후서 5:21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내가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를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의를 예수님은 우리 대신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가 들어온 자는 날마다 자기 의를 부정하게 됩니다. 이사야 60: 20-21에 보면,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마칠 것임이니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는 영영히 땅을 차지한다'는 겁니다. 의인이 되어야 영생의 땅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행동에 나선다는 것은 참으로 겁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기준에 준해서 행동에 나서시는 가를 아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기쁨 안에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의가 완전하게 저의 의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의는 다 빠지고 하시고 그 빈자리에 주의 의만 꽉꽉 채워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