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 25-26 /여호와의 일
창세기 4: 25-26 /여호와의 일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여호와의 일
2001년 11월 4일
본문 말씀: 창세기 4: 25-26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통해서 진행됩니다. 그런데 만약이 사람이 거부하면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좌초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한가운데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고 봅시다. 그럴 때 시냇물은 역류됩니까? 그럴 수 없지요. 물은 가고 싶은 대로 가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저지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은 물처럼 그것을 타고 넘어갑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실패로 돌아갑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사랑하는 자가 죽는다 할지라도 그 죽음을 타고 넘어서 계속적으로 진척됩니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오해하면 안될 말입니다. 즉 "아, 하나님도 우리 인간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구나. 하나님과 인간과 같이 합작해야 하나님의 일도 성사되는 법이야"하는 식의 오해 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일은 애초부터 실패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 성도나 우리 인간의 뜻은 어떻게 됩니까? 아까 불렀던 가스펠 송 200장에 보면 이런 가사가 나와 있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하나님의 일은 일관성이 있는데 이 일과 마주치는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바로 부서지고 무너지고 깨어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돌같은 우리가 시냇물 같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당하는 겁니다. 만약 어떤 분이 주장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일을 만났습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얼마나 깨져버렸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아들 본인도 상처받고 깨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토록 비참한 예수님의 몰골이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일로 여기십니까? 예수님에게는 도마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와 못에 박힌 예수님의 손자국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서 하는 말이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자백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벌어질 때는 바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받아 드린 거예요. 찢겨지고, 찔리고, 부서지고, 결국에는 죽음까지 당하는 이런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일관적 양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또한 타넘고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세상 사람들은 못 알아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인간성과 인간성의 만남입니다. 건강하고 당찬 인간성이 남들에게 신뢰성을 주겠지요. 따라서 깨어진다든지, 무너진다든지, 부서지는 경우는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되는 일로 여겨지겠지요. 그저 사람 좋고 인덕이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된 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가인에게 속한 사람들의 생각들입니다.
인기 있는 자가 일을 많이 하게 된다는 공식 같은 거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한테 시험을 받을 때, 그 두 번째 받은 시험이 곧 이런 취지에서 제안 받은 시험이었습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다치게 되면 사람들이 얼마나 너를 영웅시하겠느냐?"하는 겁니다. 이것이 악마적 사고방식입니다. 사람들로부터의 호응도가 곧 하나님의 일이 잘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로 보자는 것은 악마의 제안입니다.
예수님은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반대가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헛된 종교적 망상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신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아벨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린 자입니다. 하나님은 살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벨이 이미 죽고 난 뒤에야 살인자에게 찾아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래야만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란 죽음조차도 극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죽기 전에 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 죽은 당사자를 살리기 위해 대신 다른 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조치하시므로 이 일로 인해 결국 죽음조차 극복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절차가 필요한 겁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무엇으로 인해 아벨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여러분 이 본문을 보면서 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분명 아담과 하와에게는 죽은 아벨말고 다른 여분의 자식이 또 있잖아요. 그런데 그 가인은 아담과 하와는 약속의 자식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약속의 씨란 반드시 깨어지고 무너지고 그리고 결국 죽어버린 그 자의 죽음을 대신하는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이 내용으로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어야만 오직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죽음에게도 지고 죽음 앞에 벌벌 떨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도 아니요 하나님의 약속도 아닙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안 접해본 사람이며 하나님이 찾아들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일을 만난 자라면, "아,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하나님의 일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가인의 7대손 라멕이 하는 이야기를 다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말은 곧 "나는 죽으면 안 돼. 꼭 최후까지 살아남아야 돼. 나는 죽는 것이 무서워. 버텨야 돼 내가 나를 지켜내는 방식이 나의 삶의 철학이야.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안 죽어야 돼"라는 주장이 됩니다.
반면,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씨로서 아벨의 씨로 생성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생명은 이런 핵심으로 퍼집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비로소 그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즉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그 약속된 일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린 약속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극복하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일종의 예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예배란 하늘에서 내려온 약속을 숭상하고, 높이고, 기억하는 겁니다. 여호와에 대한 예배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약속을 알아채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충분히 알았다"하는 것이 예배 성사의 관권입니다. 이 약속을 고대하고 기다리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신 것을 말하지요. 아벨에 담긴 약속된 정신은 중단됨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편 116:15에 보면,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 자체가 약속 속에, 즉 하나님의 일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절에도,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 보면, 성도가 죽는 것이 아니라 쉬는 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미 성도는 약속에서는 죽음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가시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놀렸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찾아 간 들 무슨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그저 병이나 고치는 치료사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직접 손을 내밀어서 그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그랬더니 정말 자고 일어난 모습으로 소녀는 깨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비록 죽은 자라 할지라도 여호와 약속 안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고 또는 쉬는 일밖에 안됩니다.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충분히 극복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즐겁고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 복음 11장에 보면 마리다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을 찾는 대목이 나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잘 대접했던 나사로 오빠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갈을 받은 예수님은 "알았다"하면서 자꾸 지체합니다. 결국 오빠 나사로가 완벽하게 죽고 난 뒤에야 마르다 집을 뒤 늦게 방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마르다는 마구 항의합니다. "예수님 왜 이제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빠가 다시 산다" 그러자 마르다는 평소에 자기가 아는 신학으로 비꼬듯이 예수님에게 마구 퍼붓습니다. "저도 압니다. 오빠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 줄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죽어도 산다"라고 하시면서 죽은 오빠가 묻힌 곳으로 안내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미 시신은 죽어 3일이 지나서 썩어 들어간 이후입니다. 예수님은 돌문을 옮겨 놓기를 명하시고 잠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합니다"하면서 이번에는 죽은 나사로 보고 명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마치 산 사람에게 명령하듯 합니다. 그랬더니만 죽은 나사로가 아니라 산 나사로가 되어 무덤에서 나옵니다. 얼마나 생생하게 살았는지 베로 동인 채로 나옵니다.
인간들은 외형만 보는 겁니다. 죽으면 만사가 끝장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놓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는 외형적으로 그 인간이 죽었느냐 살았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느냐 안 믿고 있느냐 입니다. 여호와가 어떤 하나님인 줄 네가 아느냐 모르느냐 이것만 보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 대목이 있는데 참으로 놀랍스럽습니다.
어디냐 하면, 빌립보서 1:21절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지금 사도 바울 자기 안에 누가 산다고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 몸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어거리 무서운 일이냐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 자기 마음대로 죽이겠다는데 그것도 유익한 일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 자기에게 무슨 손해가 될 일이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누가 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가 알기에 사도 바울은 신앙 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신앙 인들에게 이러한 공통적이고 보편적이 요소가 같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은 무엇이며 현재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다고 여기는 신앙은 또 무엇입니까? 두 신앙이 같아야 된다는 것이 옳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우리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런 신앙 고백이 즐겁게 부담 없이 술술 나와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죽는 것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이 믿음을 확장시켜 봅시다. 히브리서 11:13-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이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니 하늘의 본향, 하늘의 성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죽어도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가 신앙이 없어서도 그러하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온통 죽음 안에서 갇혀 있는 식으로 사는데 이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워서 푹 삶겨있습니다. 마치 삼계탕처럼 살갗이 하늘하늘해졌습니다. 이들은 맨 날 주장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롭게 하면 보복이 77배나 갚아준다. 나는 내가 지킨다. 나는 죽으면 안 돼" 같은 의식입니다. 이 라멕의 고백을 성경은 가인 계통의 고백으로 소개하지만 우리가 듣기에는 참으로 친숙하게 내가 하는 고백처럼 정답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우리아 장군은 아내도 빼앗기도 심지어 자기 목숨마저 다윗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집안도 빼앗기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다 빼앗긴 셈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아가 안 죽도록 조치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아가 죽은 것을 확인한 다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찾아가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아를 볼 때에 대단히 억울하지 않습니까? 세상 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큰 낭패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일이 찾아들면, 우리는 무너져야 하고 부서져야하고, 깨져야 합니다. 분명 우리 속에는 안 깨어진 게 있고 안 부서진 게 있고 안 무너진 게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 우리아를 보고 아벨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냐에 감격해야 합니다. 남의 일로 보지말고 말입니다. 라멕 처럼 굴지 마세요.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시다.
도마는 부서진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실존은 지금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서 교회 부흥이나 추구하고 기도해서 한 건수 올리는 것이 신앙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라멕처럼 오래 살고 싶고 안 죽고싶어서, 남보다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신앙의 티를 내는 종교적 몸부림에 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부서지면 안 돼, 무너지면 안 돼"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런 불 신앙이 가짜 신앙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도, 교회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진짜 신앙을 원하십니까? 죽음조차 능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여호와를 부를 때 그 뜻을 알고 불렀습니까? 십자가의 피의 위력을 알면서 십자가를 쳐다봅니까? 하나님, 이제부터는 죽음조차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즐거이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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