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1-5 /아담의 이름
아담의 이름 2001년 11월 11일 19강 본문 말씀: 창세기 5:1-5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사실입니까? 사람이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 확실한 일입니다. 사람이 상대방의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사람이다"고 분명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저 사람은 마치 내가 사람된 것과 똑같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즉 내 부모가 나를 낳았기에 내가 생긴 것처럼 저 사람도 나처럼 그의 부모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상의 지극히 당연한 생각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있어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을 그대로 적용시킨다는 겁니다. 과연 이 인간 이해가 옳을까요?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결국 "인간의 조상의 조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난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닌 것에서부터 인간이 출현될 밖에 없는 뭔가를 끌어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를 나와 닮은 우리 부모를 끌어와서 원인으로 삼듯이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버렸다고 한다면 이는 우리 부모가 나를 만드신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말로 들리게 됩니다. 우리 부모가 나를 만드신 것과 같이 인류의 조상은 인류가 아닌 것이 낳아서 생긴 것이 되어야 합리적인 설명처럼 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류가 비슷하게 생겼다는 그 짐승은 또 어디서부터 나왔겠습니까? 물로 그 윗대의 부모로부터 나왔겠지요. 그러면 그 짐승의 부모가 되는 윗대 짐승은 또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물에서 뭍으로 올라온 종류라는 겁니다. 조류에서 파충류로, 파충류에서 포유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조류는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원생동물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식은 부모가 있어야 한다는 그 원리 밖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의 연속이지요. 그러면 그 원생동물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미노산이나 단백질과 같은 유기물질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유기물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질소나 탄산가스 같은 무기물질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무기물질은 어디서 나왔다고 봅니까? 그것은 태초에 천지가 발생되면 소립자들이 뭉쳐져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소립자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다고 봅니까? 그것은 에너지의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춤을 쳐서 생겼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에너지는 없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변화하고 영원히 요동친다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납득이 되는 식으로 나가보자는 생각이 이런 고리를 형성시켰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식의 설명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에 방금 제가 말한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추세입니다. 결국 인간이 자신을 파악하는데 있어 자신이 이해되는 한계 안에서만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해석이 거부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인간 해석의 절정은 하나님이 직접이 사람이 되신 사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비합리적이라는 인간들이 도저히 믿으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발생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인간 이해와 하나님의 인간 이해가 정면 충동한 그 현상에서 터져 버린 사건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 단지 그 창조 과정에 대해서는 우리 몫이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구체적인 하나님, 즉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추상적인 하나님일 뿐이다. 연상과 연상의 사다리 끝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라고나 할까요? 연결하고 연결해 나가면 결국 신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식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사람을 해석하는 것은 엉터리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정말 인간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참 인간으로 핵심으로 보는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 겁니다. 이점을 빠트리고 무슨 해석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삶은 죽음의 삶입니다. 즉 인간은 그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주장하신다면,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라는 것도 같이 믿으면서 예수 믿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보는 안목도 같이 받아드리면서 "저는 예수님을 진짜로 믿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서 "진짜 죽어야 되는데 왜 아직도 살아 있노, 이 왠수야. 아 모든 것이 다 은혜구나"하는 심정이지요. 욕심은 살자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죽고자 하는 데서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이 잘못은, "내가 교도소 안에 있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망가졌다"고 여기는 정신입니다. 요즈음 사형 폐지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데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남에게 패배했다고 여기시면 안됩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으나 진정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기능과 위치에 있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실상 산 사람입니다.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님도 사형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가장 밑바닥에서 사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 자신과 인간을 보는 것이 옳은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2절에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을 때는 그냥 낱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긴 내용으로 살아야 될 운명도 함께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닌 운명이 무엇입니까? 3-5절까지 나옵니다.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즉 생명을 배태하고 낳고 그리고 본인은 죽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해석해 버리면, "나 자식 갖고 싶어 자식 낳고 사실 안 죽고 싶은데 살다 살다 힘이 빠지니 그냥 무너져 버리는구나"라고 탄식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는 식으로 해석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분인 예수님의 생애에서 볼 때에, 참 사람되시는 그 분은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아담이나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사역입니다. 즉 '사람'이라는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로마서 5:14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여기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처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을 보여주는 표상이라는 겁니다. 표상이라는 말은 아이콘이라는 뜻입니다. 즉 태극기 문양은 한국은 대표합니다. 태극기가 얼마나 커야 온 한국 땅을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제 경기에 나가는 선수의 가슴에는 태극기 아이콘이 그려져 있는 명찰을 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라고 이름지어진 그 아담은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요 아이콘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그 사람이 담당할 사역이요 운명이요 역할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2-3절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이름을 짓는 일과 4-5절에 나오는 아담이 자식을 놓고 이름을 짓는 행위가 같은 창조적인 사역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줄 때 이미 더불어 주어진 사역입니다. 창세기 32:27-2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은 좋든 싫든 이 운명대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마는 이 이름은 그가 죽을 때는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무슨 이름만 남습니까? 주의 이름만 영원히 남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 이유가 골로새서 1:15-17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여기에 보면, 모든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즉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영원히 높이게 하기 위해 창조된 겁니다. 심지어 아담이 하나님께 받았던 '사람'이라는 이름마저도 말입니다. 우리는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이름보다 영원한 아름다운 이름을 믿고 구원받는 겁니다. 주의 이름만이 영원한 겁니다! 영원히 찬양 받으실 만 이름은 오로지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뿐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그의 받은 사명도 사라지기 때문에 이름도 사라집니다. 전도서 9: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바둑판 위에 보면 많은 돌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들은 그 돌을 보면서, "저 돌들은 죽었고 저돌들은 살았다고"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둑판 위에서 죽었다고 죽는 것이 아니요 바둑판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이 바로 이 바둑판 위에 인생입니다. 성경에 보니 성도의 죽는 자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 땅에서 기어이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애써보지만 과연 그 삶이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일종의 장기판이나 바둑판과 같은 게임의 모습과 같습니다. 여러분, 겉 사람은 후패 해도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죽었지만 다시 새 생명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주의 이름이 담고 있는 운명이요 사역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사는 것은 내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지 종교을 하나 선택해서 가지는 식으로 교회 다니지 마시고 실제적 현실 속에서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