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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7:4-16 /심판 속의 노아강의창세기

심판 속의 노아 2001년 12월 30일 26강 본문 말씀: 창세기 7:4-16 7:4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7: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7:7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7:8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7:9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7:10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7: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7: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7:13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7:14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7:15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7:16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 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남들은 심판받는데 자기 혼자 구원받으면 기분 좋을 것 같습니까? 노아가 과연 통쾌한 마음으로 방주 안에 들어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낮부터 내린 비가 이 저녁 유리창에 슬픔을 젖셔 놓고서♪"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온종일 비가 내리면 온종일 집에 갇힌 셈이 됩니다. 밖에 나가 다른 친구를 만나다든지 공을 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픔겁니다. 사람들은 대인 관계 속에서 사는 맛을 느낍니다. 폐쇄적이지 않고 늘 열려 있는 가운데 온갖 경우를 만드는 재미가 있어야 사회 속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으로 인해 그 사회성이 깨져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나 이웃이나 동창들은 저 물 속에 수몰되어 버렸습니다. 이래도 기쁩니까? 노아에게는 이것이 바로 환란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생기는 환란입니다. 심판이 일어나기에 오로지 심판을 측면에서만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아픔입니다. 사도행전 14;22에 보면 성도의 가야 될 길을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즉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까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환난을 통과한다는 조건 하에 나중에 구원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당연히 환란도 찾아들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환란을 도리어 반기고 살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견디야 될 문제이지요. 어떻게 이 외로운 환란을 견딜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5절에 보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노아의 위대성만을 발견하면 안됩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봤기에 이 환란 가운데서도 다 준행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조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든 일은 노아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사실을 노아에게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기에 노아가 기꺼이 준행 안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착실하면 그 사람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칭찬해주는 그 사람의 인품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칭찬을 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 여기서, 노아를 높이면 안됩니다. 노아가 위대하고 노아가 훌륭하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노아 본인도 원치 않는 상황입니다. 노아 방주와 심판을 통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이 되게 성실하고 꾸준하시다는 겁니다. 감히 말씀드리는 건데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한 칭찬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 14-16절을 통해서 알아봅시다.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 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자, 그동안 지면에 있던 숱한 짐승과 동물들이 있지만 모두다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암수 한 쌍씩 뿐입니다. 그동안 많은 참새들이 공중을 날았지만 그 모든 참새는 다 사라지고 오로지 한 쌍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많던 코끼리 떼가 있었겠지만 모두 다 사라지고 오직 한 쌍의 코끼리만이 방주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모두 다 한쌍 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가정 외에 어떤 가정도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모두 대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의 대표자들입니까? 각자 위대해서 대표자들입니까? 노아가 진정 위대해서 대표자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과 구원을 증거할 대표자로 삼기 위해 이들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이 일은 마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때 그 상황과 같습니다. 창세기 1:24-25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셔서 이 세상을 조성했습니다. 이제 심판 후에도 이 원칙과 이 능력을 그대로 발휘하시고자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방주 안에 있는 노아라는 입장에서 자기가 이 책무를 떠맡는 식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걱정이 늘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이 많은 짐승들을 책임지고 먹이고 번성시키지. 행여나 암수 한 쌍 중에서 혹시 어느 한쪽이 죽는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의 창조를 내가 깨뜨리게 되니 이를 어떡하나?"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방주 안의 세계는 곧 천지 창조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내주하는 세계입니다. 그 증거가 16절 끝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주는 노아가 만드는 자기 세계가 아닙니다. 옛날 하나님이 창조력을 발휘했던 그 창조의 역사를 계속해서 적용시킬 작정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믿고 감탄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각자 한쌍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로 불어날 것입니다. 결코 노아의 솜씨로 그렇게 되리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노아는 단지 이미 하나님이 내주한 세게 안에 하나님에 의해서 동참케 된 것 뿐입니다. 종이란 그저 시킨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자신이 책무를 떠맡으려고 하지 마세요. 바로 이러한 마음 가짐으로 인해 이미 구원받은 자는 그 환란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그 당시의 구원받은 자의 대표자라면 예수님 시절에는 12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역시 환란 속에 놓이게 됩니다. 요한복음 15:19-21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미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구원받은 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당했던 환란과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도 같은 환란을 받았기에 종도 같이 그런 수모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세상 사람들로 죄인 취급받았잖아요. 바로 그런 외로움과 오해를 마땅히 받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6:33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역시 부족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뒤에 남은 제자들은 고기잡으려 갔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창조력은 방해받을까요? 중단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고기잡는데까지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번 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의아해서 되물으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결정적으로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네가 네 멋대로 다녔지만 이 후에는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환란 염려보다 예수님의 고유의 창조력은 중단없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아직 자기 위치를 잡지 못하고 옆에 있는 요한을 가르켜 말하기를.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니 예수님은 다시 따끔하기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아 어떻게되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즉 너는 네 할 것이나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과업 달성이라는 의식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에 세상을 그리워하지 못하는 환란을 겪으면서 하나님 나라로 골인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고 인간 찬양에 열중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충실한 종으로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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