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8:1-12 /노아의 사명
노아의 사명 2002년 1월 6일 27강 본문 말씀 : 창세기 8:1-12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칠월 곧 그 달 십칠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 반감을 갖기 쉽습니다. 전혀 하나님 답지 않는 횡포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어떤 마음이며 죽일 때는 또 어떠한 마음입니까? 이 두 마음 사이에 어떤 상충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뒤죽박죽이 되면 우리는 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심 푹놓고 의지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심판없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심판을 바라보니 이런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안 해야 될 행동을 왜 하시느냐 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이 세상을 피조물이 존재하는 세계로만 간주해서는 아니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세상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저는 마태복음 3:12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자기의 타작 마당'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시골에 가면 보통 마당이 넓지요. 거기에서 고추를 늘어놓기도 하고 콩도 말리지요. 어쨌든 이웃집 사람들은 무엇을 늘어 놓던 관여할 사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타작마당'이기 때문이죠. 이 세상은 하나님의 타작마당입니다. 알곡을 어떤 식으로 골라내든 가라지를 어떤 식으로 골라내어 불쏘시기를 하든 전혀 관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치가 그대로 이 홍수 심판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시편 29;10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홍수 심판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요? 예, 왕의 자격으로 홍수를 이르켰다는 겁니다. 홍수 때에 왕다운 면모를 하나님이 보이셨다는 겁니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 위에 세상을 지휘하시는 왕이 엄연히 존재함을 노아가 증거해야 하는 겁니다. 즉 "세상 사람들아 영원한 왕은 없어!"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자연물과 인간만의 세상이야"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홍수 심판을 이르킨 겁니다. 제가 이 세상 학문들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도무지 왕이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서 그런지 누가 더 잘났느냐 못났느냐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왕을 제대로 잘 섬기세"라는 의식을 철저히 저주합니다. 일단 왕적인 요소를 다 죽여놓고 학문을 출발시킵니다. 이 태도가 우리의 본성을 부합됩니다. 성경과 정반대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속성을 구체화 시킨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이스라엘 왕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분류되어 도리어 사람들은 그를 없에 버리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신 여호와부터 노아가 어떤 사명을 받았는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오늘날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주와 이탈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람이 평생 살면서 제일 괴로울 때가 이별이나 이사할 때입니다. 떠날 때입니다. 왜 이별하는 것을 인간은 슬퍼합니까?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왕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더욱 더 왕답지요. 구원의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할 자를 자꾸만 이별하게 만드는 인생을 살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그러하지요. 자기의 본토와 아비 집을 떠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직업과 친척을 다 떠났습니다. 여러분들은? 기존 교회에서 떠났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참 신자입니까? 저는 기존 교회를 떠났다고 참 신자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기 보다는 기존 교회에서 자신이 당했던 자존심을 보상받기 위해서 기존 교회에 대항해서 싸우는 식은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왕되심에 근처도 안 간 마음가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왕되심으로 이사한 사람같으면, 오로지 하나님만이 진정 왕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야지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존심을 신봉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작용한 자가 아닙니다. 성질나서 "이 교회 아니면 교회 없나"하는 식으로 반항한 겁니다. 교회 옮긴다는 것은 자기 애인 따라, 남편 따라, 아내 따라, 취향 따라 옮길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저에게 예수님이 저의 왕이라는 것이 저의 마음을 얼마나 편하게 하는지요"라는 정신 자세와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어느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지옥간다. 그러나 주 예수를 믿는 자는 천국간다."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무시할 수 있는 '주'라는 한 단어가 지닌 무게를 느껴야 합니다. 즉 "나의 임금으로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흔히들 보면 예수님 앞에 '주'의 의미를 잘라내 버리고 그저 '예수'만 쥐고 연구하려는 자들이 많이 잇습니다. "어떤 자이든 인간 위에 군림하는 왕을 없어야 우리가 신이 된다"는 주장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노아는 두 종류의 새를 날려 보냄으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새는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이 방주에서 떨쳐 나와야 되고 이탈해야 한다는 것을 각오한 겁니다. 하나는 까마귀이고 다른 새는 비둘기입니다. 기존의 것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노아의 일기장 속에는, "내가 뭘 한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순차적으로 조절해 주시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나간 흔적만 들어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철저한 시종의 모습입니다. 물이 착착 감해지니 거기에 따라 합당한 행위를 노아가 취합니다. 결코 서둘지 않습니다. "하나님 뭣하십니까? 저는 육지가 그립습니다"라는 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이런 투정을 부린다면 그는 하나님의 왕다움을 놓치는 자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가 곧 이어 다른 새로 교체시켰습니다. 그것은 비둘기가 장차 노아의 사명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비둘기는 세 번씩에 걸쳐 노아가 보내게 되는데 첫 번 비둘기는 그냥 돌아오고, 두 번째 비둘기는 감람 잎사귀를 물고 오고, 세 번째 비둘기는 새 땅으로 날라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즉 이 비둘기는 방주 속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대표해서 앞서 구원의 세계를 여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노아의 임무와 같습니다. 물의 저주 속에 잠긴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원의 소식은 앞으로 노아가 담당할 몫인 것입니다. 노아가 여기서 새로운 사실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되심이 단지 저주스러운 심판의 행위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심판 속에서 구원을 열어 주시는 그 행위 자체도 또한 왕 되심에서 나온 행위에서 나왔다는 점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 하실 때도 왕이지만 구원하실 때도 역시 왕이시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까마귀는 그냥 왕래할 뿐이지, 아무런 정보도 노아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즉 노아는 까마귀 같은 사명은 담당할 수 없습니다. 앞서 새로운 세상의 정보를 앞서 전달하는 것이 노아가 지닌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오셨습니다. 즉 새 세계에 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겁니다. 그러면 왜 심판에 있어 하나님은 물을 사용하셨습니까? 창세기 1:9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땅 만드심은 그냥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물 속에 잠기도록 땅을 만드시고, 그 위에 덮인 물이 열어 제친 그 범위 내에서만 땅이 되게 하시는 식으로 땅을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 하는데도 왕이신 하나님은 그 왕적 법칙을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즉 심판 속에서 있는 자를, 심판이 철회되는 식으로 구원하시되 단 그 저주를 철회 하는 그 범위 내에 있는 정해진 인간에게는 혜택이 돌아가도록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건방지게 "하나님, 당신 사랑이 많다며? 그 많은 사랑 나에게 주어서 나도 구원시켜 줘 보란 말이야"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자신이 저주 속에 잠겨 있음을 당연히 여겨야 구원이 오로지 왕되시는 분의 은혜로운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비둘기 같은 마음입니다. "방금 저는 무서운 저주로부터 벗어났습니다"라는 환희가 있어야 제대로 하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왕되심을 물의 심판을 통해서 느꼈습니다. 이제 그 왕께서 우리에게 사명까지 부여한다는 사실마저 받아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