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8-17 /무지개 언약
무지개 언약 2002년 1월 27일 30강 본문 말씀: 창 9:8-17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사람 사이에서 주고 받는 일 같은 것은 상대방에게 일단 물어 봐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자기 세계에 뭔가 밀려 들어오면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내세우시는 언약은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세워버립니다. "다시는 물로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물론 내용상은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좋은 일을 하면서 왜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하시는 겁니까? 왜 그 좋은 일에 우리 인간의 공로가 못 들어가게 막으시는 겁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좋은 내용의 일을 우리 인간에게 통고를 일단 해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기쁘게 수용해서 그렇게해서 천국에 가게 된다면 천국 가서도 우리들의 위신도 그대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천국 생활도 신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면 천국가서도 우리 인간들이 챙길 위신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제안도 일단 용서받을 우리들의 허락을 맡아서 용서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이런 튕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아는 것과 신앙이 차이가 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위신마저 챙기면서 하늘의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챙기겠다는 이러한 완악한 마음이 다 깨어져 버린 상태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마음 속에 들어오는 쪽쪽 내 속의 자비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일방적 언약을 내리시면서 언약의 증표까지 남기십니다. 우리에게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무엇을 주게 되면 우리는 기분이 나빠서 성의없이 받기 일 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하고 하시면 우리는 퉁명스럽게 "고맙수"라는 정도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그냥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증표를 남겨버리면, 그 증표로 인해 새로운 예속 관계가 만들어져 버립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녀가 서로 상대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여자 쪽에서 말하면, 남자가 말합니다. "그럼. 나도 너를 사랑해" 그러자 여자가 반지를 꺼내면서 "이 반지를 늘 끼고 다녀야 돼. 이것은 사랑의 증표야"라고 하면 갑자기 남자쪽에서 긴장을 합니다. "아니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말만 주고 받아도 되잖아"하고 반항합니다. 그러자 여자는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되받아 칩니다. "아니, 내가 주는 사랑의 증표가 부담스럽다는 말이에요? 나 말고 다른 여자를 사귀는데 이 증표가 방해가 된다는 말이예요?" 이처럼 증표가 제공된다는 것은 증표를 받는 쪽이 주는 쪽에 영구히 매이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되는데 왜 꼭 증표를 남기시면서 그것도 하필이면 무지개 징표일까요? 그 내막을 알기 위해서 이 본문 말고 하나님께서 증표와 더불어 언약을 내리신 경우를 조사해 봐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7:10-11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언약의 표징이 인간의 신체에 직접 새겨지게 됩니다. 창세기 9장에서의 징표는 하늘과 땅을 이어지는 자연 현상 중의 하나인 무지개에서 차용되었는데 창세기 17장에서는 개별적 신체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점을 알아야 창세기 9장에서의 무지개 징표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방금 출생한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버리는 것은 곧 이 아기의 출생의 근원이 부모의 육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징표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육체적 출생과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무관하면서 이 아기는 태어난다 것이 기존의 육체 출생자들과 차별되고 이 차별이 곧 거룩한 백성됨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 가정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애굽으로 길을 떠납니다.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인도해 오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길에 나서자 마저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가 아니라 아예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아내 십보라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의 언약 증표와 위배되는 사항이 뭐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지요. 아내 십보라는 자기 아들이 아직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얼른 차돌을 취하여 아들의 생식기 끝을 잘라 모세의 생식기에다 냅다 던졌습니다. 그럴 때 모세는 하나님의 살해 의지로부터 놓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은 결코 인간의 육체적인 관계에서 나온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입술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좋아합니다, 존경합니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실제적으로 신체에 거룩의 증표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자기 아들을 간주해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증표라는 것은 언약이 내려진 후, 이러 이러한 점에서 과거와 완전히 단절 되었음을 말해주는 표시입니다. 만약 과거와 단절된 표시가 없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다루겠다는 겁니다. 이제 다시 창세기 9장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 증표로 남기신 것은 이 세계는 홍수 전과 완전히 다른 규칙과 질서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그 규칙에 모든 생물들이 어쩔 수 없이 예속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무지개를 사용한 것도 일리가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무지개한 비 온 뒤, 날씨가 활짝 개였을 때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입니다. 무지개가 피어올랐다는 말은 잠시 전에 한바탕은 물벼락이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물 벼락이 이미 과거 일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았다"는 약속의 내용과 잘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세상 안에서의 각 사람마다의 차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갖는 과거와 현재의 차별을 표현했기에 자연물로서 증표로 삼으신 것입니다. 언약의 증표에 관한 일관된 뜻은 출애굽기 25:22과 출애굽기 34:1에 나옵니다. 성막 안에 안치해 놓은 상자가 있는 그 상자를 증거궤라고 부릅니다. 과연 무엇을 증거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물론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께 받은 그 약속, 십계명을 말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증거하게 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모세가 받은 약속의 돌판은 백성들의 죄로 인해 깨어져 버리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4:1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 깨어진 돌판을 지상에서 다시 만들라고 하십니다. 물론 글씨 만큼은 시내산 위에서 다시 새기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깨어진 돌판을 대신한 두 번째 돌판이 들어가는 장소가 바로 언약궤, 즉 증거궤입니다. 일방적으로 언약이 주어질 때, 인간들은 이것을 남의 일로 여기고 지식으로 수용할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증표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언약을 받는 자라면 증표를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증표란, "과거의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처럼 꽁꽁 매여사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무지개를 보면서, "아 우리는 당연히 물에 빠져야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받게 되었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할례라는 증표를 하면서, "인간의 육신으로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거룩하게 될 수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있기에 이렇게 우리는 약속의 사람들으로 태어났구나"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모세를 통해 제공된 증표로 보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지만 증거궤에 묻힌 피로 인하여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구나"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증표를 요구하십니까? 하늘에 나타난 무지개를 사진으로 찍어 확대시켜 액자로 만들어 걸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겁니까? 돌판이나 다듬고, 우리 신체에다 포경 수술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대의 구원받은 증표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31: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법이 돌비석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표입니다. 이 새겨진 것을 하나님 앞에 나타낼 수 있다면 구원받은 자 입니다. 그러면 마음판에다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겁니까? 로마서 8:9에 보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3에 보면,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언약의 증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것도 마음 밖의 예수님이 아니라 마음 안의 예수님입니다. 고린도후서 13: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증표가 부담되십니까? 그 예수님에 예속되는 것이 싫습니까? 현대인들은 이 사회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살아야 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내 마음을 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임을!" 우리는 이런 자세을 가지면서 하나 만이라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구석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반지, 사랑의 증표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하나님이 피어주신 무지개가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직접 넣어 주신 구원받은 증표를 두고 두고 자랑하고 하옵소서.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이 있지만 천하를 줄 수 없는 이것을 최고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