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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9:18-29 /중보자성경창세기

창세기 9:18-29 /중보자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중보자
2002년 2월 3일 31강
본문 말씀 : 창 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

오늘 본문은, 노아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에 대한 실마리입니다. 일종의 '노아 Ⅱ'이지요.

창세기 9:1에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노아 Ⅰ'의 결론을 짐작해 볼 것 같으면, 노아 식구들은 이 새로운 신천지에서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았던 것이 될 것입니다.

'노아 Ⅱ'에 와 보니, 비록 그들이 숫자적으로 번창하고 확산되었지만 내용면에 있어 이들 노아의 후손은 결코 평탄치를 못합니다. 서로 서로가 다른 쪽으로 질주하게 됩니다. 같은 방주 안에서 구원 받았기에 그들의 남은 운명도 동일 하겠지 라는 것이 안일한 짐작이었다는 말입니다.

방주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끝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결승 지점에서 서로 다른 운명을 보여 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양적으로 팽창한다고 해서 그것을 좋게 만 봐서는 아니 되는 겁니다. 질적으로 개개인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나는 한평생 편하게 살았다. 목숨부지 하며 살았다"하는 것으로 인생의 가치를 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양적입니다. 그것으로 운명이 결정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양이 아니라 질을 보십니다.

그러면 같은 집안인데 하나는 저주받는 후손으로, 다른 하나는 영원히 축복받는 후손으로 갈라서게 됩니까? 누가 계기를 제공한 겁니까? 그 한 가운데에는 또 노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후손이 상호 다른 운명으로 갈라섰다면 여기에 노아가 책임 질 문제 잖아요?

여기서 노아가 지닌 언약적 위상이 드러납니다. 우선 신약 성경 디모데전서 2:5부터 먼저 봅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이 세상을 보는 구조가 어떤 구조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이 존재한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중보자를 끼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중보자도 하나 뿐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는 필히 먼저 중보자와 상관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거부하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인간들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중보자가 삽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중보자와 무관한 자가 있다면 그 자는 지옥보냅니다는 겁니다. 바로 중보자의 개입 여부를 놓고 인간들은 하나님께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못나서 또 중보자를 세울 피요가 있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중보자가 등장하게 되면, 인간들이 인간끼리 상호 단합할 모든 가능성을 영원히 파쇄되어 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중보자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갈라짐이 성립합니다. 바로 이 점을 인간들이 알기에 인간들은 참을 수 없이 하나님께 대드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같은 가정이나 친척이나 가족 속에서도 하나 되지 못하고 중보자로 인해 균열된 상황을 말입니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지옥갈 사람들은 모든 중보자의 흔적이나 위상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흐지부지 하는 쪽으로 생각이 돌아서지요. 그 일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과 함의 행위입니다. 가나안은 노아의 손자이고 함은 노아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과 함 사이는 부자지간입니다. 이 인간들은 노아가 갖고 있는 중보자적 입지를 의도적으로 부셔버립니다. 어떻게 부셔버립니까? 노아 입장에서 노아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 입장에서 노아를 평가해 버리는 겁니다.

즉 "분명 노아 할아버지, 노아 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자기 처신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것이 노아의 실상이다. 이 점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야겠다. 그렇게 해서 노아와 우리와는 별다른 인간이 아님을 이차에 분명히 해두자."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조라면 술에서 깨어난 후에 노아는 도리어 아들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애들아 이리 다 모여봐라. 내가 술이 과해서 너희들 앞에서 주책을 부렸구나. 신앙의 선조로서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내가 주의하마. 미안하다. 자식들 앞에서 신앙인이 보여주어서는 아니될 면모를 부여주어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태는 정반대입니다. "누구야. 술먹고 정신없이 벌거벗은 나를 보고 나의 수치를 공개한 자식이. 그런 자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마땅해. 그런데 누구야. 내 수치를 안보고 뒷거름 치면서까지 옷으로 내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려준 자식. 그런 자식은 대대로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지어다"라고 노아는 말했습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한번 따져 봐야 합니다. 중보자 인식을 제쳐놓고 따진다면 이러한 노아의 태도는 참으로 아전인수격입니다. 아니, 적어도 아버지가 되었으면 철없는 자식이 그런 행동을 했더라도 주의를 주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훈계하는 것이 좋은 태도가 아닙니까? 축복을 주어도 시원찮은 입장에 있는 부모가 함부로 거침없는 자식에게 온갖 저주를 하는 것이 과연 어버이다운 태도일까요?

그리고 지금 문제 발생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가나안이나 함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노아 자신이 술 퍼먹고 더워서 옷을 함부로 벗은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주스러운 일의 원인 제공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노아 본인입니다. 저주를 받으려면 노아가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왜 다른 사람에게 덤탱이를 씌웁니까?

그껏 노아가 손상된 아버지의 권위나 체면을 보상하기 위해 가여운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을 희생물을 삼은 것이 아닐까요? 참으로 부도덕한 처리 방법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방금 제가 드린 이 해석이야 말로 중보자라는 의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제거해 버릴 때는 충분히 호감이 가는 해석일 것입니다. 그리고 왠지 이 해석에 더 수긍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중보자적 입지를 노아가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노아가 술 깨고 난 뒤의 행위를 생각해 봅시다. 노아의 수치스러운 부분은 가려주었다고 축복을 내리고, 반면에 그것을 공개하고 동네방네 나발 불었다고 저주를 내리는 그 행위의 준칙은 어디에 토대를 둔 행위일까요? 우리가 만약 이 점을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입니다.

인간이라도 모두 한 통속이 되어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적 내용이 들어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저주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일부터 찾아가 봅니다. 마태복음 27:35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모습은 마지작 걸치고 있던 옷마저 빼앗겨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체가 된 채 십자가에서 맥없이 목숨이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이 온갖 모욕과 부끄러움은 누구 때문에 당하는 수모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죄있는 인간의 궁극적인 면면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죄있는 인간은 이런 대우를 받아야만 지극히 합당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수치는 그 당시 중보자로서 당하는 수치었습니다. "죄지은 너희들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존재인 줄을 너희들이 아는가? 내가 너희들을 대신 그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께"하시는 취지에서 십자가에서 수모를 당했습니다. 마치 껍질 벗긴 채 죽어가는 식용 개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왜 당신은 수치스럽게 돌아가셨습니까?" 바로 이 질문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게 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오래 다녀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 껍데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앞당겨 보여주게 된 사람입니다.

물로 노아보다 먼저 앞당겨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는 수치스러운 자신의 몸을 가렸습니다. 하지만 가려진 몸으로 죽었습니다. 수치의 가림이 소용없다는 점을 아담과 하와는 보여준 겁니다. 그 원인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은, 그 가려진 것마저 벗겨진 분입니다. 예수님이 아담과 일치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 자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구원의 정신이 들어있는 자로 판명됩니다.

노아는 그 자체로 위대하지 않습니다만 노아가 우리에게 전해준 그 구원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벌거 벗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방주 안에서도 갖고 있었던 수치입니다. 하지만 그의 수치는 그의 중보자적 역할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 중보자적 위치 때문에 같은 자식이라도 지옥과 천국으로 영원히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계시고 인간있으면 됐지 무슨 중보자가 필요한가?"

중보자를 인정하는 쪽에서 하는 말이,

"인간이 못났으니까 중보자가 필요하지"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서는,

"인간이 못나기는 뭐가 못나서 열심히 노력하기 나름이지"

중보자를 인정하는 쪽에서는,

"그러니까 너는 노아 홍수 심판의 의미를 모르고 있잖아"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서는,

"그점에서 고맙다고 하나님한테 좋은 마음을 갖고 있어"

중보자를 인정하는 쪽에서는,

"고맙다는데서 끝나지 말고, 왜 고마워야 무엇 때문에 고마워냐 까지를 알아야지. 고마움의 근거는? 고마움의 토대는? 고마움의 결과는?"

중보자는 인정하지 않는 쪽에서는,

"나는 얻을 것 얻어챙기면 그만이다."

중보자를 인정하는 쪽에서는,

"그러니까 남의 수치를 보고 '얼레리 꼴레리'하는 태도가 나오잖아. 즉 중보자의 토대가 없다는 것이 들통 났으니 저주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저주란 이처럼 중보자의 토대가 없음으로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셈과 야벳이 귀엽다는 것이 아니라 셈과 야벳이 담고 있는 구원의 취지가 이 우주에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의 취지가 누락되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주받는 운명으로 전락되는 겁니다.

중보자가 빠져 버린 자는 결국 '나'라고 하는 자기 자신이 최고입니다. 따라서 자기 외에 자기가 의존해야 될 특별한 존재가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함과 가나안은 노아의 처신을 놓고 노아를 평범한 인간으로 동일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노아만을 본 것이 아니라 노아가 담고 있는 구원의 정신을 부각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빠져 버리면 사실은 심판받을 그 대상으로 되돌아가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셈과 야벳은 뒷 걸음쳐서 노아의 수치스러운 하체를 가만히 덮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죄도 중보자의 은총으로 인해 구원받았다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술 깨고 난 뒤 이렇게 축복을 합니다. 26절에 보면,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셈에게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셈의 하나님'께 찬송한다는 겁니다. 이는 셈에게 이런 정신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뜻임을 대대로 분명히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창세기 24:27에도 나와 있습니다.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자기 주인인 아브라함에게 일관한 뜻으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는 장차 십자가 달리시는 메시야과 관련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까지에 이와같은 정신은 계속 이어지는데 바로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일관된 구원의 은총이 작렬하고 있음을 아브라함의 종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갈라디아서 3:27-29에 보면,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위대하고 실수 없는 자가 되어야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의 일을 우리가 덧 입어야 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로 옷입었으니라'라고 표현한 겁니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가 덧입어야 될 분이 더 소중하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신을 보다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보다 가치 있는 것만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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