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26-32 /약속의 아들
약속의 아들 2002년 2월 24일 34강 본문 말씀: 창 11:26-32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신경을 쓰면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말고라도 딴 데 신경쓸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한 것이냐 식으로 나아가지 마시고 "내가 누구냐?"를 점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열심을 내고 종사하게 되면 그 순간에는 "내가 누구냐"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열심히 일 하는 것으로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기면 아니 됩니다. 인간이 하는 일과 하나님과 연관시키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셈의 족보, 특히 아브라함의 어릴 때 가정사입니다. 전에 성경에 나왔던 족보는, 주로 누가 몇 세 때 자식을 낳았고 몇 세를 더 살다가 몇 세 때 죽었더라 하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나오는 족보는 거기에다 특별히 한 요소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그 곳을 떠났더라"라는 요소입니다. 이사를 간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중요시 여깁니다. 즉 아브람의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된 점을 들어서, "과연 인간은 무엇이냐?"를 파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가족이 이사 하는 사실과 지금 이 성경을 들여다 보고 우리가 과연 어떤 인간이냐 하는 점과 서로 연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얼마를 살다가 몇 세 때 죽었다'하는 사실만으로 우리 인간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떠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관점을 감잡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몇 세까지 살다가 죽었다'라는 사실을 통해서 인생이 어떤 존재인지를 대략적으로 알지요. 오늘 본문 28절에도 그것이 나옵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고 32절에 봐도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가정의 우두머리는 데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이지요. 그런데 하란이라는 형제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습니다. 그리고 나홀이라는 형제도 있었는데 이 형제는 조카하고 결혼하고 그냥 그 지역에 눌러삽니다. 거기에 비해서 아브람은 죽음도 아니요 그 고향을 눌러지내는 것도 아니요 그 지역을 떠나게 됩니다. 이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면서 자식없이 떠납니다. 30절에 보면,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없는 한 가정이 떠나기는 왜 떠납니까? 자식없는 채로 그 자리에 그냥 살 것이지 왜 떠나는 겁니까? 떠난다고 무슨 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떠났기 때문에 자식이 생겼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꾸하지요, "안 떠나도 생길 자식일 것이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고향을 떠나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자식은 너희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식하고 다르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자식이라면 다 같은 자식아닌가"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자식은 떠나야 생기느니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자식, 하늘의 자식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불임 부부 라는 장치를 마련하시고 그 가정을 그 고향으로부터 떠나도록 조치한 겁니다. 즉 이 불임 부부가 이곳에 살다가 저 곳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자식을 잉태케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을 알기 위하여 여기에서 잠시 갈라디아서 4장을 먼저 봅시다. 22절에서 28절 까지를 보게 되면,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하늘에 있어야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하늘에 있으려면 이 지상에는 어머니가 없어야 합니다. 지상의 어머니가 있으면 그 사람은 하늘 나라 못 갑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납득이 되든지 아니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사실을 그냥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 가는 자의 지상에 있는 어머니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에 참 어머니가 있다는 폼을 지상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즉 "내가 너를 천국의 사람되게 잉태한 어머니가 아니단다"라는 폼을 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래라는 부인이 잉태치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이런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한 여인으로 본 고향을 살면서도 얼마든지 불임여성이 되어서 천국의 자식을 배태하면 되지 않겠는가. 즉 하필이면 고향을 떠난 불임 여성이 되어야 꼭 약속의 자식이 배태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로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아브라함을 벗어나야 할 것이 단지 지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출생하고 자라왔던 그 모든 인간적이고 육적인 환경에서부터 철수하는 겁니다. 즉 대대로 내려오는 혈육, 그 자체에서 아브라함은 떠나야만 하는 겁니다. 원래 이름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법입니다. 만약 자식이 자기 이름을 임의로 바꾸겠다는 말은 부모의 고리를 끊는 것과 마찬가지 취지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가 나중에 사라라고 이름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여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름이 바꿨다는 것은 너의 운명과 장차 팔자가 다 바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인생이 되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새로 지으진 이름 자체가 담고 있는 그 내용이 그 사람의 남은 여생이 됩니다. 부모로부터 모든 관계는 절단되는 겁니다. 자, 이처럼 인간적인 요소가 없는데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뭔가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는 겁니다. 이름이 담고 있는 운명의 내용대로 말입니다. "이것은 내 것, 내 영역, 내 나라, 내 가족"이라는 것은 없어졌습니다. 단지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 그 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도와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계획 해 나가시는 일에 아브라함이 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점점 짧아지고 없어져 가는 겁니다. 투명 인간처럼 닳아져 버리는 겁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 밖에 남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위에 어머니를 갖고 있는 사람을 약속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약속된 사람은, 약속된 내용이 담겨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모든 것을 떠나 보내고 그 빈 것에 하늘의 약속으로 모두 채워져야 했습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브라함의 남은 인생을 채웠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남자 없이 태어납니다.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아내의 능력이나 자신의 생식 능력과 관련없이 한 아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태어난 자인가?"하고 말입니다. 아브라함 식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를 믿느냐?"하는 것이 되겠지요. 흔히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나 구원 계획을 잡아놓고, 거기에다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자기 계획의 달성하는 에너지로 사용하자는 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자는 점차 이런 수법이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떠남'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겁니까? 창세기 15:1-2절에 보니, "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속자로 엘리에셀을 내세웁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뜻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창세기 16장에 보니 이번에는 아브라함 아내 대신 아내의 여종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게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쫓아내라 그 자식도 약속된 네 자식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인간 쪽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지켜 보시면서 결국은 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약속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우리를 가져야 합니다. 약속이 우리를 지배해야 하고 약속이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오직 약속만 증거해야 합니다. 만약 약속 아닌 것을 증거하게 되면 그것을 믿는 자로 하여금 죽어서 엉뚱한 곳에 이르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결국 약속만을 최종 의지하게 됩니다. 이점이 비약속인과 다릅니다. 자기 스스로 약속을 붙잡고 구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나중에 결국에는 지쳐 버립니다. "아, 40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지금은 힘들어 더 이상 예수를 못믿겠다. 그동안 믿은 세월을 하나님이 천국에서 참작해 주겠지"라고 여기기 쉽상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애초부터 자신이 약속을 붙든 사람이기 때문에 약속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약속 된 분을 주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예상치도 못한 자식 이삭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라가 하도 기가 차서 장막 뒤에서 홀로 웃었습니다. 이 사실로 인해 그 자식의 이름이 웃음, 즉 이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 부부는 이 이삭을 볼 때마다 자신의 능력으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약속된 자식인 것을 두고 두고 인정할 수 있게 되지요. 웃음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참된 신자가 최종적으로 약속된 예수님을 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스스로 믿음을 만드는 식으로 신앙 생활하지 말게 하옵소서. 도리어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