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8-16 /세상의 형편
창 14:8-16 (세상의 형편) 세상의 형편 2002년 3월 24일 38강 본문 말씀 : 창 14:8-16 "소돔왕과 고모라왕과 아드마왕과 스보임왕과 벨라 곧 소알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과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왕과 고모라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하나님 믿는 아브람에게 날 벼락 같은 전쟁이 터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고요하게 놔두지 않는 겁니까? 아브람이 평소에 전쟁하고 싶어서 안달을 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와 헤어졌던 조카가 전쟁 난리 통에 잡혀 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사실 이 세상과는 별개의 사람으로 초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 신자들도 불신자와 더불어 생존 전쟁 한가운데서 놓이게 합니다. 이 전쟁을 거부한다면 마지막은 자살길로 접어듭니다. 정말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신자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현재 우리들이 처해 있는 그 전쟁의 내막을 밝혀주게 됩니다. 자기 몸 뚱아리 유지하기도 힘든데 왜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도 않는 전쟁에게 몰아넣어서 "너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라"고 강요하시는 것일까요? 큰 짐처럼 느껴집니다. 과연 신자에게 있어 왜 전쟁은 주어집니까? 에베소서 6:12에 보니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사도 바울은 엄청난 우주적인 전쟁까지 관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입니다. 신자의 눈에 영적 전쟁의 실체가 비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같은 신자이면서도 그런 영적 전쟁을 감잡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세속적인 전쟁에 너무 시달리다보니 내 몸과 내 가족의 생존이 급선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롯이 살던 땅은 정말 멋들어진 땅이고 큰 수확물을 내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동산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도 나도 그 땅에 대해 군침을 흘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돌아오멜의 왕과 세 왕이 합세해서 그 좋은 땅을 침범해서 그 승리를 했습니다. 그 승리의 댓가로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12년 동안 죽을 고생하면서 압제자에게 조공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13년째는 압제받는 다섯 족속끼리 연합 전선을 펼쳐서 14년째는 드디어 압제자에게 항거의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대패했습니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소설도 있고 영화도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조그만한 시골 학급에서도 나름대로 권력자와 지배받는 계층이 있어서 아이들은 그 안에서 생존의 규칙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가진 자, 힘 있는 자가, 없고 약한 자를 괴롭혀서 뺏아내는 이 생리가 사실은 전 사회에 확대되어 있습니다. 이 규칙 안에 우리 신자가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신앙도 지켜 내려고 하니 얼마나 견디기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힘들다, 힘들다만 탄식할 것이 아니라 힘들게 된 그 실체와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뭔가 노리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롯이 하나님 동산같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얼른 선택의 손이 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내부에 세상사람도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공통 요소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사실은 정신 문제입니다. 그들과 동일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의 권력체제에서 못 탈출합니다. 출애굽할 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구출받아야 될 자기 백성 히브리인들도 이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왜냐하면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권력층을 잘못 건드려서 자신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서 구원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소연하기를 저 모세와 아론을 좀 처리해 달라고 까지 합니다.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고방식 자체로부터 그들은 구원받아야 했습니다. 사실 모세도 젊을 때는 힘의 논리를 가지고 힘 체제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려고 했습니다. 자기 동포의 대한 애정과 의협심으로 애굽인을 쳐 죽였는데 이것이 도리어 자기 동포들에게는 성질 부리는 자로 비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인자가 되어 애굽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사도 바울처럼 악과의 영적 전쟁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자기 중심이 되어 버립니다. "나는 살아야 돼. 따라서 너는 내 앞에서 꿇어앉아. 나는 떠야 돼 따라서 너는 내 앞에서 망해야 돼"라는 식을 그냥 지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번씩 압제자가 큰 승리를 하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드디어 롯의 가족과 모든 재산도 이들 압제자의 힘에 의해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 믿는 가족으로 하여금 살벌한 전쟁의 피해를 보게 하시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될 것이지만 사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는 사고방식을 바꿔서 질문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이 무식한 불신자로 하여금 겁도 없이 감히 하나님의 자녀를 손대는 실수를 저지르게 하는 겁니까?"하는 질문으로 말입니다. 이 질문이 단지 약한 신자가 행세해보는 허세용 질문이 아닙니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입니다. 시한폭탄 같은 롯을 건드리면 누가 여기에 개입하게 됩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게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불신자가 큰 실수한 면이라는 말입니다. 화를 자초한 겁니다. 디모데후서 3:13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불신자 끼리야 자기네들 끼리 서로 못 이용해 먹어서 속고 속아서 같이 망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신자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신자가 그런 세속의 힘에 의해 위험스로운 지경에 처하면 하나님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은 그냥 살아 보겠다고 나서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거미줄 같은 생존의 규칙과 법칙으로 그를 곧장 묶어 버립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에 아브람이 개입하는데 아브람 입장에서 자기 조카 롯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구원해봤자 사고방식이 여전히 세속적이라 또다시 세속의 그물로 뛰어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가 산다"는 의식은 어치피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고방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구원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사기 당해 돈 날렸다고 해서 교회가 도와줘봤자 다시 돈을 최종 목표로 달려 갈 것이 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귀한 보혈의 피로 빼내준 대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개입할 때면 비록 다른 사람보기에 세속전쟁으로 보일 것이 뻔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영적인 전쟁을 벌리시겠다는 취지로 개입하시는 겁니다. 신자는 육적인 전쟁에서 못 벗어나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벌리시는 영적 전쟁의 군사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기를, 십일조하면 잃은 돈 다 찾는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또 하나의 세속 전쟁의 연장일 뿐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돈보다, 헌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전쟁이야 말로 교회의 헌금을 중심으로해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입니다. 네가 돈 사랑하는 그 사랑보다 예수님의 목숨 바친 그 사랑이 더 큰 사랑임을 증거하는 전쟁이어야 참된 영적 전쟁입니다. "남들은 돈, 돈 하면서 살지만 나는 주님의 사랑의 은덕으로 산다"는 고백으로 전쟁에 나서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것은 양이나 숫자의 전쟁이 아니라 질의 전쟁입니다. 시편 44:3-5에 보면,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전쟁이 앞당겨 온 것입니다. 최후의 전쟁은 이런 겁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구원받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 전쟁입니다.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생존의 전쟁에서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야 합니다. 그래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신도 어쩔 수 없이 붙잡을 수 없는 요소가 신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 아닙니다. 신자는 돈 때문에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신자에게 넣어진 예수님의 피의 고귀함 때문에 세속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전사가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기적적으로 전쟁에서 이깁니다. 이미 다섯 왕이 대들어도 두 번씩이나 깨어져 버린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에 대해서 아브람은 개인 집에 국한 된 일군들을 데리고서도 승리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조카 롯을 구출하는데 하나님이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미래의 전쟁 모델입니다. 최후에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와서 전쟁을 벌리는 것은 순전히 택한 자 만을 건져내기 위한 조치입니다. 우리가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겨냥해서 전쟁을 벌리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는 영적 전쟁 속에 놓여 있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돈 못벌린다고 스스로를 실패자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을 우리가 모독해서야 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고방식을 고치게 하옵소서. 나만 최고이기를 바라는 의식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날마다 더욱 크게 알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