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1-7 /하나님의 의
창세기 15:1-7 /하나님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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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5:1-7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
2002년 4월 7일 40강
본문 말씀 : 창 15:1-7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인간 세계에서 보통 종과 아들을 어떤 식으로 구분합니까? 종이란 현재 자기 주인과 부자 지간이 아닌 경우를 뜻하고 아들이란 현 주인과 자신이 부자지간이 된 경우를 말하지요. 즉 육체적인 혈육 관계가 성립되면 아들이요 그렇지 않고 직접적인 혈육 관계가 아니면 종입니다. 종은 어차피 타인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모두들 자기 중심에서는 종과 아들이라는 구분을 제각기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에 하나님도 인정하시겠습니까? 인정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를 종으로 봅니다. 그 가운데 아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종으로 봅니다. 무엇의 종입니까? 죄의 종으로 봅니다. 육체의 종이 곧 죄의 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가는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친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자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분입니다. 양자는 순전히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덕분에 얻어진 신분입니다. 이들의 전 신분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런 구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 누구의 종이 된다고 할 때는 반드시 인격과 인격의 관계로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데, '죄'라는 것은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된다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난처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죄의 종이라는 말을 거부하게 되고 거부하면 안 믿는 것이 되고 안믿으면 의인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나오는 말씀,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의가 되었다"는 말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마치 죄의 종을 수용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이렇습니다. 의라는 것은, 행동하는 주체자가 의로운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의 당사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속성입니다. 달리 말해서, 의라는 것은 반드시 '행동한다'라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이 "너는 의인이다"는 말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요?
소위 알게 쉽게 설명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착한 성품을 지닌 분입니다. 여러분의 그 착한 성품 가운데 하나를 사용하시는데 어디다 사용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다 한 번 사용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약속의 믿는 이 착한 일은 누가했지? 옳지 네가 했구나. 이런 착한 일을 행한 당사지니까 내가 너를 의인이라 불러줄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방금 제가 설명한 것이 전형적인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식으로 의인된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죄의 종이 아닌 자입니다. 아니, 죄의 종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도 행할 수도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다"고 나온다면 이 사람은 죄의 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죄의 종은 무조건 죄만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종되게 한 그 주인의 파워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의 종이었던 자가 의의 종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 경우에 애초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의 공로는 99%이지만, 그 예수님을 믿게 하는 나의 공로는 1% 정도로 추가시킬 때 모든 것이 완성이다."고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도 내가 안 믿어주면 예수님도 나를 구원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뭔가 추가적인 인간 행위가 있을 때만 구원이 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로마서 7:17-19절에 보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 자체를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선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한 능력이 없고 그저 악으로 전환시킬 능력이 있다는데 무슨 우리에게서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할 때에 그 앞에서 반드시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너희들은 죄의 종이었는데"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8:15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의 힘으로 종에서 자녀로 전환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유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바는, 아브라함이 어떻게해서 의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 상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드러내 주십니다.
1절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인데 이러한 소개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속에 들어 있는 말을 내뱉게 합니다. 아브라함을 말하기를, "하나님, 이번에는 뭘 주시렵니까?"리고 화답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기 소개에 관해서 궁금합니다. 고대 민족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방패도 중요한 승리 요건에 해당됩니다. 상급이라는 것은 전쟁통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의 방패와 상급"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은 너는 어디를 가든지 승리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옛날의 전쟁은 신들 끼리 벌리는 전쟁의 대행체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전쟁에 관여하겠다는 말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은, 이쪽 신이 저 쪽보다 더 우월한 신이라는 뜻이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바벨론 군대에게 함락을 당했는데 그 때 바벨론 군대는 이스라엘 성전에 있었던 제사 기구같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네들 창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이는 바벨론의 신 마르둑 신이, 이스라엘 신 여호와보다 더 세다는 뜻으로 간주하라는 겁니다. 신이 신을 포로잡은 격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포로잡혀 왔던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서 바벨론의 모든 권력층이 놀아난다는 것은 결국 누가 누구에게 패배했는지 분간이 안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전쟁에서 우월하고 승리가 되는 신이 됩니까? 그것은 정의롭고 의로운 신이어야 합니다. 전쟁의 구실은 이러합니다. 정당하고 정의로운 편이 불의하고 악한 적을 징벌한다는 차원에서 진행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일상생활에도 여전히 지배하는 원칙입니다.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에게 대들때 꼭 언급하는 것이 바로, "우리는 의롭고 너희들은 악하다"는 논리입니다. 무지막지하게 짓누르는 힘에 대항할 수 있는 바는 바로 의로움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 가진 인간은 비록 악할지라도 정의로운 신 만큼은 매사를 정의의 색채가 짙은 쪽에 편에 서서 도와준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말은 그만큼 적보다 의로웠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방패 이야기로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의인이다는 말로 매듭지어십니다. 의롭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도와줄 수도 없고 도와줄 리도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승리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의 승리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째서 믿으니 의가 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행함이 개입됨이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을 알려주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털어놓는 속내를 이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상속자가 없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자기 의사를 털어놓고서는 후손이 없기에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네 몸의 날 자가 너의 후손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자, 여기서 아브라함이 전혀 생각조차 해 볼 수도 없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의인되게 하십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의견이나 행위가 개입된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로마서 8:3의 예를 들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죄의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의인이 되고 어떻게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의견, 힘, 애씀의 아이디어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참 아들이 개입이 있어야 성사될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 개입합니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은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규정시켰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육신은 그 자체가 죄였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죄의 종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까? 바로 이 아들의 영이 임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15에서 말씀드린, 그 '아들의 영'입니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제시한 행위란 기껏 종에 불과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내세우는 의라는 것은 기껏 죄의 종으로서 드러내는 가짜 의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다른 인물을 개입시키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시는 법칙과 동일합니다. 과연 아브라함에게 개입된 인물에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일부 섞여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의 하늘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별의 숫자를 세게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그 수많은 별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행할 수 있는 행함의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주시는 은혜란 인간의 자기 기대치의 수준에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해도 그 많은 별을 다 셀 수 없듯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은혜라는 것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엄청난 규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뜻을 꺽고 하나님이 계시한 계획과 약속하신 바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아브라함과 다른 적들과의 차이나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는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된 인물과 관련지어서 판정받는 의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 성도가 의로운 것은 예수님이 의롭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와 비성도가 차이나는 것이 무엇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의 의는 시시하게 여기고 자신이 한 건수 올렸다고 여긴 의는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 내었다고 여기는 의를 거두시고 히늘의 별처럼 도저히 다 헤아릴 수 없이 우리 한계를 벗어난 그 의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 하면서도 자기 행위에 비중을 두는 버릇을 고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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