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6:1-14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6:1-14 /감찰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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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하시는 하나님
2002년 4월 21일 42강
본문 말씀 : 창 16:1-14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후이었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이 말씀은 어느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일처럼 보입니다. 어떤 가정에 아들이 없어 고민하니까 안주인이 이런 제안을 먼저 합니다. 자기에게 여종이 있으니 남편이 그 여종과 동침하여 아들을 생산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종이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종은 임신을 안한 여주인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자식을 얻어서 안주인의 권위를 찾으려는 안주인은 화가 나서 여종을 더욱 학대했습니다.
참다 못한 여종은 도주를 해버립니다. 그 때 길에서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는 여종에게 말하기를, "도로 집으로 가서 여주인을 섬겨라, 네와 네 자식은 내가 보호해 줄께"라고 했습니다. 여종이 놀랍고 감사해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이곳까지 다 지켜보고 있었구나"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자식에 대한 욕심과 임신했음으로 인한 교만과 거기에 대한 질투가 어울려 있고 게다가 신분상 혼란이 올까봐 사전에 방비하고자 하는 사회적 권위 의식까지 혼재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현재 건전한 가정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 눈에는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성경에 담겨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감찰하시는 기준을 이 가정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찰하신 바에 의하면 하나님 백성의 씨는 따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감찰한다는 것은 조사하고 지켜 보신다는 말인데 이것은 천국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그 기준과 그 식으로 이 세상 사람들을 대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천국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천국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같이 적용시킨다는 말입니다. "내 씨가 아닌 것은 천국에 못들어 간다"는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감찰하시고 지켜 보신다는 겁니다.
왜 이 사실이 선행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세 사람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종 하갈부터 보면, 하갈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의 행위를 정당화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갈과 그 후손을 키워주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어떤 씨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냐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 하늘의 별 만큼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의 작업이 아닙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도 번성시키고자 합니다. 알곡도 번성하지만 더불어 가라지도 번성케 하시려는 겁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은 "누가 천국의 씨가 될 수 밖에 없느냐"를 계속 말씀하시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하갈은 하나님은 순전히 자기 편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하면 사실 아브라함 부부의 오해로 인해 생긴 같은 오해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오해를 그냥 두고 보는 걸까요? 사전에 훈계에서 아예 그런 오해를 낳지 않도록 방지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씨의 원천을 계속해서 인간에게 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즉 어떤 인간이 바른 인간으로 변모에서 거기서 나온 씨를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씨로 간주하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잘못은 잘못대로 그대로 자행하게 하시고 그 잘못된 오해와는 별개의 씨를 마련해서 그 씨로 인해 오해하고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씨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것을 알게 하시는 방식이지 결코 거룩한 씨를 인간들의 달라진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갈을 아브라함 가족과 다시 합류시키는 것은 모두다 다 같이 문제점이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천국의 씨는 그들의 자질로서 결정되는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따로 마련해주는 씨가 누구를 통해서 나오느냐로 결정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거듭난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바르게 살겠습니다"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 따로 있구나"를 고백해야 합니다.
8절에 보면,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갈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분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아시기에 찾아오신 겁니다. 즉 여종이라는 신분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일에 있어 중요한 한 역할을 담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는 네 위치를 이탈하고 있으니 도로 제 자리로 돌아가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차원입니다. 그런데 하갈을 전체로서의 자기 위치를 모르고 그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는 점을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갈처럼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다 아신다면 절대로 나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지 않을 거야"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자기 입장에 생각하고 전체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을 전체 속에 도로 집어넣으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하갈은 개인적인 학대를 피해서 전체적인 구조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일부로 찾아와서 하갈을 다시 전체적인 구조와 매치가 되도록 집어넣고자 하는 겁니다. "네 씨를 번성케 해줄게. 하지만 네 씨는 고생을 죽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을 지금 하나님께서 장기 말처럼 사용한다는 것이 대단히 기분 나쁘게 들입니까? 그러나 신자에게는 도리어 이런 상황이 대단히 기쁘고 안심되는 일입니다. 황공스럽기까지 합니다.
창세기 17:15-16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래가 진정한 여주인으로 행세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개과천성이 아니라 엉뚱하게 태어나는 아들 이삭의 덕입니다. 즉 아들이 부모를 약속된 부모되게 하는 겁니다. 부모가 자기 아이디어로 없던 자식을 생산함으로서 약속된 부모 노릇을 하란 말입니다.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은 여주인 사래의 구박에 의해 추방된 여종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부로 찾아오셔서 도로 여주인와 합류하게 해줍니다. 마치 한 가마솥 안에 한데 모아두려는 겁니다. 이로서 사래의 행위나 여종과 동침은 아브람의 행위나 모두 하갈과 같이 자기 생각만 했기에 나온 한 통속의 행위들임이 보여줍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기를,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내가 이제부터 바르게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의인되는 것 뿐입니다. 흔히 설교듣고 그것대로 다 지키려고 하는 것을 큰 잘못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효과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그것을 듣는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반성 행위의 효과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오해합시다. 우리 편하게 삽시다.
우리들의 반성의 배경에는, 자신의 한스러움이 작용하게 마련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사래처럼 말입니다. 자식을 못낳아서 여주인 값을 못하는 것에 대한 한맺임을 사래는 안고 살아가는 겁니다. 만약 이런 여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를 할까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서 기어이 자신의 한을 풀려고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애꿎은 여종이 덜렁 임신하게 만들었고 또 그 여파로 학대받고 결국 도망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까지 몰아 넣었잖아요. 이 모든 것이 여주인인 사래의 한으로 야기된 사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갈을 도로 원상복귀 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약속된 만민의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성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이삭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사라야, 네가 네 되는 것은 이삭을 일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 때문이란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다. 가마솥 안에서 온갖 인간의 오해와 갈등이 들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밑에서 이삭의 효과가 빛날 것이 아닙니까?
여자에게는 남자와 한 몸체가 되는 것을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한다는 점을 남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만약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여자는 그 남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배신감을 느낍니다. 물론 나중에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된다고 남자들은 생각할 줄 모르지만 부정을 저지른 남자로부터 사과를 받아낸다고해서 처음에 그 남자와 한 몸이다 생각했던 그 기쁨과 감격이 보상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여자나 남자나 항상 자기 위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범죄한 이후의 인간 세계의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들이 예수믿고 바르게 산다고 외쳐도 결국 자기 입장만 변호하고 자기 정당성만을 큰 소리로 질러대는 그런 오해의 상황만 연출될 뿐입니다.
따라서 이런 저런 사람 모두 한 가마솥에 넣고 그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만의 능력만이 작동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6장의 이야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21-23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즉 하나님은 전체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갈이 난 자식은 천국에 못들어가고 사라의 몸에 태어난 자식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우리의 공로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전체적인 계획에 보면 원래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겁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하갈의 씨든 사라의 씨든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받는 것은 하갈의 씨가 아니고 사라의 씨라면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는 누구 덕분입니까?
당연히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갈을 감찰하사 다시 사라의 집으로 합류시킨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님의 개입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우리의 기본적인 욕망을 지적하는 그 의의도 같이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늘 정당화 하는데 열중합니다. 이런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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