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 1-14 /할례언약
창세기 17: 1-14 /할례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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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언약
2002년 4월 28일 43강
본문 말씀 : 창 17:1-14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찾아온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황송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활자로 이렇게 문자화되어 책이 박혀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지시와 명령을 내릴 때에 우리가 대단히 짜증을 냅니다. 마치 빚받으려 오는 채권자 취급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지시나 명령을 내리기 이전이라고 우리는 몸 둘 바를 몰라야 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존경하고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분의 입에서 어떤 말씀을 주시던지 상관없이 직접 만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격해 합니다.
또 그동안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스럽고 부족해서 눈물이 앞을 가릴 것입니다. "나 같은 인간, 안 찾아주시고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 왜 이렇게 알아주십니까"하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배가 침몰할 지경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떠나소서 저는 나쁜 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즉 거룩한 주님은 저같은 더러운 놈하고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그런 베드로를 보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부터 너는 고기낚는 어부가 되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고 말입니다. 이런 지시 자체가 이제 베드로에게 더 이상 심적인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인간인가를 예수님의 다가오심으로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시사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그저 황송스럽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따라서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내가 지키느냐 못지키느냐를 따져보겠다는 마음 가짐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완전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뜻은, 나와 분리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너는 나를 떠날 수 없는 입장이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이름까지 바꾸시지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아브람이라는 뜻은, '나의 신은 고귀하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아브라함이라는 뜻은, 만민의 아비라는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마음껏 사용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어떤 일을 남기시려고 하는 겁니까? 9-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비록 이름은 아브라함, 즉 만민의 아비로 바뀌었지만 아직 단 한 명의 자식도 없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의하면 대대로 지킬 언약이 마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할례 언약입니다. 자식은 없는 상태에서 지켜야 될 언약부터 먼저 등장하더라 이 말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한다면 그냥 하나님이 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언약은 웬 언약입니까? 많은 자손이 생산되는 것 하고 할례 언약을 행하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자식만 주세요. 잘 키울께요" 이런 마음만 있으면 되는게 아닐까요?
남자 고추하고 많은 자식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많은 자식을 주시려거든 다른 조건을 걸지 마시든지, 조건을 거시려면 아예 많은 자손이 생산다는 일방적인 약속을 하지 마시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보통 계약을 맺을 때는 도장을 찍는다든지 아니면 돈을 바치면 네 소원을 들어줄게 라든지, 하루에 기도를 두 시간동안 하면 내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든지, 하는 그런 계약 조건이 아니라 이상한 계약조건을 거시는 겁니다.
할례 자체가 안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남성의 생식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작업을 하시는 겁니까?
신약성경 골로새서 2:11에 보면 할례의 원뜻을 신약에 와서 비로소 밝히고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여기에서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라고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생식기를 가지고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시는가 하면 알맹이와 껍데기를 분리시키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벗기는' 겁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이 나옵니다. 안에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겉의 것을 활짝 벗기는 그런 기능을 각 남자마다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나의 백성들아. 진정 너희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껍데기 같은 너희 몸들이 아니라 너희와 함께 동행하는 거룩한 분 때문인 것을 대외적으로 나타낼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언약화로 고정시켜 버렸다는 겁니다. 즉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 언약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친히 인도해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적 조건을 따져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육적 조건을 처음부터 벗겨내어야 될 요소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른 민족과의 차이란 딴 게 아니라 육적 조건을 거부했을 때 아무 것도 없으면 그것은 곧 다른 민족이요 이런 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서 끊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과연 그 속살에서 하나님의 언약 대로 무엇이 나올까요? 바로 이삭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신약 시대에서 우리의 몸을 벗겨버리면 그 안에 예수님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자식은 전혀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리 저리 육적인 자식을 낳거나 상속자들 데리고 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많은 수의 자식을 남깁니까?
아브라함의 육적인 생식 기능과 별개로 인물을 하나님께서 속살로 준비해 두셨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먼저 할례 언약부터 실시하기를 당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속살에 해당되시는 분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2:4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의 효과를 기념하고 반복하는 행사입니다.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이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구원이란, 거룩한 분의 언약적 작품으로 계시는 분이 그 개인의 속살로서 자리잡을 경우에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속살을 보이지 않는 자는 거룩한 자를 드러낼 자격자가 못되기 때문에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이라 말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저를 떠나소서"라고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구원이란 인간이 구원을 따낸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을 담는 그릇으로 하나님이 사용되었다는 상황을 뜻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는 것이 아브라함의 개인적 여망이나 소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인물을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체계 안에 담아 두시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창작품이 됩니다. 이 창작품의 품성과 속성은 이스라엘 백성의 할례를 통해서 밖으로 증거됩니다.
신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달성한 것이 아니라 구원자 되시는 본인이 우리를 자신의 증거물로 삼았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할례요 세례입니다. 그래서 세례란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겁니다. 곧 한 덩어리 되고자 하시는 거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자신의 증거자로 삼으신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황공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구원이기 전에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우리의 껍데기를 벗기고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만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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