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 1-10 /세 천사
세 천사 2002년 5월 19일 45강 본문 말씀 : 창 18:1-10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말대로 그리하라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여호와깨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보니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오시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여호화 하나님이고 다른 두 분은 그 여호와를 보필하는 수행 천사일까요? 창세기 19:1에 보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분 중에서 두 분의 천사만이 소돔과 고모라도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빠진 한 분은 천사의 역할을 하실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특별한 분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 아브라함을 직접 만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황송스러운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얼마나 반갑고 고맙고 놀랬던지 세 분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 드리려고 합니다. 먼 길을 여행하는 피곤한 여행자처럼 여기면서 친히 물을 떠서 발을 씻기려고 했고 천막 안으로 인도해서 편히 쉬게 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성대한 음식까지 즉석에서 준비합니다. 성심성의를 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서 세분의 천사 입장을 우리가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천사 세분이 평범한 인간들의 나그네 모습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자를 경계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대접하니 참으로 칭찬할만한 태도이지요. 따라서 많이들 얻어 잡수시고 많이들 축복해주리라 우리가 짐작할 것입니다. 참고로 떡을 만들어 드리는 세 스아라는 고운 가루 양은 요즈음 부피로 해서 24ℓ나 됩니다. 엄청난 양이지요. 뿐만아니라 세 분들이 고기 잡수시라고 송아지 한 마리를 다 잡습니다. 50인분은 충분히 더 될 수입니다. 한 사람이 넉넉하게 1㎏씩 잡수신다고 계산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말해서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는 성대한 잔치입니다. 과연 이 세분은 아브라함의 태도 여하에 따라 아브라함의 가정을 더욱 더 복을 주시려고 오신 분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오셨습니까? 잡수실 것 실컷 잡수시고는 엉뚱하게도 자기들과 얼굴 맞대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라가 어딨느냐?" 하시면서 사라를 찾습니다. 왜 그 현장에 없는 사라를 찾으실까요? 이 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4장의 한 대목을 거론하겠습니다. 15절-24절에 보면,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는 장의 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함께만 있으만 기쁜 잔치가 성립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쁜 잔치에 같이 기뻐하는 심정으로 참석해야 될 자가 따로 있고 참석해서는 아니될 자가 따로 있습니다. 결코 숫자 한 사람이 아쉬워서가 아닙니다. 잔치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기어이 참석치 않게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좀 더 진전된 내용이 마태복음 22장에 나옵니다. 9절 -14절에 보면 누가복음이 없는 내용이 추가해서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여기에 보면 잔치에 참석하도록 초청되었다고 해서 제대로 된 잔치 손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청함'과 '택함'의 차이를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천국 잔치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청함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가 가슴에 담긴채 참석하는 자라면 그 사람은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세 분의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후한 대접이나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나름대로 복안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 복안이 무엇입니까? "사라가 어디 있느냐?"로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아담 부부에게 다음과 같이 먼저 말씀을 던지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너를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 분에 있어 진정한 기쁨의 잔치는 아브라함의 접대나 사라의 음식 솜씨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예고하신 그 내용이 진정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을 성사시킵니다. 실제로 천사는 말씀하시기를 "내년이 다시 올 터인데 오게 되면 그 때는 벌써 사라가 임신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삭의 잉태는 결코 아브라함 개인의 소원 성취 차원 일어날 일도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앞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삭을 잉태함이 예언의 마땅한 결과라면 앞으로의 모든 여호와의 예언도 빈말이 아니라 동일하게 성취될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의 본질은 인간의 숫자로 자동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탱크처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뜻에 의해서 성립된 잔치이어야 합니다. 흔히들, 교회 교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간증이라는 것을 들어오면 자신들이 아쉬워서 애탈 때 그것을 채워주시는 식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옳지 못합니다. 전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마음도 안되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밀어 닥치기 식의 능력으로 인해 비로소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라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즉 예복 입지 않는 자를 마구 결박해서 지옥 어두운데로 데려가서 영원한 형벌을 충분히 실감 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코 자기 소원 성취의 하나님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 잘 대접하니 하나님의 복주시더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으신 것이 "아브라함 착하다"가 아니라 "사라는 어디 있느냐"입니다. 사라에게 잉태하는 힘은 남편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모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들 낳기 위해 천사를 초청하고 사전에 음식을 많이 준비한 것도 아니요 발 씻을 물까지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천사 세분씩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한꺼번에 찾은지 전혀 감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 하나님의 일방적 뜻이 내장된 자만이 신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거명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의해 부름 받았음을 모두 하나님의 공로로만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