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8:22-33 /의인과 심판
의인과 심판 2002년 6월 2일 47강 본문 말씀: 창 18:22-3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에게 세 분의 천사가 찾아왔다고 했지요. 오늘 본문 22절에 보니, 두 천사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에 불심판 내리려 갔고 이제 아브라함은 남은 분, 즉 여호와 앞에 서 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이 여호와 하나님과 무엇에 관해서 대화를 나눈 것입니까? 두 천사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에 갔다는 것은 그 도성의 심판은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심판이 이제와서 취소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생각하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이 자신이 보기에 하나님의 공의성에 배치된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잘 알고 믿는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대해서 성도가 공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이 쌓일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장담하다가 막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당황스러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까? 그럴 때는 어떻게해야 합니까? 직접 기도로서 하나님께서 물어볼 수 밖에 없지요. 지금 그 일을 아브라함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일이 왜 아브라함에게는 같이 동감할 수 없는 일입니까? 23절-25절에 보면,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다수의 악인을 멸하는 것에 아브라함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왜 그 심판으로 인해 의인도 함께 죽어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생각에, 그동안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지 않는 것은 대다수의 주민이 착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의인 50명 정도는 있어 만약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하면 의인을 하나님이 징벌하는 식이 되기에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의인의 존재가 다수의 악인을 용서하는 식으로 지탱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결행하신다고 하니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상이 깨어질 판입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사실, 아브라함 생각과 동일합니다. "의인 50명이 있다면 나는 그 도성을 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즉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답변을 듣고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아, 50명 정도는 되어 이 50명의 의인을 봐서라도 그동안 하나님쪽에서 참아왔는데 이제는 그 숫자가 다소 줄었는가 보다"해서 아브라함은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의 수위를 낮추어주기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은 45명만 있더라도 좀 봐 줄 수는 없습니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의외로 쉽게 45명의 선까지도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기정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브라함은 혼란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일단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지 않는 대원칙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마당에서 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름대로 갖고 있는 심판 원칙에 따라 계속 요구사항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의인의 존재를 가지고 심판 자체를 유보시켜 보려고 합니다. 염치불구하고 요구한다고 하면서 의인 10명까지 쭉 내려 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의견에 동의하시면서도 여전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즉 의인의 존재로 인해 악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에 대해서 아브라함 생각은 하나님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의인 한 사람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계속 대들기를 통해서도 분명히 보여주겠다는 뜻입니다. 의인 50명이 아니라 의인 10명만 있어도 멸망되지 않을 정도로 의인의 존재는 가치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러한 막무가내는 너무나도 자기 생각에 도취되어 있기에 나온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죄악된 세상이라도 할지라도 소수의 의인과 함께 살므로서 상호 서로 평화롭게 사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저쪽 악인인 채로, 이 쪽은 의인인 채로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왕 세상은 악한 세상인 것이기에 의인만이라도 제발 조용스럽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입니다. 의인 덕분에 악인의 멸망이 유보되고, 의인은 의인대로 심판이 감행되지 않으니 평화롭고, 이러한 체제를 아브라함의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자신의 의문점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멸망의 도성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롯을 포함해서 의인 9명만 더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심판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지를 타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공의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 생각의 허점은 이것입니다. 멸망의 도성이라도 빌붙어 살아야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름니다. 하나님은 롯을 다른 곳으로 빼돌릴 생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이 아닙니다. 도리어 거류민에 해당됩니다. 즉 잠시 머물다가 떠날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9:9에 보면 이런 암시가 나옵니다.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즉 롯을 배타시하는 현지민들이 롯을 어떤 존재로 보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타지에서 왔다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은 의인 롯을 그곳에서 건져내고 그 나머지를 철저히 심판하므로서 심판은 심판대로 이루어지게 함과 동시에 의인은 그 어떠한 심판에서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공의성도 아울러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처럼 의인이 그냥 편하게 악인의 세상에서 빌붙어 사는 것으로 공존하는 사실이 하나님의 최종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친구 집 주위에 절이 많은 것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는 생각입니다. "야, 네 집 근처에 불도가 심하지만 너는 교회에서 집사니까 이제부터 절들이 망할 것이다"라는 생각말입니다. 왜 이런 생각이 옳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성을 순전히 자기 생활의 편안함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성과 심판은 성도를 편하게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성도 그 자체도 결코 의인이 아니라 마땅히 심판되어야 하지만 진정한 의인되시는 그 누구로 인해서 구원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공의성입니다. 창세기 19:29에 보니,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적인 질문을 허용하셨는데 이것이 또한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 와중에서 아브라함이 지니고 있는 중보자적 입장을 정말 제대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쪽으로 수정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요구는 의인 10명 선에서 멈춰버립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의인의 숫자를 낮춘다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은 철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함께 믿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공의성을 들이밀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일임하고 맡겨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그 중보성을 통해서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의인 롯을 악인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조치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존재 가치를 놓치고 스스로 의인 노릇하면서 주위에 깔려 있는 악인보다 우위에 설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 자신부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사는 잘못이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하나 편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나의 뜻의 달성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