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1-11 /소돔의 죄악
소돔의 죄악 2002년 6월 9일 48강 본문 말씀 : 창 19:1-1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세상은 모든 것이 생산, 생산으로 그 가치를 둡니다.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많은 결과물을 얻어내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고 실패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을 하든지 어떤 노동에 나서든지 항상 얼마나 많은 생산을 얻어낼 것인가를 먼저 고려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소돔이라는 동네에 외부에서 온 나그네 두 분이 나타납니다. 그 나그네를 소돔에서 살고 있었던 롯이라는 분이 만나서 영접하게 됩니다. 자... 여러분, 이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이 과연 생산적입니까? 이 나그네가 소돔이라는 도시에 발전을 기여하게 될 면이 보입니까?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을 할 때, 더 소유케 하지 못할 때는 그 일은 차라리 안한 것만도 못하다, 혹은 힘의 낭비로 보고 매도하기 일수입니다. 옛날에는 여자들의 가정 주부 일을 생산적인 것으로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경제 이론에 의하면 주부의 일이란 바깥의 생산적인 경제를 밑받침하는 재생산 체제로 보고 있습니다. 수치로 따져서 한 달에 약 15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생산적이지 않는 것에는 저주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의 행위는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지역에 남아서 그 지역 발전에 도움을 줄 자도 아닌 나그네에 대해서 환대한다는 것은 하등 소용없는 짓처럼 간주되기 쉽습니다. 나그네란 그냥 왔다고 떠나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라고 나와 있는 두 분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은 그 누구도 그를 천사라고 알아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롯까지 그를 천사라고 보고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낯선 사람이지요. 따라서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볼 때 자기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려고 했지요. 즉 그 두 사람은 세속적인 때가 묻지 않아서 깔끔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두 사람을 성적인 노리개감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 이 두 사람에게 챙길 생산성입니다. 롯에게 있어서는 이 두 나그네에게 그저 대접만 해 줄 뿐이요 이 악한 도시에서 안전하게 신분이 보장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전쟁에는 폭격기가 동원되기 마련입니다. 폭격기의 특징은 지면 가까이 내릴 것같이 강하한다 할지라도 결코 이 지상에 착륙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폭탄을 떠뜨리고 도로 하늘 높이 되올라가 버리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 도시에 대해 생산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파괴적입니다. 요한복음 12:31-32장에 보면, 예수님이 바로 이런 폭격기적인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오늘 본문의 천사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왔다가 잠시 접촉하고서는 도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상스럽게도 롯은 이런 나그네를 죽자고 붙들려고 하고 보호해 주려고 합니다. 외골수로 말입니다. 여러분, 외골수라는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눈에 아무 것도 안보이고 오직 한가지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상식 밖의 제안을 롯이 하게됩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이게 무슨 무리수입니까? 이 두 나그네를 먼저 롯의 집에 가겠다고 우겼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저 이 밤은 길에서 그냥 지내겠다는 겁니다. 이런 이들을 집에다 모신 것은 두 천사가 의사가 아니라 롯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롯의 태도는 주위 이웃으로부터 비난받을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 우리 같으면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그래 공연히 낯선 사람을 함부로 대접해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밉상받을 필요가 없지. 나그네는 왔다가 가면 그만이지만 이웃 사람들은 평생을 동거동락할 사람인데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어. 괜히 사서 고생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하고 그 두 나그네를 화급하게 민중들에게 인계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롯은 두 나그네를 인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두 딸, 그것도 아직 결혼도 하지 않는 처녀 딸을 민중들에게 농락당하도록 넘겨주겠다고 나섭니다. 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행동입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정상적인 분들의 만남을 통해서 그 만남을 방해놓는 비정상적인 세력이 실제로 이 세상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두 천사가 롯을 만나기 전까지 이 점이 들통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 정상적인 분들이 만나는데 있어 비정상적인 이 인간세계는 참으로 비정상적인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런 악의 세력에 대처하는 롯의 행동 또한 참으로 우리 눈에 비정상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세상 세력이 비정상이었으면 롯의 방어도 도에 벗어나는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그만큼 세상이 악하다는 말입니다. 정상적인 편에서의 이와같은 대응자세는 예수님의 전도 방식에서 보다 확실해집니다. 마태복음 10장-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전도에 나서면서 무시무시한 대응책을 미리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10:16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리가 어떤 종류의 짐승입니까? 그 앞에 양을 보낸다는 것은 아예 잡아 먹히라고 보내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만 전도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사이에 이 얼마나 치열한 전투입니까! 오죽 사태가 험난했으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겠습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더욱 더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마태복음 10: 39에서 하고 계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 이런 비상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예수님은 옛날 소돔의 멸망 사실과 결부시켜 설명하십니다. 마태복음 11:23-24에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즉 소돔의 사람들은 멸망의 날까지 자신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하는 소리를 이상스럽게 여기고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비생산적인 것은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하는 소식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민중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소돔 땅의 롯은 어째서 그 두 나그네를 환대한 겁니까? 환대 정도가 아니라 자기 집안이 풍지박산이 되는 것을 자청하면서 그 두 나그네를 영접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롯이 무엇이 정상적인지 무엇이 비정상적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과격한 예수님의 전도 방식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외골수로서 "드디어 죽어도 영접할 분을 만났다!"고 기뻐하십니까? 롯은 그 두 나그네를 보는 순간, 이 더러운 세상과 전혀 다른 때묻지 않는 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그 분의 신체를 안정하게 지켜드릴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롯은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심판이 엄중한 하나님의 일인 만큼 우리도 진지하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영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일하고 생산적인 것만 정상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정말 우리의 전부를 바치고도 지켜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