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17-29 /소금 기둥
창세기 19:17-29 /소금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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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기둥
2002년 6월 23일 50강
본문 말씀 : 창 19:17-29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우리가 평소에 걱정하는 걱정거리는 무엇입니까? 하루 하루 살면서 무엇에 대해서 걱정하십니까?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까 걱정됩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까 걱정됩니까? 생계가 아슬아슬해서 걱정하십니까?
모든 걱정의 근본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왜 내 마음이 확고하지 못하는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왜 내 마음은 상황따라 환경 따라 흔들리기만 하는가 하는 점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서 어떤 소원이 있느냐 하면, 어떤 변화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안 흔들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데 그 태도가 차갑고 냉정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나는 이 성을 멸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멸망했다"라는 일관성입니다. "너는 뒤돌아 보면 안된다. 롯의 처는 뒤돌아봐서 죽었다"라는 결과도 얼마나 일관됩니까. 우리도 하나님처럼 차갑고 냉정해야 합니다. 비정해야 합니다.
소위 암살자가 사람을 죽일 때 앞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목표만 생각합니다. 이런 차가움을 가질 때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걱정거리는 사라집니다. 확고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연필 속에는 심지가 있습니다. 그 심지는 나무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나무를 깍아내면 언제든지 확고한 심지가 나타납니다.
우리한테도 이런 심지가 심어져 있어야 합니다. 심지가 없으면 안 쪽이 텅텅 비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들어가면 이 일 때문에 고민하고 저 일이 들어가면 저 일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심신이 상하게 됩니다. 차갑게 냉정한 인생관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 심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한 명 나옵니다. 구원받은 자는 다른 사람이 뭔가 차이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심지 같은 것이 있기에 그 어떠한 상황, 즉 무서운 하나님의 불 심판 마저 덮치지 못할 그 심지 같은 것이 있었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맹렬한 심판 가운데서도 구원받은 자를 남겨서 그 구원받은 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은 위하여 하나님은 참으로 냉혹한 심판을 감행해 버립니다. 이런 구원의 심지가 있다면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그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입니다.
이 심지를 롯은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19절에 보니 롯은 그것을 '은혜'라고 보고 있습니다.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여기에 보면, 롯은 '은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심판 받는 자는 무엇이 없는 것입니까? '은혜'라는 심지가 없는 것입니다. 롯의 사위의 경우를 보면,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 "심판은 없다"는 식으로 심판을 사전에 유야무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암살자 같은 하나님의 심판 작업에 차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는 없고 줏대만 남아 있는 자들이 과연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버틸 수 있을까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롯의 경우를 보세요. 어떻게 주님의 은혜만이 이 무서운 심판을 버텨 낸다는 생각을 다 할 수 있었는가 말입니다. 정말 놀라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은혜성이라는 심지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오기가 자리잡고 있고 자라나면서 그것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악마의 굴레에서 태어난 존재에게 어떻게 은혜라는 개념이 나오겠습니까?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렬한 법이지 결코 누구의 공로에만 고대하고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나는 스스로 버틴다"가 보편적이지 결코 "지금 누구의 기도 덕분에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갖는 것은 특수한 경우입니다. 은혜 아니면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그러면 롯은 천사가 일러 준 구원의 방식으로 산으로 곧장 도망쳤습니까? 아닙니다.
은혜라는 말은 해놓고서는 그 은혜에다 자기가 염두에 둔 구원방식을 개입시켜 보려고 합니다. 즉 19-20절에 보니,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롯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들의 태도를 방불케 합니다. 흔히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2에 보면 긍휼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즉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효과가 그대로 전달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나름대로의 이 은혜를 자신의 제시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자꾸 이용하려 듭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다 자신이 해 낼 수 있는 몫의 행위를 섞어서 구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받는 것은 제가 잘 알겠는데요, 저의 조그만 이 땅의 소망 하나도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주옵소서. 이 일이 만약 성취된다면 그 때 가서는 정말 주님의 은혜로의 구원을 확신하고 남은 여생을 주를 위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흥정 쪽으로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이것만 낫게 해주시면 그 낫게 된 은혜를 바탕으로 해서 주를 위해 마음껏 살아드리겠습니다"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낫게 된 육신'도 결국 죽음의 힘에 반납해야 합니다. 어차피 죽을 몸을 왜 일시적으로 살고자 합니까? 은혜라는 것이 죽어도 산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은혜를 그저 안 죽는 방향으로만 이용하려듭니까?
롯은 천사가 준 은혜의 내막을 전부를 모르고 그저 그 은혜를 자신이 사는 쪽으로 한번 활용해 볼까 하는 생각을 드러낸 겁니다. 하나님쪽에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다니까 이왕에 본인의 능력 수준에 맞추어 안심이 되는 선까지 한껏 이용해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 안이라고 여긴 작은 마을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들 롯의 가정은 무사히 구원받은 겁니까? 이들에게는 아예 심판의 원칙에서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황불에서 면제 되었지만 이들 가정은 여전히 하니님의 심판 원칙 아래에 놓여있었습니다. 뒤돌아봐서는 아니된다는 엄명을 어긴 롯의 처는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녀는 뒤를 돌아봤을까요? 누가복음 17:32에 보면 심판의 취지가 나와있습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롯의 처는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살리던 예전 방식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유황불에서는 면제되었지만 하나님의 심판 원칙은 구원속에서 결코 철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방식으로만 살아야 될 구원받은 자가 그 은혜 방식에 의심을 하고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 사람이 비록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소금기둥이 될 공산은 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베드로전서 1:2-3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이 은혜로만 구원이 됩니다. 그 어떤 인간의 공로나 선한 행위가 첨가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방침의 깊은 은혜 성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불안감 해소용으로만 도용하고자 합니다.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심정은 차갑게 냉정하십니다. 심판의 원칙을 앝잡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롯의 처 못지 않게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수 천번을 뒤돌아 봅니다. 소금기둥이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라 아예 '소금 기둥 교회'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전히 스스로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죽이시지 않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은혜의 위력이고 긍휼의 위력입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정말 제대로 롯의 처를 생각할 것입니다. 롯의 처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그러기에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께서 귀한 피를 흘러 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심지를 심어주시옵소서. 오로지 은혜와 긍휼만으로 심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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