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7 /아브라함의 위상
창세기 20:1-7 /아브라함의 위상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아브라함의 위상
2002년 7월 7일
본문 말씀; 창세기 20:1-7
20:1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20:2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20: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20: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20: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줄 알찌니라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남들에게 뭔가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하는 자만이 신자입니다. 자기를 증거하는 것은 어느 인간이나 다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난 사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6절과 7절의 말씀이 각각 그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라니나"라는 말씀이 우선 나옵니다.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이 될까요? 하나님은, 지정한 사람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치 않도록 막을 수 있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또 7절에 의하면, 우리 자신을 위해 타인이 기도하고 도와주셔야 우리에게 저주가 오지 않고 복이 오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것도 과연 다른 사람들이 납득이 될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전력을 다하여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범죄치 않으면 범죄하지 않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범죄치 않기 때문에 내가 범죄를 안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내게 애시당초 훌륭할 요소가 없단 말입니까?"하고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범죄케 했다든지, 범죄 하는데 일부로 방치 했다든지 부축인 셈이 되는데 과연 그런 식으로 악을 조장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일까요?"하고 의심할 것이 뻔합니다. 자신이 범죄 안하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막았다는 점이 기뻐서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행위의 공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 몹시 기분 상하게 합니다.
어릴 때 문방구에서 도적질 안해 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 때 범죄한 것이 순전히 하나님이 시켜서 한 범죄이고 커서 도적질을 적게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막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안한 겁니까? 정말 성경의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통념상 하나님과 상식적인 하나님 하고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낯선 사실을 전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사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등장 자체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는 낯선 일입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보자 탐을 내었습니다. 혹시나 남편이 있는 여인이며 옆에 있는 자가 남편이 아닐까 하여 염려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먼저 자신들은 남매간이고 소개했기 때문에 기꺼이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내를 맞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으로 기분 나쁜 징조 같은 것이 아비멜렉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꿈에 하나님께서 먼저 아비멜렉을 찾아듭니다. "너는 이제 죽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네가 취한 여인은 남의 아내니라"는 겁니다. 그 때 아비멜렉이 대꾸하기를, "동침하려고는 했지만 동침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짓지 않는 자에게 벌내리는 그런 하나님이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난제에 도전해 봅시다. 사람이 죄를 짓고 난 뒤에 그 다음 하나님 편에서 선지자가 오든지 예수님이 오시든지 누군가가 오셔서 기도해 줌으로 그 죄를 씻어줄 거리가 있을 게 아닙니까? 지금 아비멜렉의 경우는 죄를 지을 뻔은 했지만 죄를 안지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해서 아브라함의 기도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아비멜렉이 죄를 안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도 인정하십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과 논의하고자 하는 목적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 상식적인 하나님을 갖고 있지 말고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상식적인 하나님 관을 갖고 있다면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낯선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 상식에 의하면 죄의 원인 제공자는 누구입니까? 아비멜렉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아브라함과 사라입니다. 그 둘은 자진해서 먼저 자신들은 남매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잘못은 아무 죄 없는 아비멜렉에게 돌려 놓고서는 그 집안을 몽땅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하나님 다운 일관성과 정의로움과 틀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천주교에서 실시하는 고해성사 같은 경우를 보면, 자책감과 죄책으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해 소위 죄 용서해 주는 전문가로 나선 신부들이 사람들로부터 양심 가책받는 죄를 씻어주고 해결사 노릇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죄를 고백한 그 사람은 완전히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까? 결코 그들은 사람의 방법을 의존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마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비록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고 상식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되는데 말씀만이 최종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1-13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왜 이 세상에 있어야 하느냐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아비멜렉이 죄 안에 있다고 간주했을 때 과연 아브라함이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느냐를 생각해 달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때의 살아남은 장자가 과연 도로 그 집안의 장손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벌리시는 사건 하나 하나는 구원된 당사자는 중보자의 예속 하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는 겁니다.
즉 아비멜렉이 도로 정상적으로 돌아 온 것은 아비멜렉이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도 덕분에 정상적이라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죄 안짓도록 한 것도 역시 아브라함의 위상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지 아비멜렉의 의로움을 부각시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은 누구의 증인이 되어야 마땅한 겁니까? 역시 아브라함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증인노릇을 하게 된 겁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원인 제공자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데리고 사용하는 그 취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 성취에 있습니다. 그 뜻 성취는 중보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발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식적인 하나님을 증거하지 말고 참으로 중보자의 모습과 능력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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