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1-12 /사라의 기쁨
창세기 21:1-12 /사라의 기쁨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사라의 기쁨
2002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1-12
21: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1: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21:3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21:4 그 아들 이삭이 난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21: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세라
21: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21:7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21: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21: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것임이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일들은, 인간들 사회에서 늘 일어날 수 있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프로그램에 따라 터져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모방하거나 흉내 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됩니다.
인간들의 손에서 주어지고 일어날 일이라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거나 교회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말씀을 대하는 것은, 어떤 점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세계에서 인간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꼭 일으켜야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자 나이 90세에 아기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미 태가 죽은 것으로 판정이 난 여인의 몸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보면서도, "뭐 그런 정도의 이상한 일은 사람 사는 세계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가볍게 넘어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을 그냥 넘겨버린 것이 되는 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늙은 여인의 몸에서 꼭 아기를 태어나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성사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라가 아기를 못 가지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니까 갑자기 아기 하나 생긴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흉내 내기나 모방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앞으로 계속 진행될 인류의 역사는, '여자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아닌 '뱀의 후손'과의 대결 구조로 이어진다고 확정지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변화무쌍한 역사라지만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두 가닥의 전선이 나란히 가듯이 이 두 노선도 나란히 갑니다.
여자의 후손이 아닌 노선은 단순한 생식 기능의 산물일 뿐입니다. 결국 흙이 되어 살아질 것입니다.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여자의 후손은 영원과 연결된 노선입니다. 동시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노선은 인간의 생식 기능과 무관한 채 이 창세기 3:15절을 규현하고자 하는 약속의 산물로서 이 세상에 출현되는 겁니다.
사라가 낳은 이 이삭이라는 아기는 뭔가 다른 아기와 달라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무엇이 다를까요? 어떤 점이 다를까요? 두뇌가 뛰어난 천재일 것 같습니까? 신체적으로 힘이 장사일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개입해서 태어났다면 뭔가 달라도 달라야 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도 육체적인 할례를 행하면 곧 하나님의 자녀로 탈바꿈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신체적인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체의 끝이 아니라 마음의 끝을 잘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할례가 남성의 생식기의 끝을 베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생식 기능의 산물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이 아이는 인간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뭐든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이룩되는 이 세상의 문화와 문명 속으로 하나님의 손과 능력이 친히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로도 작용됩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인간들이 따지도 또 따지고 들면 반드시 그 연결고리가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참 신기하게 보이고 기적처럼 보이는 일이라도 오랜 연구나 분석을 거치면 그 세세한 과정이 결국 밝혀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전에는 우연이요 기적으로 이해되는 것도 사실은 인간의 능력으로 재생 가능한 문명으로 전환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태여 잘라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자르기는 커녕 모든 인간의 지혜와 힘을 결집할 때는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일들이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된다는 겁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는 기적을 논하고 우연을 말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사고로 취급당합니다. 일종의 반칙이지요.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아니된다고 충고 받을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들이 흉내거나 모방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부로 죽은 태에서 이삭이 태어나는 하는 것도 철저하게 인간의 능력, 인간 남성의 능력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 '여자의 후손'의 계통이 확실하게 살아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자... 과연 여자의 후손이 성공적으로 출생했습니까? 이삭이란 자가 최종적인 그 여자의 후손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1: 30-38에 보면,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끝부분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천사에게 답변하기를,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 성취가 바로, 아버지 없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입니다. 즉 절대로 '남성의 후손'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 노선에 누가 있는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사라와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남성의 능력없이 태어난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의 남성의 능력은 기껏 이스마엘로 통해 그 한계성이 다 드러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남성 능력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남성의 능력, 즉 남성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의 계통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씀드리자면, 사라에서 태어난 이삭은 장차 2000년 후에 태어날 진정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앞당겨 하나님의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마엘과 어떤 충돌이 야기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라는 이삭을 낳고서 놀라운 기쁨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삭이라는 이름, 즉 웃음이라는 의미를 자신이 아기를 갖게 된 기쁨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이 웃음의 의미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를 유념해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결코 같이 갈 수 없는 운명들을 가진 것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께서 약속하는 그 유업은 역시 인간의 능력으로 쟁취할 수 없음을 압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 오직 하나님의 약속한 바에 따라 태어난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유업도 달성되는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비약속된 노선은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라는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를 받고 아브라함은 근심에 빠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닮은 자식을 아무런 대책도 없는 추방한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면에서 못할 짓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그 난제를 가지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변 역시 사라편입니다. 마땅히 추방당해야 할 것이 추방된다는 식입니다. 결국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 하갈의 추방은 아브라함이 내부에서 사실과 끊어져 나가야 할 것이 끊어져 나가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의 할례 당하는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이 좋고 세상 재물이 좋다지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알게 된 기쁨에 비하겠습니까?
세상 권력이나 세상 일이란 노력 여하에 따라 인간의 능력과 손에 의해 재생되고 재 창조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되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손을 떠난 일입니다. 마리아의 고백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성취되는 현상으로서의 구원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된 기쁨을 결코 세상 권력과 재물의 소유의 기쁨과 견주거나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가는 우리 마음에서 할례 받을 때처럼 떨어져 나갈 요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힘으로 구원된 것이 아님을 진정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구원의 능력과 요소를 아기 이삭처럼, 아기 예수님처럼 귀하게 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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