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 13-21 /이스마엘식 삶
이스마엘식 삶 2002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 13-21 21: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21: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21: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21: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21: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서로 혼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혼합이란 각각 몇 %씩 따로 나누어질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이런 경우는 해당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선하게 해 낼 수 있는 영역이 따로 있기에 그 영역에 대해서는 하나님 조차 관여하시거나 또한 간섭 받을 필요가 없고 그 대신, 자신이 항상 실수를 범한다든지, 반복해서 죄를 짓는 사항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도움을 집중적으로 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건전하게 살아온 사항과 거기에 보태어 특별히 하나님으로 인해 도움받아 괜찮게 된 사항을 한데 모으면 이상적인 삶이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불신앙의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가족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가정은, 하갈, 즉 이스마엘 종족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이나 교인들에게서도 이스마엘적이고 하갈 의식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흔히 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늘 자신없어 하는 대목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비공장에서 특별히 수리받아 이제는 괜찮은 삶으로 수선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주장은 결국 무엇입니까? 이런 겁니다. "사람이라고 다 나쁘거나 다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면도 있으면 이것에 대해서 고이 간직하고 자기 힘으로 잘 안 고쳐지는 면은 따로 하나님으로부터 교정받아야 하며 결국 전체적으로 볼 때 바람직인 인간상으로 변모된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창세기 21:10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기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의 생계를 걱정하신다면 이런 식으로 내어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 집 근처에다 별채를 지어 하갈과 그 자식을 따로 살게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양식과 먹을 물이 풍부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닙니다. 과감하게 하갈 가족을 내어쫓을 것을 명령합니다. 오도 갈 데는 없는 불쌍한 이 모자(母子)를 당장 내어쫓으라는 겁니다. 과연 이 하갈 가족의 운명은? 예상한 대로 하갈 가족은 얼마 못가서 아사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이 챙겨준 물과 떡도 이미 바닥났습니다.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갈은 자식과 얼마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신이 못나서 눈 앞에서 죽어가도록 바라본다는 것이 어미로서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 괴로움이 하나님을 향한 통곡으로 전달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 가족이 이런 죽음 직전의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왜 아브라함에게 내어쫓으라고 명령하신 겁니까? 아예 죽여 없애겠다는 취지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죽음의 지경까지 몰아넣으시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갈 가족의 존재 의의가 하갈 가족만의 생존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알아야 합니다. 하갈 가족은 아브라함 가족과 관련지어서 따져봐야 합니다. 우선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선택한 것은 그 어미되는 하갈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기를 임신해 놓고서는 가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본처 사라가 임신을 못하니까 다소 멸시한 모양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라는 화가 나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이 학대를 견디다 못해 하갈을 가출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나타나서 가출을 말립니다. 그리고 도로 주인 댁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즉 헤어질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안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 태어날 아기 이름을 하갈의 학대받음과 연관해서 지어줍니다. 그 이름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들으심'이지만 이것은 하갈의 소원대로 다 수락해준다는 뜻이 아니라 하갈이 무슨 원한과 괴로움이 있더라도 즉 하갈과 그 가족의 운명은 이미 하나님의 관리 체제 하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10:16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라고 하갈에게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에도, "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라고 하셔서 계속 약속이 유효함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러나 막상 하갈에게 있어 아브라함으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한 사태는 곧 죽음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취지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살려 주십니까? 하갈에게 관심사는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이 아니라 아브라함에서 이탈된 비약속, 즉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식이자 동시에 하나 밖에 없는 하갈의 친 아들에게 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과 비교해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약속의 증거물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주신 약속의 의의를 살려주기 위해 아브라함의 약속이 가는 곳에는 항상 아브라함의 육체적 생각의 산물이자 인간 지혜의 산물인 이 비약속이 늘 배경이 되어야 했습니다. 약속이 약속답게 피어나기 위해 비약속이 어떤 속성과 성질을 지니고 있는가가 약속과 더불어 부각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역시 창세기 17:3에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겁니다. '만민의 아버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을 받을 당시에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운명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약속의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 성취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의 열매인 하갈과 이스마엘 가족도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임신된 자식이 실제로 살아 있었습니다. 하갈이 대성통곡을 한 것도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예 펄펄 살아있는 자식을 번제로 죽여라고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당당하게 아들을 도로 하나님께서 바칩니다. 이렇게 보니 아브라함은 인간의 육적인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반면 하갈은 모성애라는 인간의 한계를 못벗어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셈이 됩니다. 즉 하갈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왕에 있는 것을 계속 있는 것으로 유지시키고 번창시켜주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죽든 살든 하나님의 존재 의의는 오직 하나님의 내러준 약속만이 실현시키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가족과 이스마엘 가족 모두를 하나님께서 번창시키시지만 번창시키시는 의도가 다릅니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마침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의 눈을 뜨게해 샘물이 가까이 있는 것을 발견케 하신 것은 이미 있는 이 자식을 유지시켜주고 더 나아가서 번창시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유(有)에 대한 긍정이지요. 달리 말씀드리자면, 어미인 자신이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죽어가는 보고 모성애를 발휘하니 하나님께서 그 모성애 만큼은 천하 없어도 긍정해 주셔서 이 어미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니까 그야말로 '이스마엘' 하나님이 들어주심이 아니고 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성애라는 선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긍정하시고 단지 이 모자 가족이 스스로 힘으로 물과 양식을 구하지 못하는 그 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임무를 띠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분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면회하려 오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나 여기 있는 내 제자들이 곧 내 모친이요 동생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의 이스마엘 종족의 보존은, 사실은 아브라함의 종족의 번창의 원리를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마엘 종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때부터 하나님의 관리 하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때는 그 아브라함의 이름에 합당하게 관리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차이나느냐 하면, 이스마엘 종족은, 인간이 스스로의 긍정적으로 여기는 면을 유지, 보존하는 방식의 연속으로 이어진다면, 아브라함 종족은 계속적으로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하면서 실행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6:12에서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삶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즉 그는 스스로의 담력과 능력으로 스스로를 지키는 식의 운명이 될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이스마엘 종족을 관리해 나가십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자신의 힘으로 잘 안되는 면을 따로 뽑아내어서 그것에만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는 식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라함식의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긍정적인 행위는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은 행함이 아니라 은혜를 입어 의롭다고 받은 분이고 또한 믿은 자의 조상이 된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웃이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이사를 온다든지 혹은 가는 곳마다 이단들이 설치는 것을 보고서 마음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부 그들을 이긴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긍정적인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그런 이단들 마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관리 체제 하에 놓여 있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나 행위를 보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이 번창하더라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세상 일을 내 편하기 위주로 움직인다고 제발 오해하지 않게 하옵소서. 힘들더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