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1-9 /약속과 죽음
약속과 죽음 2002년 8월 25일 본문 말씀: 창세기 23:1-9 23:1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23:3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23:5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23: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23: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23:8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찐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23:9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하기를 원하노라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이 실제로 이 세상을 사셨던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 사람의 아내인 사라가 죽었습니다. 이 분은 이 사실에서 두 가지의 힘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나그네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상이 안겨다 주는 세속적인 힘을 느꼈습니다. 흔히들 인간이란 벌거벗고 나와서 결국 벌거벗고 돌아가기 때문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 속에 있으면 눈에 보이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각자 각자 쥐고 있는 소유의 힘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허름한 빈 집에 그냥 들어가 잠을 자고 있다고 칩시다. 이것은 분명 자기 신체가 요구하는대로 행동에 옮긴 자유함입니다. 그런데 한참 달콤한 잠을 자는데 난데 없는 집주인이 들어와서 하는 말이 "당신 누군데 여기서 잠을 잡니까?"하고 화를 낸다고 칩시다. 그러면 잠 자던 사람이 한다는 말이, "내 몸 내가 눕히겠다는데 당신이 왜 참견이냐?"하고 따지면 집 주인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이 집은 내 집이란 말이오. 내 소유의 집이니 내 소유의 힘이 작동한다 말이오"하고 나설 것이 뻔합니다. 그러면 그 잠자던 사람은 강제로 그 집에서 추방당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편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집주인이 말이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즉 소유된 것만큼 힘을 발휘하는 세계란 말입니다. 이 속에 소위 신앙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우리와 같은 처지와 신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이 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이방인의 지역에서 평생을 보내야 될 팔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내 사라가 죽고 난 뒤는 전혀 또다른 힘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힘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막무가내로 인간을 데려가는 힘 말입니다. 본인의 허락도 받지 많고 죽음이 찾아듭니다. 큰 힘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통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같으면 이 두 힘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고 대처하겠습니까? 그냥 아내 죽음은 평번한 일반 장례로 그치고 그저 이미 현지 세력을 다 쥐고 있는 소유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면서 빌어붙어 살까요? 즉 두 개의 힘 중에서 죽음의 힘은 가볍게 보고 소유의 힘을 더 강하게 보면 그것이 해결책이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아브라함도 소유에 나섭니다. 4절과 9절에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하기를 원하노라" 여기에 분명, 내 소유지로서된 매장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제안에 대해서 현지인들은 다음과 같이 호의를 베풀고자 합니다. "아브라함님, 당신은 참으로 존경스럽게 위대한 어른이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죽은 아내의 시신은 현재 우리가 장만해 놓은 공동묘지 터에서 얼마든지 골라 잡아 쓰시되 돈은 지불하지 않더라도 좋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기어이 이들에게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자기 소유의 매장지를 따로 장만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저 세속적인 힘만 의식했다면 그들이 시키는대로 그들의 공동묘지를 활용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힘은 의식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의 의식 자체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겨서라도 그들의 소유의 힘과 전혀 다른 힘이 작용하는 아브라함만의 세계로 펼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을 사라의 시신이 묻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그 막벨라 굴에 최초에 묻히는 이는 아브라함 본인도 아니요 자기 일가 친척도 아니요 자식도 아니라 자기 부인인 사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라가 묻히는 곳에 아브라함 본인부터 자자손손 같이 묻히기를 아브라함은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의 힘이 현실과 소유의 힘이 작용하는 이 현실 세계에 모두 넘어서고자 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기 위해 히브리서 11:11를 인용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여기보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태가 이미 죽었으나 그 죽음 속에서 죽음을 극복이 생명의 힘이 다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긴 결과가 무엇입니까? 곧 이은 12절에 보면,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분명 죽어서 그 뒤에 결코 나타날 자들이 없어야 하는데 무려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씨들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극복한 그 생명의 힘이 낳은 열매들입니다. 자... 그렇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 뛰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약속을 믿는 자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사라는 이 생명의 힘을 하나님의 스스로의 약속 수행 과정에서 얻게 되었고 그 결과로 죽은 자와 같았던 가계가 하늘의 별 같은 많은 생명체로 새로 출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 즉 이삭과 야곱과 요셉 같은 사람은 다 무엇입니까? 모두 다 죽음을 극복한 씨들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씨의 시작이 바로 사라로부터 일어납니다. 창세기 25:8-10에 보면,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가 먼저 묻혀있던 그 막벨라 굴에 죽음으로서 합류합니다.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그리고 이삭이 마지막 임종한 장소도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 지역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9:29-32에 봐도 야곱과 레아는 그곳에 묻힙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그리고 창세기 50:24-26에서, 요셉이 후손들에게 유언을 하기를, 자기는 비록 먼 이국 땅 애굽에서 임종을 하지만 언제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떠나 때에 자신의 해골을 앞장 세우고 나가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사놓은 약속의 땅에 자신의 해골도 같이 그 장소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과연 무슨 효과가 일어날까요? 이 점을 쉽게 설명드리기 위해 열왕기하 13:20-21의 예를 들겠습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 즉 장의사들이 어떤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갑자가 도적 때가 들이닥치니 엉겁결에 엘리사 뼈가 있는 곳에 그 시신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세상에! 죽은 자가 살아나서 도로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엘리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엘리사는 그저 죽은 채로 있었습니다. 도대체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힘이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요? 그것은 평소에 엘리사가 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사명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권 내에서만 죽음의 힘이 꺾기고 생명의 힘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엘리사 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려 운명했을 때, 갑자기 예루살렘에 근처에 있는 무덤들에서 무덤이 깨어지고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기적들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는데 그들은 오히려 그 죽음 덕분에 되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한 바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여러분 과연 이 말이 빈말입니까? 사라에게 생명의 힘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약속만이 갖는 위력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이라고 성경에 쓰여져 있습니다. 바로 '구원의 능력' 즉 '구원의 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막벨라 굴을 자기 소유로 영구히 삼음으로 이 세상 한 가운데 생명의 세계가 존재함을 증거하려 했습니다. 물로 아브라함 그 이후에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청산한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3-16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러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더나은 본향, 하나님께서 친히 장만해 놓은 성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거기에 합류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힘이 좋다한들 죽음 아래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발 더 나은 현실 세계를 바라 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만 실제 세계로 보고, 성경 세계는 비현실로 봤던 불신앙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