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1-9 /이삭의 배필자
이삭의 배필자 2002년 9월 1일 본문 말씀: 창세기 24:1-9 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4: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24:3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24: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24:5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24: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24: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찌니라 24:8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찌니라 24:9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성경에 나와 있는 분들의 행동을 보게 되면 상당히 무모하게 보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을 찾는 이유가 자신을 달래기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어난 힘든 상황을 신으로부터 위로받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마음의 평정을 찾고 안정감을 가지고 다시 세상에서 살기 위해 힘을 필요로해서 교회 다니는 실용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이나 혹은 이삭이나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상당히 과격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안해도 천국할 수 있으면 그만인걸 왜 저토록 힘들게 사느냐?"하고 동정하고 싶은 마음도 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식 배우자를 구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처녀들 가운데서 얼굴 이쁘장하고, 성실하게 보이고, 시댁 어른을 알아 모실 줄아는 고분 고분한 아가씨를 며느리로 삼으면 무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이래 저래 조건을 답니까다. (1) 내가 나이가 많다. (2)이 가나안 처녀는 며느리로 삼지 않겠다. (3)내가 전에 부모님하고 살던 곳에 가서 처녀를 구해오라.(4) 아들을 다시 그곳에서 살게 하지는 않겠다(5)처녀가 이곳까지 오기에 너무 멀어서 안오려고 한다면 그 책임은 종인 너에게는 묻지 않겠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왜 아브라함은 모든 생활에 있어 그저 편리한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려운 원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원칙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맹세'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맹세'가 있기에 그 맹세를 의식하면서 모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 맹세를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가 도리어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6:13-16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즉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위인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자기에게 맹세해 놓고서 그 맹세 한 대로만 일하시고 그 밖으로는 절대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맹세가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작용했을까요?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없이 자기 아버지 땅에 잘 살고 있던 아브라함 자신을 이곳 가나안땅까지 이끌어낸 것은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맹세의 위력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맹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어떤 맹세가 아브라함에게 떨어졌습니까? 창세기 22:16-18에 보니,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놓고 보니, 그러나 모든 지시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맹세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맹세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로 인하여 주어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이 맹세에 따라야 될 입장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아무 며느리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요건의 며느리가 되어야 합니까? 바로 약속의 씨의 출발을 아브라함 자기 자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었던 사라에게 둡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죽은 태에서 약속된 산 씨인 이삭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맹세의 씨가 되는 위인도 사라같은 며느리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맹세로 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단지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아닌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며느리 찾기 작업에 하나님의 사자가 친히 인도한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는 결코 아브라함의 소원이나 듣고 아브라함의 한이나 풀어주는 분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파견된 분이기에 하나님의 맹세만을 고집하는 천사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고자 하는 일은 아브라함 개인의 취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것이 자신의 욕구 달성을 목표로 두고 있는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확정된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라같은 여인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겁니까? 아브라함은, 전에 자신이 살았던 본토 아비 집을 지목하고 거기서 자신과 같이 나올 수 있는 며느리를 찾았습니다. 그것하고 약속의 씨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아브라함이 전에 살았던 땅의 사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여호수아 24: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상은 대대로 '다른 신'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신'이라는 표현은 어떻게할 때 성립되는 겁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등장해야만 가능한 표현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새롭게 등장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등장해서 일을 시작했고 그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외칩니다. "절대로 우리들은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아니된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을 신들을 향하여, '다른 신이니 절대로 섬겨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집단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새삼스럽게 만들어진 낯선 집단 뿐입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악마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지구상에 예수라는 분이 새삼스럽게 등장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4:12에 나오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는 말씀이 주장되니, 이 기준에 의해서 석가모니나 공자같은 인물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십계명 제 일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전에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그 땅과 지금 하나님의 맹세에 주도되어서 들어와 살게 된 이 약속의 땅을 명백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겁니다. 어떤 여인이 며느리가 되어야 약속의 씨를 배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여호와의 맹세에 의해서 인도받는 여인만이 약속의 씨를 배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라처럼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작용해서 사라는 죽은 태에서 산 생명을 잉태했고, 나중에 그 아이가 커서, 죽을 자리에서 도로 살아났습니다. 이런 여호와 맹세의 위력이 없고서는 결코 약속된 씨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전에 자기가 살던 본토 아비집의 신에 머물러 있다면 그가 보여주는 씨라는 것은 기껏해서 아스마엘이나 자기 종인 엘리에셀을 내세우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의 씨가 될 수 없습니다. 맹세가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안절부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 지를 잘 몰라서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이 맹세한 대로만 일하시고 그 밖으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점을 감잡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감잡았습니까? 오늘날의 씨는 예수님입니다. 모든 축복과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짐이 확정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드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롭게 등장해서 우리 자신들을 변화시킨 그 하나님의 맹세를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