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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24: 57-60 /여성의 사랑성경창세기

창세기 24: 57-60 /여성의 사랑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여성의 사랑
2002년 9월 8일
본문 말씀: 창세기 24: 57-60

24:57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24: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24: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창세기 3:15에 보면, 악마의 정수리를 치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남자의 요소가 주도적이 아니라 여자의 요소가 주도적으로 작용해서 악마를 이긴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여자'라는 말을 집어 넣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여성이 낳기에 당연히 여자의 후손이 아닐까로 여긴다면 오산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두 남성의 후손일 뿐입니다. 즉 남성의 요소가 주도적으로 전달된 자손입니다. 이런 자손들로서는 도저히 악마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성적 요소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60절에 보면,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막 혼담이 성사되어 멀리 시집으로 떠나는 누이 동생을 보고 오빠가 말하기를,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라고 합니다.

원수의 성문을 얻는 것에 왜 여성이 가담해야 한다고 봅니까? 대적의 문을 얻는 것은 남편될 이삭의 임무가 아닙니까? 그리고 여성이란 단지 그 남편과 관계해서 자식만 낳아주면 그만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며느리를 가까이 있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구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약속된 씨를 생산할 때는 남편이라는 남자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약속을 주신 하나님만이 개입할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 성취의 법칙은 남편되는 자에게 알려주어서 그 남편으로 하여금 약속의 목격자, 내지는 약속의 증거자가 되게 합니다. 원래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이 엄연히 있는대로 불구하고, 악마를 이기는 것을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라고 못박은 것은, 그 전에 있었던 부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남기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은 여자를 얻게 됩니다. 이 여자로 인해 아담은 '인간 전체'라는 입장이 아니라 비로소 한 남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난 뒤 이 한 몸은 깨어졌습니다.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직접적으로 악마를 대했던 여자 쪽에서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책임집니까? 여기서부터 여인은 고통을 안게 됩니다. 이 고통은 남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또한 이해 할 수도 없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은 무엇입니까? 누구를 지독하게 사모하는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성과 남성은 확연하게 달라지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여성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라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그 남성의 세계 안으로 소멸되어 버립니다. 비록 자신이 세상적으로 명예심을 크게 얻고 우대를 받는 입장에 있다할지라도 여성이 진정 원하는 것은 원없이 사랑하고픈 남성을 만나 그 남성의 세계 안에서 자신을 재규정하고 싶어합니다.

즉 독자적으로 위대한 여성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한 남자로부터 독점적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여성에게는 이상스럽게도 여러 남성이 필요치 않습니다. 옛날 어느 설화에 보면, 어떤 사람이 연못가에서 벌목하다가 도끼를 그만 연못에 빠트렸습니다. 그 때 물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서 묻습니다. "이 금도끼가 네 도끼냐?" 또 묻습니다. "이 은 도끼가 네 도끼냐?"

그러나 나뭇꾼은 비싼 도끼를 마다하고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때 산신령이 세 번 째 쇠 도끼를 가지고 나와서 하는 말이 "이 도끼가 네 도끼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고 욕심없는 이 나뭇꾼에게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어느 부인이 남편을 물에 빠트렸습니다. 그 때 산신령이 나와서 하는 말이, "이 잘 생긴 박서방이 네 서방이냐?" 그 정직한 여인은 "아니올시다", 다시 두 번째 힘 센 김서방을 데리고 나와서 하는 말이, "이 김서방이 네 서방이냐?"하니 정직한 여인은 다시 말합니다. "아닙니다. 제 서방이 아닙니다."

다시 세 번째로 이 서방을 데리고 나오니, 그 때 이 여인이 하는 말이 "저 분이 제 서방입니다"하고 하니 산신령이 하는 말이, "너는 참 정직한 아낙네구나 네 서방 말고 앞의 두 서방하고 다 함께 살아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 정직한 부인에 대한 충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여성은 자신의 전부를 바친 그 한 남성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얻어내는 것이 생존의 목적입니다. 이처럼 여성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하나만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필히 다른 하나는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을 대하는 남성은 여성의 마음과 또 다릅니다. 남성은 이러한 사랑을 모릅니다.

그저 힘의 논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아니라 여러 여성하고도 얼마든지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하면 그 남성은 도리어 그 여성의 사랑을 이용하려 듭니다.

동등한 사랑의 관계라는 것은 죄 짓고 난 뒤 이후에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성은 한 남성을 지독하게 사모하게 되고 남성은 그런 여성을 힘으로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성은 그런 남성과의 관계에서 자식을 생산해도 또 거기서부터 고통이 시작됩니다.

즉 여성의 사랑이 결국 이 지상에서는 고통의 모습으로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런 여성의 요소를 안고 '여자의 후손'이 등장합니다.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의 속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일부만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을 향해 전부를 바쳤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진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우리들은 누구에게 사랑하라든지 헌신하라든지 하면, 그냥 자신의 것을 내놓고서 하는 말이, "나는 내 것의 전부를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빈 몸이 되었다. 이 얼마나 장하고 위대한 행위이냐"하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비움'을 자랑스레 과시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끝까지 관심갖고 돌보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냥 목숨만 던져놓고, "나는 내 쪽으로 내놓을 것 다 내어놓았으니 그 다음 차례는 너희들 차례이다"라고 협박조로 나서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여성은 약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약자입니다. 남성이 요소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는 힘이 없는 약자들은 늘 패배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자가 희생자가 되어야 악마의 정수리를 치는 겁니다.

힘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랑을 제시해놓고서 그 사랑에 역겨워 하는 태도를 보이는 악의 세력을 완벽하게 처단하는 방식으로 치는 겁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여성에게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전폭적으로 한 남자를 사모하면서 평생을 다 희생하는 그 사랑을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19:1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는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슬기란 여자가 살림사는 재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에 대한 일관성있는 사랑의 모습은 하나님 사랑과 본질이 통하는 겁니다.

남자에 대한 여성의 사랑이 어떤 때는 맹목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어리숙하게도 보이겠지만 그런 마음은 오직 힘만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에게는 나올 수 없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너무나도 힘들게 보이면서도 자기 백성을 향한 지독한 사랑의 힘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쉽게 예수님의 사랑을 이용만 하려고 합니다. 즉 "예수 믿으면 구원시켜 준데. 그러니 일단 믿어놓고 보자"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마치 아내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않고 그저 성실하고 어진 가정부하나 데려놓은 것으로 마음껏 이용해 먹다가 세상 돌아가는 것이 평소 마음먹은 대로 안돌아가면 그 불만을 나약한 아내에게 폭력으로 다가서는 것과 같이, 오늘날 소위 신자라는 자들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 우리는 힘이 아니라 오로지 충실한 신부로서 헌신적 사랑으로 마중나가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사랑도 모르면서 그저 내 구원에 이용해 먹으려고 예수님을 거론했다면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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