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20-26 /이삭의 후손
이삭의 후손 2002년 9월 15일본문 말씀: 창세기 25:20-26 25:20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5: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5: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5: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세이었더라 자식이 없을 때 우리는 그 가문에 있어 비극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자식이 생겨나게 되면 그 가문의 영광이요 축복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비약속의 계통해서나 통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생겨날 가문은 이와 정반대이어야 합니다. 육적인 힘에 의해서 자식이 태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육적인 것에 완전히 희망이 단절된채 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약속만이 담겨서 생겨난 자식이어야 합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사라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과 결혼했지만 20년 동안이나 자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간구했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많은 씨의 원천이 될만한 자식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식을 잉태하고 보니 예상치도 못한 일도 겸하여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즉 어떻게든 자식을 가질 것만 생각했다가 그 생긴 자식으로 인해 진정한 약속의 후손 결정에 있어 혼돈이 있다는 것을 감히 상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을 임신했을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촐하게 하나만 쏙 나왔기 때문에 약속의 자식을 결정하는데 전혀 혼란스러울 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장자와 차자가 미확정된 채 출산하는 경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장자는 완벽하게 독립해서 먼저 나왔다'라고 할 수가 없겠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나왔습니까? 현재 진행형으로 나온 겁니다. 즉 두고 볼 문제이다는 겁니다. 한 번 장자가 영원한 장자라고 미리 단정지울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오늘 본문에서 나와 있습니다만 그러나 누가 큰 자인지 누가 작은 자 인지 그것조차 미결정된 상태입니다. 스스로 작은 자라고 자청해서 큰 자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섬김받는 큰자로 전환될 것을 노릴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현재로 알 수 있는 것은 서로 싸우는 중이며 자신의 위치가 뒤바뀌는 역전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보통 한 개인의 운명에 관한 예언은 단순합니다. 그러나 두 개의 운명체가 서로 꼬이고 대립되는 입장에서 그 둘의 운명 전체를 한꺼번에 표현할 때는 혼란스럽기 마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이런 상태로 임신시켰을까요? 이삭에게 일어난 일을 보게 되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확인하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식으로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리브가의 쌍둥이 임신이 이번에는 이삭과 리브가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신앙을 바로 정립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삭의 경우,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 세계는 그 자체가 악이요 죄입니다. 따라서 '있음'으로는 '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죽음만이 창궐하고 통치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태어나게 해서 그 이삭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이유와 그 해결책을 알게 한 겁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번제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고 죽음 조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동원된 이삭이라는 인간은 '있음'의 세계에서 나온 자가 아니라 '없음'의 세계에서 나온 인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약속이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의 아이디어는 모두 '있음'의 세계의 작품일 뿐입니다. '있음'으로는 '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삭을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 인간 세계는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세계임이 판명났고 부활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확정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비약속의 사람들은 아무리 번창하고 오래 살아도 약속 밖에 있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장자로 삼았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나도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뜻에 준하는 장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장자란 세상의 악함과 그리고 그곳에서 구원됨을 성사시킨 중심 인물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그 이삭 이후에 또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게 될 장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자식 하나만 나온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둘이 나옵니다. 그것도 서로 붙들고 한창 싸우는 채로 나왔습니다. 누가 복을 제공할 약속된 장자인지 미완료된 상태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둘 다를 키웁니다. 물론 분명 둘 중의 하나는 가짜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가짜 자식도 함께 키우게 합니까? 그것은 이삭 부부가 이제부터 또다시 새롭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건성으로 "예수님을 안다, 하나님의 안다" 라고 하면서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혼란스럽게 고통스러운 각가지 일들을 유발시킵니다. 과연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를 점점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스스로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다가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좌절에 빠집니다. 사실 복음을 아는 자는 좌절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는 이미 완료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낙심을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서 그런 예상 상황까지 일일이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아무리 생동감있게 말씀드려도 본인이 체험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 지식으로만 수납될 뿐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안다, 안다"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쌍둥이 임신처럼 막상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면 그동안 알았던 복음은 기껏 지식으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모든 것은 탐욕적인 본심으로만 움직이는 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이삭의 두 자녀들처럼 치열한 싸움을 벌리는데 그 벌리는 싸움이 복음을 빙자한 각자의 오기 싸움이요 명예 싸움이요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게 마련입니다. 흔히 환란이요 고난이라고 말들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자기 자신에게 참혹한 환란의 시기가 닥쳐 올까봐 미리 염려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환란이란 것은 없이 지내고 병들어야만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가지면 가진 자로서 환란이 따르고, 건강하면 건강한 자로서 염려되는 환란이 또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환란속에 사실상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평소의 우리들의 선입견이나 생각들이 순수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축복에 대해서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은, 그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인간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예상을 빗나가는 일들을 일으켜서 그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다가 새로운 사태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해 왔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더러운 인간을 위하여 사랑하사 십자가에 대신 올라가셔서 죽었다는 그 희생을 생각해 볼 때, 다시금 예수님의 고귀함과 가치를 더 깊게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 무엇이 축복이고 무엇이 사랑이겠습니까? 결코 성도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것이 축복이 아니요 하늘의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저 못난 자신을 위해 베푸신 보혈의 피가 진정한 축복이요 사랑일 뿐입니다. 교회 부흥을 외치고, 몸 건강을 부르짖고, 행복한 가정 꾸미기에 예수를 거론하는 것들이 얼마나 복음을 모르는데서 비롯된 열매임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큰 환란 두려워하지 마시고, 난데없이 큰 돈이 들어온 것에 의미를 두지 마시고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란과 사명이나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예상 밖의 일이 터지는 것은 그것을 계기로 다시 참된 복음으로 돌아가서 그것으로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