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27-34 /장자권
장자권 2002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창세기 25:27-34 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5: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25: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25: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25: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을 보게 되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장자의 명분의 경홀히 여기면 이 꼴이 된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요즈음 세상에서 장자권이 무어거리 대수입니까? 무어거리 중요한 권리라고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장자권을 가졌다는 것이 큰 벼슬이라도 한 겁니까? 그토록 주위로부터 부러움을 살만한 일입니까? 오늘날의 정서하고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나 이런 관점으로 인해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에서와 같은 취급받게 되면 우리만 곤란해질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왜 장자권을 하나님이 중요시 여기는 가를 꼭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에서의 장자권은 순전히 자신들이 가문 보존을 위한 겁니다. 즉 장자는 그 세대에 있어 그 가문이 존속됨을 보이는 대표자 역할을 하는 겁니다. "우리 가문은 아직 죽지 않았서, 나를 보란 말이야. 나는 우리 가문의 장자로서 이처럼 버젓이 존재하고 있잖아. 그리고 나에게도 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차후에 우리의 가문의 유지시켜 줄 인물이야. 오 신이시여 우리 가문을 영원하게 하소서. 이것이 우리 가문의 영광이로소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가문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너의 가문에만 장자가 유지되는 줄 아느냐 우리 가문에 엄연히 장자가 존재한다. 오, 신이시여 우리 가문도 영원케 하소서. 이것이 우리 가문의 영광입니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각자 각자 계속 지속되는 가문 속에 자신들이 존재하므로서 신으로부터 저주는 받지 않고 오로지 축복의 대상으로 유지되는 가문으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이렇게 가문 자체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 가문에 속한 모든 이가 신으로부터 축복의 대상이 된다고 보자는 겁니다. 따라서 가문의 영광이냐 아니면 가문의 소멸이냐 하는 것은 장자가 튼튼하고 총기있게 장자다운 지도권을 행사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장자되는 자가 부실하면 그 가문의 장래도 어둡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장자권'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전에 이미 인간 세계에서 장자권의 고유의 위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장자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출애굽기 13: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지시는 막 유월절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입니다. 유월절 때는 애굽 장자이든 히브리인들의 장자이든 모조리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죽음을 당할 특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장자들은 구사일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준 규칙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을 대신 잡아 그 피를 죽음의 사자가 찾아드는 문설주에 발라놓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므로서 그 집안에 있던 장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나게 된다는 규칙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그것으로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 히브리인들의 장자를 하나님의 장자로 삼겠다고 도로달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출현하는 하나님의 장자는 기존의 인간들 족보유지의 확인차원에서 거론되는 장자관과 다릅니다. 기존의 자기 족보가 잘 지내고 있느냐 없느냐를 장자의 안녕을 통해 파악하겠다는 시도는 새롭게 등장된 하나님의 장자들로 인하여 무용지물이 되고 만 겁니다. 즉 "너희에게는 어린 양의 희생의 원칙이 묻혀있는 하나님의 장자가 파견되어 있느냐? 만약 없다는 너희들의 신세는 애굽 집안 꼴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장자란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 족보에 집착해서 자기 족보 살리기에 급급하지만 그런 노력조차 하나님은 올바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몰살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 가족에게는 그런 저주가 임하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아브라함 자체가 하늘의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장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창세기 12:3를 봅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여기에 나와있는 축복과 저주는 아브라함이 사적인 차원해서 혹은 자신의 가문의 차원에서 결정짓는 축복과 저주가 아닙니다. 하늘의 축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등장합니다. 어쨌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 이와같은 신분이 어찌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이삭에게만 마찬가지로 해당됩니다. 창세기 22:18에 보면 이삭도 역시 축복의 중심 인물로 등장됩니다. 그런데 하늘의 축복의 특징은, 저주와 반드시 병행된다는 겁니다. 즉 저주 쪽에서 볼 때만 축복이 축복답게 되고, 축복 쪽에서 볼 때만 왜 저주인가가 밝혀지기 때문에 다같이 저주없이 축복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축복 축에도 들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축복이 아닙니다. 지금 인간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자 그런데 야곱이, 할아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진 위상이 하늘의 축복와 저주가 통함을 잘 알고 있었는데 거기에 비해 에서는 전혀 그런 것에 감잡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에서는 자신이 당연히 먼저 태어났으니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장자되었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영원한 장자권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의 장자권에 도전하는 저주받을 장자권으로 보는 겁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기 위해서 로마서 9:10-13를 들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여기에 보면, 야곱의 장자됨은 이미 그들 형제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되어 버린 사항입니다. 하늘의 장자라는 것이 결코 그들의 차후에 지상에서 착함과 선행에 의해서 굳혀지는 것이 아닌 겁니다. 취소될 문제도 아닌 겁니다. 이미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기로 결정 내린 채로 이 두 인물이 지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랑이란 미움과 동반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움이란 사랑과 동반하는 경우에 한 해서만 하나님의 미움이 얼마나 냉혹한 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에서를 이 지상에 먼저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들조차 생물학적인 면에서 누가 보더라도 에서가 장자가 될 것이 뻔하고 이 자연적인 형제 서열은 그 어떤 경우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뀐 겁니다. 왜 그렇까요? 그것은 하늘에서 정해져 버린 장자권은 지상에서의 자연적인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일부로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즉 지상의 세계는 뭔가 엄청나게 잘못된 세계인데 그 잘못된 세계의 허점이 어디서 드러나는가 하면, 그저 자연적인 서열만이 장자로 결정된다는 사고 방식을 통해서 알려진다는 겁니다. 지상에서의 자연적 서열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하늘의 하나님이나 둘 다 "한 번 장자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바뀌는 식으로 장자가 결정되도록 이삭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작용하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예언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예정된 일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등장하겠지요. 즉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거부하고 싶은 자들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 자가 바로 에서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 자체에 부족한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팥죽에 바뀌는 그런 장자권은 아닐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자권 자체의 의의는 생각지 않고 자신의 자연적인 장자됨에 집착한 겁니다. 히브리서 12:16에서 이렇게 에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는 도대체 장자권에 대해 어떤 점을 오해해서 이런 망령된 행위를 한 것입니까? 그것은 축복이 저주와 병행한다는 것을 무시한 겁니다. 창세기 27:38에서 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최후의 항변을 합니다.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이 대목에서 '빌 복이 이 하나뿐이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축복 곁에는 저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저주만 임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물론 예정되지 않는 자는 이런 하늘의 규칙을 경멸할 뿐이겠지요. 그것이 곧 에서의 본색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 양의 피로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 자체를 영원한 축복이라고 간주하게 하옵소서. 동시에 자동적으로 어린 양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되기 위해 출생한 자인 것으로 제대로 정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