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27-29 /축복과 저주
창세기 27:27-29 /축복과 저주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축복과 저주
2002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27:27-29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순전히 인물 중심으로 주어집니다. 즉 내가 어떤 사물을 얼마만큼이나 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저주의 중심되는 인물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정 우리가 축복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중심 인물을 내 마음 안에 꽉 박히기를 바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된 세월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 주인공이 교체되기 보다는 차라리 나에게 막대한 돈이 생겨서 그것을 본인선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축복된 것이라고 간주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본인이 만든 작품이기를 원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축복에 대한 오해는 오히려 축복의 중심 인물을 도리어 배척하고 저주하기 쉽상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평소에 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같으면 이 말씀은 참으로 쉬운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이것은 참된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즉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는 나름대로 존경할 만한 영웅들이나 유명 인사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을 다 버리고 오직 먼 중동 지역의 소수 민족에 불과한 유대인의 메시야를 다른 민족들이 사랑하지 아니했다고해서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 고민입니다. 무엇보다도 특히,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최고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 중인데, 옛날 2000년 전에 먼 타국에 나타났던 나사렛 예수라는 젊은 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그동안 선행과 성실함을 불문에 붙이고 영원한 지옥불로 던져지게 된다는 점을 과연 쉽게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저런 점을 고려해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이 야곱에게 떨어지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주'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떨어지게 한 축복의 내용은, 야곱이 '주'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은, 이 '주'의 위상을 말해주는 겁니다. 야곱이 아무리 거부가 된다 할지라도 야곱을 저주하는 자에게 실제로 하늘의 저주가 떨어지지 아니하면 야곱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합니다. 정말 '주'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인물이 된 것, 그것이 바로 축복의 중심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주의 자리가 어떠한 지가 역시 29절에 나오는데 그 내용이 복의 당사자인 야곱에게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목을 다시 봅시다.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라는 대목이 좀 이상스럽지 않습니까?
지금 야곱에게 있어 형제는 오직 에서 한 사람 뿐입니다. 따라서 '형제들'이라는 말은 야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말도 어울릴 턱이 없습니다. 야곱에게 많은 형제들이 있어 모두 야곱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럴 형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런 축복의 내용을 내리시게 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25:23에서 풀립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예언은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의 장래 운명에 대해 이미 결정되어 버린 사실에 관한 겁니다. 여기에 보면 야곱과 에서의 운명은 단지 그들 당대에 끝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탄생될 국가 단위에서는 계속 이어질 문제라는 겁니다.
그것을 멀리 내다보는 상태에서 이 두 아기들은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예언에서 특이한 점은, 먼저 된 자가 먼저 되고 나중된 자가 나중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두 민족 사이에는 주인과 종이라는 어떤 서열이 확립이 되는데 결코 큰 자가 계속 주인이 되고 작은 자는 계속 종이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도리어 대역전이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끌고 가시는 겁니까?. 그것은 기존의 인간들의 마음 가지고서는 잘못된 축복과 저주관을 그대로 간직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잘못된 축복관은 곧 잘못된 저주관입니다. 축복, 축복을 원하지만 실제로는 계속 저주, 저주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축복관은 축복의 중심 인물인 '주'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를 불러 이르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대로 진정한 '주'의 모습은 야곱에 의해 비로소 나타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의 내용이, 야곱에게는 해당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에게는 '형제들'라는 다수의 형이나 동생들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이 축복의 내용대로 과연 하나님이 제시한 축복 중심인물은 어떤 형태의 '주'로 등장되는 겁니까?
이점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에서의 후손과 야곱의 후손을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 36: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그 뒤의 말씀은 에돔이라는 나라가 어떤 후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같은 취지로 적은 창세기 37:2의 말씀을 봅시다.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이 '야곱의 약전'이라고 해놓고서는 대번에 요셉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당사자는 분명 야곱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그 축복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이 성취됩니다.
그러나 야곱의 인생에서 야곱에게 내려진 축복을 달성하게 한 실무자는 야곱이 아니라 놀랍게도 요셉이라는 아들입니다. 이 요셉에게는 숱하게 많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2장에서 이 형제들이 같은 형제인 요셉에게 절을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요셉은 사태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창세기 45:9에서,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셉을 '주'가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일생을 처음부터 '주'다운 길을 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이상한 꿈을 꾸니까 형제들은 무척이나 그를 싫어했고, 급기야는 그를 미운 존재로 간주해서 애곱의 상인에게 팔아넘깁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꿈이 요셉의 운명을 조정합니다. 요셉이 연이은 험난한 인생의 길을 거쳐서 결국에서 '주'다운 위치에 오른 것은 그 배후에 야곱에게 이미 내려진 축복의 내용이 있었던 것입니다. 비로서,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요셉에 굴복한 것입니다.
사실은 요셉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굴복한 것이 됩니다. 즉 에서의 후손의 나라인 에돔이 에서의 저주 요소로서 구성된다면 앞으로 야곱에 의해서 세워질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런 요셉의 일생이 보여준 '주'요소로서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된 자를 먼저되고, 나중된 자를 나중되는 상식선에게 이들 가족을 인도하지 않으신 것은, 인간들 속에서 잘못된 축복관념과 '주' 관념이 이미 장악하고 있음을 염두고 두고 하신 조치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보면, 메시야의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습니다. 모든 이들이 싫어할 만한 모습으로 메시야는 등장합니다. 메시야가 수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마치 요셉의 길을 가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이 모든 운명을 '주님'으로서의 당연한 면모임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가진 험난한 고생길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그저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이용해 먹을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집어 넣은 탐욕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지금이나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들이 노리는 축복이 모두 우리의 욕심의 산물이라면, 진정 축복된 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 뿐입니다.
"저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이런 자가 되지 아니면 저주받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잘못된 축복관으로 애꿎은 예수님이 수모를 당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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