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8:10-15 /야곱 위의 사다리
창세기 28:10-15 /야곱 위의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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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위의 사다리
2002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28:10-15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28: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고향, 자신의 뿌리를 찾겠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의 결정지울 요소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하고 난 뒤에 당부하기를 고향에서 배필자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그곳 가나한 땅의 여인들을 대단히 싫어해서 고통스러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갑니다. 축복의 원천지를 찾아가는 겁니다. 옛날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불러내셨던 그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축복의 원천을 어디서 찾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주위가 온통 기독교 집안이요 기독교 분위기라면 그 자체로서 축복이 주어질 것같은 느낌을 갖게 마련입니다. 결혼을 해도 기독교 집안과 결혼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추가적으로 더 주어질 것같은 기분에 잠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신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고 다같이 노력하는 중에 있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외삼촌 집으로 찾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이동입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날이 저물었고 어느 지점에서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꿈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하늘에 닿아있었습니다. 즉 축복의 통로가 고향 동네인 외삼촌 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축복의 장소는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받았던 축복의 본 내용을 서서히 공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닥다리가 내려왔다는 것은, 사닥다리 윗 동네와 사닥다리 아랫 동네가 따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 동안 윗 동네와 아랫 동네 사이를 이어주는 그 어떤 연결점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야곱의 사닥다리가 주어지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축복 이외의 영역이 당연히 저주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모든 축복된 상태는 이 인간들의 세상인 아랫 동네가 아니라 윗 동네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그동안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곧, 밑의 동네에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윗 동네에 잠입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밤에 받았던 이 축복의 사닥다리 외에는 그 어떤 천국의 층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점도 분명해졌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은 하늘을 향해 높은 건축물을 건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친히 하나님에 의해 그 의도는 무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기어올라오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의사표시입니다. 자, 지상에 그대로 있다가는 저주을 받고, 또한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모험을 시도해도 하나님은 거부해 버리시고, 이런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실정입니다.
개인적인 인간의 삶을 추적해 보세요. 어릴 때 사진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사진을 같이 놓고서 빠른 시간으로 훑어보세요. 인간의 본질이란 결국 해체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생기 넘치고 건강할 때는 이 건강과 생기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요.
그러나 꽃이 시들 듯이 곧장 딴 얼굴로 변모되어 갑니다. 마치 꽃이 활짝 필때는 거기에서 꽃의 초라한 시듦의 모습을 찾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야곱도 이런 인간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기 머리 위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비로소 자신이 저주의 사람이 아니라 축복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하늘의 문'이라고 짓습니다. 하늘의 문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향하라고 있는 겁니다. 축복받는 자외에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으로 들어오라고 하나님께서 출입문을 허라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겪었던 이런 체험을 보고서 우리들도 부러워서 동일한 꿈이 제공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꿈의 체험을 요구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 다룸은 다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구원하시면 똑같은 경우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동일한 경우를 맞이해야지만 우리가 구원된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맏아들을 바쳐야 하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돌팔매질을 잘해야하는 겁니까? 그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동일한 구원의 원칙을 고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어떤 형편에 있느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 구원의 원칙은 야곱이 받은 축복의 원칙과 일치되는 겁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에서 홀로 있더라도 이런 축복과 구원의 원칙을 제공받은 자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대목을 잠시 보겠습니다. 47-51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나다나엘보고 하는 말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새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 곧 야곱이 축복을 받은 상태에서 나온 축복의 피조물에게 붙은 이름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하게 된 것은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생겨나는데 이 국가도 또한 야곱이 받은 축복의 관리 하에 있게 됩니다. 그 축복이 바로 '사닥다리' 축복입니다. 저 윗 동네에서 사시는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사닥다리말입니다. 이 축복 외에는 저주뿐입니다. 축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 저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다나엘보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칭찬인 줄을 짐작하시겠지요. 그런데 이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마음씨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나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각가지 부귀영화에 눈독 들일 만도 한데, 이 나다나엘은 마음에 담겨 있는 소망이란 딴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오실 메시야만 있다는 자기는 족하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 나다나엘을 보고 "마음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간사하지 않다', '간사하다'를 이런 기준으로 측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임금됨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전하십니다.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야곱이 받는 축복을 그대로 인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보았던 그 사닥다리의 실체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야곱처럼 꿈 속에 사닥다리가 보이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진정 간사한 마음이 없이 이 땅에서 누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비행기가 겉으로 그럴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집해서 탑승을 해도 엔진이 없는 뜨지 못하는 법입니다.
참된 교회란 교인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만이 증거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바로 이 점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축복 속에 놓여 있는 신자임이 분명해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도 간사한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야곱의 축복을 시시하게 보고 세상적인 야망을 축복인양 오해했습니다. 저주에서 벗어난 것만해도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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