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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28:16-22 /야곱과 성전강의창세기

야곱과 성전 2002년 11월 3일 본문 말씀: 창세기 28:16-22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28: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8: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체험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체험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튀어나오게 하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율법이 모든 인류에게 공히 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즉 이방인들에게는 지킬 율법조차 없는 겁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을 사랑해서도 아니요 이방인들을 미워해서도 아니라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작업에 선택되어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대인의 역할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도 해내게 됩니다. 야곱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체험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은 대단히 감격했습니다. 따라서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성의껏 해드릴 만한 것들을 가지고 자진해서 맹세를 해댑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의 반응이 곧 모든 인간성의 원천을 장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영구히 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으로 야곱이 생각해낸 것은 "성전 지어 드리겠다"는 제의입니다. 어찌 보면 대견스럽고 가상히 보이겠지요?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받은 체험을 고정화 하겠다고 그 지역을 신성시합니다. 우리가 아다시피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고 어떤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고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막상 어떤 사람이 특정 장소, 예를 들면 어떤 기도원이나 교회 본당 앞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느껴지면 그날부터 그 지점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발생됩니다. 소위 유식하고 성경에 해박하고 배운 자들이 많다는 교회에서조차 어떤 분이 자기가 계시받은 체험을 자랑하면 듣는 사람들은 속으로 대단히 부러워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만 아무개야 네가 앉아 기도하는 그 땅에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그 교회는 크게 부흥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간증을 늘어놓으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유식하든 무식하든 상관없이 "왜 하나님은 불공평스럽게도 나에게 저런 멋진 체험을 안주시나"하고 질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그 사람이 경험했다는 그 체험 만들기에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대단히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음을 보이기 위해 사전에 이스라엘의 유구한 역사를 통해 특정 인물에게 각가지 신비체험과 율법을 유대 나라에 주신 겁니다. 그 잘못된 반응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결심입니다. 야곱은 특정 지역이 자동적으로 하늘의 복과 신성한 능력이 작렬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생각은 28:15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에서 야곱은, '이 땅으로'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쨌든 이 곳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실현됨이 분명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28:15의 뜻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대목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을 붙잡고 해야할 일이 있고 그 작업을 마무리 할 때까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달라짐에 대해서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 지역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베고 잔 그 돌를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을 붓고서는 성전의 개시를 알립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라는 몸짓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십일조를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내려진 사다리 꿈은 야곱쪽에서 뭘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다리는 순전히 천사들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층계입니다. 야곱이 축복의 사람이 되고 아니되고 천사들, 즉 천사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는 문제였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맹세합니다. 20절에 보면,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합니다. 흔히 우리들이 저지르는 행동양식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 자기 쪽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드릴테니 최소한 자신들의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어 달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려면 일을 할만한 최소한 환경조성을 해달라는 겁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껏 헌신하고 실력발휘 할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객기들이 나중에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대로 야곱을 다루면서 모든 것이 다 망가집니다. 그리고 다시 본 땅으로 돌아올 때는 다리를 저는 장애자가 되어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동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란 결국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이 담긴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전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이란 공간이나 특정 지역이 아니라 그 인물 자체를 성전만들겠다는 겁니다. 신약 때에 와서 고린도전서 3:16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마치 꾸중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이 내세우는 자기 주장은 사실상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전에 뿌리채 뽑혀야 될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독차지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한 그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주택을 당분간 비워놓고 멀리 미국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떠돌이 가족이 그 집이 비어있는 것을 알고서는 몇 달간 그 집에 들어가 주인처럼 함부로 삽니다. 드디어 어느날 집 주인이 돌아옵니다. 밤인데 자기 빈 집에 불이 켜인 것을 보게 됩니다. 부엌에는 주방기구가 가득한 것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안방에 들어가니 장롱까지 있습니다. 주인은 당연히 역정을 냅니다. "나가시오. 이 집은 내가 살 집이오" 그렇게 하니 도둑으로 들어와서 살고 있는 사람이 사정을 합니다. "주인님 같이 삽시다. 한동안 제가 이 집에서 충실히 살아서 이 집의 사정을 저도 잘 압니다. 제발 쫓아내지 마시고 저하고 협력해서 삽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어림도 없습니다. "당장 나가시오" 그러나 도둑가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제가 와서 집안 청소도 깨끗이 해놓았고 화장실도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았습니다. 앞으로 제가 행동을 더욱 더 착하고 깔끔하고 바르게 살테니 제발 나가라는 말씀만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이런 제안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이 집은 내만 독차지하라고 지은 집이야. 당장 나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은 성령님이 독차지하는 세계이지 결코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유지되는 집이 아닙니다. 흔히 자칭 성령받은 성전이라고 자청하면서 다른 사람과 차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나는 성령님이 임해 있는 움직이는 성전이란 말이야. 따라서 나를 저주하면 저주받아 알겠지" 그러나 이런 사람은 참된 성전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이 된 사람은 남하고 비교할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차고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린다. 내 마음은 내가 차지해야 돼. "라는 도둑 의식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마음 속에는 쉴새없이 주인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평생이 다가도록 말입니다. 이런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 속에 성령님이 계시는 구원받은 자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들로 하여금 착한 분량만큼 자기 마음 자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음 전부다 성령님이 친히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면서 마음이 성령 주관하에 놓여서 인도받기를 고대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나가는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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