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9:31-35 /자식 욕심
창세기 29:31-35 /자식 욕심
이름 : 우리교회(IP:219.249.86.250)
자식 욕심
2002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 창세기 29:31-35
29: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29:32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구원이란 인간의 육적인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이 임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육으로는 가능치 않습니다. 육은 어디까지 육으로 종결될 뿐입니다. 종결 될 때는 꼭 죽음의 모습이 되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육에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입니까?
현재 우리들이 자신의 잘못을 일일이 끄집어 내어 반성하고 점검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개선할 수 있는 쪽으로 반성하기 때문이죠. 즉 "하나님, 저에게 이런 잘못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과오를 하지 않을 테니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실은 아직 들추어내지도 않고 밝혀지지도 않는 엄청난 죄악의 뿌리가 아예 상주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데 있어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육적인 요소를 우리들의 육적인 조건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는 한 아담으로 물러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죠.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어떤 육적인 문제성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인간사라는 것이 전부 지저분한 죄악의 진흙구덩이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성은 어떻게 피어날까요? 그것은 그러한 육의 최종적인 죽음의 안에서 그 죽음의 허무성과 더불어 은혜가 나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육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결코 죽음의 허무성을 인정치 않게 됩니다.
죽음의 허무성을 인정치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육이 원하는대로 하늘의 축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내 육이 당당하게 살아있는 이것이 하늘의 축복이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육과 육의 만남과 더불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누가 하늘의 축복을 보다 많이 따내었느냐에 대한 경쟁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자매가 나옵니다. 비록 레아가 언니이지만 사실 언니는 야곱과 동생이 정식 부부가 되는데 덤으로 끼어든 신세로 지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비록 야곱의 아내라고는 하지만 아내로서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생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자기 육적 존재의 가치성은 참으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육과 육의 만남 안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사실 자매는 모두 아기를 아직 갖지 못하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태의 열림과 닫힘을 조절해 버립니다. 남편으로부터 아내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랑도 받지 못하는 언니 레아가 졸지에 태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
레아는 이것을 남편의 사랑을 동생에게서 자기에게는 전환시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자랑삼아 외칩니다. "보라 아들이다". 그래서 이름이 '르우벤'이 됩니다.
하나님은 또다시 레아의 태를 열어 임신케 합니다. 레아는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동안 아내로서 마땅히 받은 사랑을 받지 못한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둘 째 낳은 아들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를 또 낳게 됩니다. 그래서 레아는 생각하기를 "남편은 이제 완전히 내게 묶인 존재가 될 것이다. 아들이 셋이나 나에게 있으니 말이다"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연합한다'는 뜻으로 '레위'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네 번째 아들을 갖게 하였습니다. 레아는 하나님께서도 완전히 동생편에서 내 편으로 돌아셨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다고해서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 스코아가 4:0입니다.
그동안 남편의 사랑만으로 흡족하던 라헬이 언니에게 자식이 줄줄이 생기자 육적인 욕심이 가동됩니다. 그래서 남편한테 항의합니다. 그러자 남편이 야곱이 하는 말이, "성태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물러 설 동생이 아닙니다.
육과 육은 필히 전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가지면 다른 쪽은 졸지에 패배자로 간주하기 마련입니다. 동생 라헬에게는 '빌하'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의 태를 빌리서라도 언니를 이기고자합니다. 꼭 아브라함이 약속의 씨를 얻기 위해 육적인 방편인 여종 하갈과 관계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헬은 이런 식이라도 하나님은 언니편이 아니라 자기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빌하에게 첫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이름을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주었다는 겁니다.
또 아들을 낳자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언니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자신이 이겼다는 겁니다. 이로서 스코아가 4:2가 되었습니다. 이런 동생을 보고 언니 레아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는 여종이 있고 그 여종을 통해서 자식을 추가적으로 갖는 수법은 자신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레아의 여종의 이름은 실바입니다. 실바를 통해서 아들을 낳는데 레아는 '갓'이라고 지었습니다. 나같이 행복한 여인도 또 있느냐는 겁니다. 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나처럼 되어야 기쁘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로서 스코아는 6:2가 되었습니다. 자매 사이의 축복 따내기 경쟁이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하루는 큰 아들 르우벤이 어머니를 존경해서 밖에 나가 귀한 식물로 사랑의 선물을 장만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보고 동생 라헬은 매우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언니보고 말하기를 "내 줘"라고 했지만 언니는 말하기를 "남편을 독차지 하는 것도 모자라서 자식이 준 선물까지 빼앗느냐"고 항의했습니다. 여기서 둘 사이에 흥정이 있게 됩니다.
일단 남편을 언니 방에 자게 하고 자신은 합환채라는 선물을 차지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언니는 또 자식을 갖게 되는데 그녀는 그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종까지 댓가로 바친 그 보상을 이 자식으로 돌려주신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 자식을 낳았는데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짓습니다. 자신은 더 이상 동생의 덤으로 끼인 아내가 아니라 이제는 정식 아내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이 자식으로 분명해졌다는 겁니다. 이로써 스코아가 8:2가 되었습니다.
게임이 끝난거나 진배없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나님께서는 패배자로 전락한 라헬의 태를 열어서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라헬은 다시금 경쟁의 전기로 삼습니다. 즉 아직도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시 싸움의 투지를 불태웁니다.
그래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패배자가 당하는 수치를 지워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라헬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에게 자식을 주시기를 고대했습니다. 어쨌든 스코아는 8:3이 되었습니다.
과연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요? 창세기 35: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라는 육은 죽음으로 치닫게됩니다.
이렇게 되면 계속 살아남은 언니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게 되고 경쟁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식을 낳아봤자 스코아는 8:4 밖에 안됩니다. 이래저래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라헬은 죽어가면서 출산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즉 '슬픔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속에서 잉태 되는 자식을 야곱은 달리 보고 있습니다. 결코 라헬의 마지막 자식은 슬픔의 자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최종 승리를 보여주는 자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수정합니다. '오른손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 베냐민'으로 바꿉니다.
야곱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육적인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가 결코 죽은 자에게 대해서 승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진정한 승자는 죽음 속에서도 자식을 갖게 한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즉 레아나 라헬이나 야곱이라는 육들이 자체내에서 승자 패자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이런 육의 우충좌돌에서도 그들에게 자식을 갖게 하셨던 하나님이 최종 승자입니다. 이러한 승자의 모습은 놀랍게도 슬픔을 안고 죽어가는 사랑하는 라헬를 통해서 비로소 제공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참된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사랑의 실체를 전달하신 겁니다. 구원이란 결코 인간의 육적인 욕망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들은 자신의 육적의 야심과 하나님의 일을 너무나도 안일하게 결부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개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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