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4:1-6 /야곱 아들들의 무변화
창세기 34:1-6 /야곱 아들들의 무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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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아들들의 무변화
2002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창세기 34:1-6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34:2 히위 족속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4: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34:4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 오기까지 잠잠하였고
34:6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축복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축복의 경계를 넘어 저주의 영역으로 이동될 수 없습니다.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않든 축복이 인도하는대로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입혀주는 축복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견해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람이란 본성상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뜻을 내던져 버려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이 고이 애틋하게 간직하고 거기에다 모든 포부를 걸은 그 찬란한 목표까지 내다 버리게 된다는 점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을 밀어냅니다. 둘 사이의 타협이나 흥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보다 우세합니다. 결코 인간의 뜻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란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뜻은 사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꼭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축복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하심입니다. 사람이 요구해서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에게 쳐들어와서 그 축복에 포로된 자만이 구원될 자라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야곱이라는 분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변화되었습니다. 야곱은 축복 속에 놓여 있기에 생겨난 그 결과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그 시대에 과연 야곱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일까요? 아닙니다. 야곱의 배에서 나오는 자식들과 또 그들에게서 나오는 후손들 모두에게는 야곱과 함께 있는 그 축복의 대상이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축복을 따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내린 그 축복이 이제 야곱의 후손에게 손을 뻗힌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다루었던 원리 원칙을 야곱의 후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켜 나겠다는 것이 야곱의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면 우선 야곱의 자식들은 어떻게 축복을 받았을까요? 그 시작되는 내용이 창세기 34장에 결쳐 나옵니다. 야곱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디나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야곱의 가족들은 남의 땅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없어 남들로부터 보호받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살려면 스스로 지켜내는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연히 정신상태도 대단히 예민해져 있을 뿐입니다. 물론 야곱은 이미 변화되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위력을 친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자식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네 식구들과 함께 있음을 그저 건성으로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신앙 변화를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누이 동생 디나가 토착민에게 강간을 당하고 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내린 처방은 한결같습니다. 철저한 복수뿐입니다. 또한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지탱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물론 변화되지 않는 자연적 죄성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빈틈없는 복수를 위하여 상대방을 속이게 됩니다. 토착민과 더불어 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하기로 협상을 하게 됩니다. 누이동생을 토착민에게 시집보내는 대신 그저 종교적 요식 행위 하나만 요구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보면, 할례받지 않는 자와 혼인이 금지되었지만 이왕 육체적 관계가 있게 되었고 혼담까지 오가게 되었으니 단지 신랑쪽 사람들이 모두 할례를 행해서 이번 혼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험이 없기를 바란다고 상대방에게 요구했습니다.
상대방은 상대방조차 이해타산을 계산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키운 모든 가축과 재산이 결국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마음이 맞아떨어져 혼인을 인정하고 토착민들의 모든 남자들은 일시에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3일 째 되는 날, 가장 고통스러워 남자들이 기동을 못하게 된 틈을 타서 이 야곱의 시므온과 레위라는 아들들이 달려 가서 디나를 강간한 그 남자와 그 집안의 어른과 그리고 여타의 모든 남자들을 다 처치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누이 동생 디나를 도로 데려오고 토착민이 갖고 있었던 양과 소와 나귀와 재물을 몽땅 다 뺏아버리고 맙니다. 과연 이것이 정의로움입니까 아니면 정의를 빙자한 인간적이 살인본능입니까? 내 것은 스스로 지킨다는 것이 과도히 되면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야곱의 아들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잘못이 없도록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거론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즉 남들 보기에 신앙적으로 보고 정의로움을 내세운다고해서 그 사람이 참 신앙가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런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축복을 하시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과 함께 자에게 내리는 축복도 이 원리에 준해서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5-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 대목은 야곱이 마지만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12아들들에게 각자 축복을 해주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축복이라면 온갖 갖고 싶은 것을 하늘에서 듬뿜 내려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상이 품고 있는 잘못된 정신을 낱낱이 지적하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해하는 기계'라고 야곱은 이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기계'란 무엇입니까?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고 절제도 없는 것이 기계입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말입니다. 따라서 다른 자식들이 이 자식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야곱의 축복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들이 지옥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축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된 품성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렇게해서 결국 그런 죄로 인해 누가 희생해야 하며 누가 그 죄를 대신 처리해야 하느냐를 보게 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남들보다 많이 가지는 것이 축복입니까 아니면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바른 안목을 갖고 있는 것이 축복입니까?
구원이란 내가 그 예수님을 알아주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고 데리고 다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지게 함으로서 이루어 나가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쌍한 고아 출신 사람이 고백하기를, "내가 세 살 때 옆집 아저씨의 손을 잡고 따라가지만 않았어도 그 때부터 나는 부모와 헤어질 일도 없이 당당한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 때 잘못된 인생노정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후회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때 부모와 함께 있었다고 자신의 구세주를 발견했을까요? 그런데 또 한 사람이 고백하기를, "제가 세 살 때 옆집 아저씨의 손을 잡고 따라가서 그 길로 고아가 되어 무진 고생을 했지만 어느 날 27살 때 예수님을 알게 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세 살 때, 옆집 아저씨를 따라 나서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주기 위해 축복으로 인도한 처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정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요.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 여러분, 그야말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라는 사실을 그저 신학적으로 성경 지식상으로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있는 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정말 현실화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데리고 다니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 내린 축복이요 야곱의 아들에게 임했던 축복의 경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오늘날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저들이 의심치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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