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5:16-22 /슬픔의 아들
슬픔의 아들 2003년 1월 5일본문 말씀: 창세기 35:16-22 35: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35: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35:21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성경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어디서부터 오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로부터 오는 겁니다. 인간에게 죄가 없다면 하나님의 고통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다가서시는 겁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고통을 꼭집어내지 못하는 성경 해석이라면 헛수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을 우회해서 고통없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들 합니다. 과연 누가 진정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고통과 함께 느끼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란, 함께 있는 인간의 죄로 인해 유발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고통의 원인이 나옵니다. 즉 성도의 허물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찔릴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찔리심을 보고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염두도 두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을 쳐다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참 안되었다. 우리는 이처럼 편하고 행복한데 예수님 혼자 불행하구나."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련과 우리의 처지가 무관한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오해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에게는 아내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레아요 다른 사람은 라헬입니다. 아내가 둘 있다는 것을 다복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둘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비록 레아보다 후손을 못 낳아도 상관두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라헬이 일찍 죽고 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있어 함께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라헬을 하나님은 일찍 데려가고 맙니다. 이렇게 되니 라헬의 입장에서는 언니 레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셈이 됩니다. 평생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마땅히 자신의 권리처럼 여겨왔던 라헬은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게 되고 동시에 남편의 뜨거운 사랑과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라헬은 죽어가면서 낳게 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즉 '슬픔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사실 그 베노니가 태어나면 그를 지극 정성 돌봐 줄 친어머니를 잃어버린채 살아가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다른 어머니에게 태어난 숱한 형들의 구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가야 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어머니와 태어난 형제는 오직 요셉 뿐입니다. 비록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게 되지만 유별한 사랑은 도리어 다른 형제로부터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입니다. 상상만해도 끔직한 불행한 일들이 새로 태어난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과연 이 아이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서 오는 특혜나 아버지 야곱의 돌보심도 이 슬픔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걸까요? 그런데 난산의 현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그 자식의 이름을 전혀 딴 이름으로 돌려놓습니다.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됩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나온 특별한 능력 발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잃은 이 아이가 어떻게해서 엄마의 죽음을 보여주는 아기가 아니라 능력의 오른손, 즉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점은 이 아이의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와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록 라헬은 죽었지만 라헬이 남긴 자식, 요셉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이 요셉에 대해서 얼마나 대단히 집착하고 사랑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창세기 37: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여전히 라헬편입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이 점이 화근이 되어 나머지 형제들이 이 라헬의 형제들을 무척 미워하게 됩니다. 급기야 요셉을 애굽나라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즉 아버지 야곱의 눈에서 사라지게 만든 겁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의 대상자가 없어진 것이 되었습니다. 라헬이 지녔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야곱에게 이전되었습니다. 야곱은 크게 웁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래도 라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베냐민이 아직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나 남은 베냐민마저 야곱의 품에서 앗아가 버립니다. 그 과정에는 잃어버린 자식 요셉이 관여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간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혈육인 동생 베냐민이 잘 있는지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사러 요셉 앞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이 잘 지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를 볼모로 잡고 동생 베냐민을 자기 앞에 나타나도록 조치했습니다. 일단 베냐민을 보게 된 요셉은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베냐민은 고난의 요셉과 고난의 야곱이 함께 만나게 되는 운반체가 됩니다. 그들은 고난 안에서 함께 만나는 것이 되고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을 조정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베냐민은 마냥 슬픔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매개로 하여 야곱이나 요셉이나 다른 형제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게 하는 역할을 맡은 자가 된 셈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만사형통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평소에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소망이나 소원 속에는 고통이나 고난이 빠져 있습니다. 어느 누가 자진해서 고난과 고통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보면 하나님의 고난과 고통이 없이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의 현실을 인도하시되 예수님이 당했던 현실속으로 데려 들어가십니다. 그속에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서러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비극이라고 느껴질 일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전혀 희망없음이 상태입니다. 마치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릴 때, 장차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리라는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 본인조차도 몰랐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야곱도 몰랐던 일입니다. 야곱은 도리어 요셉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이미 야곱에게 있어 죽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요셉을 총리대신 되게 하시므로서 형들이 지니고 있는 그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처럼 고통받는 자를 통해서 구원될 자의 죄를 지적해 들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다른 경우를 생각조차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가짜 하나님이요 가짜 예수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8:26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 즉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 귀에다 쉴새없이 탄식 소리를 퍼붓습니다. "이 철없는 것아. 네가 하나님의 고통을 알고 싶어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원이 안 이루어진다고 얼마나 불평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고통은 이러한 우리의 죄 때문에 발생된 것임을 우리로 알게 해주옵소서. 한 시라도 성령의 탄식 소리를 놓치지 않는 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