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1-4 /야곱의 세계
야곱의 세계2003년 1월 19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1-4 37: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우리는 야곱의 가문이 축복을 이어갈 것이라는 점을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그 하늘의 축복이 야곱 가문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에서의 가문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에서의 가문과 후손이 결코 저주를 요구하거나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 신으로부터 축복만이 떨어질 것을 고대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야곱의 계열에 속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주받도록 작정된자와 축복받도록 된 자나 모두 축복만 사모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계통은 좋은 축복을 추구하고 에서의 계열은 나쁘고 세속적인 축복만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이 축복을 못받는 겁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 계열도 역시 세속적인 축복에 열을 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저에게 장담하기를, 자신은 기복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답변하기를,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거듭난 사람이든 혹은 아닌자나 상관없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기복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났다고 자신만만해 보지만 어느 새 또 다른 종류의 기복신앙이 용출되어 자신의 마음을 이리 저리 흔들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전에 미쳐 예상도 못했던 기복 신앙적 요소가 자신의 내부에서 파도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성도는 불신자와는 달리, 세속적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할 줄 압니다. 비록 그 세속적인 면을 떨쳐 버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축복의 내용과는 상관없음을 압니다. 이 상관없는 축복 내용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장악하면서 은근히 달성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이 헛된 야망으로 인해 하나님에게 하소연하게 되는데 이 회개의 모습이 곧 성도에게만 일어나는 축복의 흔적인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소원를 처리하면 다른 소원이 그 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현재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원을 달성되도록 신에게 호소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이 곧 기복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이런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니 이런 현상을 곧 신의 특별난 축복 체험으로 간주하게 되는 겁니다. 소위 체험 신앙이라는 것이 이런데서 비롯됩니다. 소위 참된 신앙은 참된 체험으로 진위가 가려진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체험 신앙이 위험한 점은 다름아닌 같은 체험이 계속 일어나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같은 체험이 반복적으로 안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린 것처럼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체험으로 시작한 신앙이기에 체험으로 확인받지 아니하면 다른 대책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토록 신비로운 체험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가 그대로 다시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에 대어도 홍해는 갈라지지 않고, 베드로처럼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독약을 마시면 그 순간 죽어버립니다. 십자가에 매달려도 사흘만에 부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지옥가는 겁니까? 구원받지 못한 겁니까 이러한 주장은 초대 교회에서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대두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혼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어떤 처방을 내렸습니까? 갈라디이서 3:1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즉 "이 무지 몽매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너희들을 지옥가도록 혼란을 이르키더냐 십자가에서 벌어진 진이 코 앞에 있는데 말이야"하는 뜻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과 자기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 여러분,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일어난 이름 없는 한 사건, 십자가에 한 청년에 달려 죽게 된 사건, 그리고 거기서 흘려진 피가 무려 2000년이란 시간적 거리의 장애가 무색하게 오늘날에도 사도 바울과 똑같은 경우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구약에 숱하게 나와 있는 신비체험들은 모두 이 십자가를 겨냥해서 집중적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1:10-11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간 장벽도 소용없고 또한 추가시킬 신비 체험도 불필요합니다. 십자가 사건만으로 충분하고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만약에 더 축복적인 요소가 남아있다든지 보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도리어 모독하고 더럽히고 침뱉는 짓에 해당됩니다. 바로 구약의 모든 축복은 십자가 일로 그 최고치가 도달해 버렸다는 겁니다. 최고의 축복이란 더 큰 축복은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에 와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가진 그 정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같이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런 경우보다 더 특별난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다른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십자가 의미를 아직도 모르는 자입니다. 이처럼 구약은 신약의 십자가로 향하여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와 달리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적 축복을 받는 그 축복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우리는 주목해야 되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일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지켜 봐야합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의 내용은 사실상 야곱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이라는 축복을 내리시면서 그 과업은 우리 손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축복은 야곱이 받았았지만 그 축복된 일대기의 내용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야곱이 아니라 요셉입니다. 즉 요셉의 나중 위상이 곧 야곱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의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편애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받고 있는 아이에게 난데없이 연이은 꿈이 주어집니다. 일단은 멋있게 보입니다. 5-9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 꿈은 결코 요셉이 야심 품고 꾼 꿈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가 자식 중에서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으니 하늘의 축복이 틀림없이 자기에게로 쏟아질 것이라고 예상해서 꾸게 된 꿈이 아닙니다. 정말 난데없이 꾼 꿈입니다. 여기서부터 요셉의 힘든 여정은 출발이 됩니다. 요셉의 꿈은 중간 과정이 모두 생략된 겁니다. 먼 미래의 산봉오리만 보여준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에 도달되기까지 야곱과 다른 형제와 달리 요셉 본인에 얼마나 큰 시련이 주어질지 철없는 이런 요셉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시편 105:17-19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습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 말씀의 끝에 보면,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이 요셉을 단련시키는 겁니다. 물론 야곱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성도도 역시 요셉처럼 축복의 약속이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세속적인 축복을 은근히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연단받은 사도 바울은 성도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1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권능, 즉 천국의 능력으로의 진입은 놀랍게도 이 땅에서 십자가의 고난에로의 참여입니다. 물론 성도이든 성도아니든 모두 기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는 꿈 자랑은 하겠지만 그 가운데 생략된 중간과정의 험난함을 깊이 알고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미 축복받은 자이기에 그 어떤 험악한 고난도 이런 축복된 운명이 변경되지 않음을 더욱 더 알아가는 것이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닐까요? 바로 이런 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받는 자입니다. 십자가로 인도받는 사람은 늘 자신의 내면의 욕심과 다투면서 동시에 회개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갈등 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축복의 넓이와 깊이를 더욱 많이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철없는 우리를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축복이 주어졌는가를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