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26-36 /계시와의 만남
계시와의 만남 2003년 2월 2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26-36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37: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37:28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37:29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7:30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7:32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37:33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7:35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과의 만남에는 결코 원만하게 넘어가지 않고 그 대신 아픔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기대한 것과 너무나도 판이하기 때문입니다.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에 이런 판이한 뜻을 못본척 넘어가 버리고 자신의 탐욕을 인정해 줄만한 구절을 뽑아놓고서, "거봐 하나님도 내 뜻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잖아"라고 우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요셉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서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계시 내용은 결코 형제들의 속셈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받은 계시가 계시 내용대로 성취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 보기에는 그 일이 성공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요? 요셉이 자기들보다 높은 사람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저 밑바닥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요셉의 시련과 낮아짐이 오히려 진정 하늘의 계시가 본격적이면서도 제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는, 인간들이 쉽게 무시할 만하고, 함부로 다룰 만하고, 하찮게 처리될 만한 약하디 약한 대상을 통해 일을 진행시킵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는 돈이라면 맥을 못추는 선지자입니다. 돈에 따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축복과 저주를 퍼붓는 선지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돈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갑니다. 그런데 평소에 자기에게 고분고분하던 당나귀가 어느 길에서는 갑자기 앞으로 더 나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감히 짐승이 주인에게 대드는 것이 괘씸해서 선지자가 그 당나귀를 마구 때립니다. 그런데 그 나귀는 황급히 입을 열어 말을 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 나를 때립니까?"라고 말입니다. 당나귀는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막고 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약 그대로 통과하면 발람 선지자는 죽게 됩니다. 돈에 눈이 어두운 발람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나약한 짐승에게 화풀이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요셉이기에 형들이 함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요셉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저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요셉에게 내린 계시는 성취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뜻 때문에 최대로 괴로움을 당하고 희생이 된 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축복 속에서 인도받는다는 야곱입니다. 오늘 본문 33-35절에 보면,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래도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있는 자입니까? 물론 이후 사정을 미리 다 아는 우리로서는 요셉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은 하지만 전혀 이 사정을 모르는 야곱의 입장으로 우리가 같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우리는 그 야곱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운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야곱 눈 앞에서 분명코 요셉이 죽었다는 물증이 있고 증인들도 수두룩 한데 말입니다. 자식들이 가져온 옷은 분명 자신이 준 옷이요, 요셉이 형들과 함께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그 누가 뭐래도 분명히 요셉은 분명히 죽은 아들입니다. 야곱에게 있어 요셉은 모든 아들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아들이요, 유별나게 사랑의 전부를 던져 넣었던 그 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축복의 하나님께서 자신이 축복한 야곱에게 이런 아픔을 왜 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뜻이 지상의 인간과 만날 때는 절망과 모든 것을 무너지는 경우를 동반시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하나 뿐인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은 난데없이 그 하나 뿐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성경에 보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해서 하나님께서 얻을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비록 이삭을 사랑했지만, 그 이삭도 결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알았습니다. 즉 이삭을 아무리 사랑해도 이삭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겁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지만 거두신 자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때'는 곧잘 하나님이 주셨다고 좋아들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둘 실 때'는 우리는 웬지 그 '거두심'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흑심이 딴데 가 있다는 것을 들통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면서, 잃어버림과 얻음, 그리고 죽음을 통한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생생히 산 믿음의 모델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바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 내리진 시험의 출제 문제는 똑같이 야곱에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야곱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냅니다. 만약 같은 문제를 내었다면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주위 수풀 속을 주위 깊게 둘러 볼 것입니다. 행여 길가던 수양이라도 걸리지 않았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는 또 다른 문제를 냅니다. 이번에는 아예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완전히 죽어버려서 영영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태를 일으키신 겁니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히 절망스럽고 모든 희망과 사랑의 대상이 상실된 사태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물론 제 3자인 우리들 입장에서 아직 요셉이 안 죽고 살아있기에 하나님의 축복은 영속된다고 안심하겠지만 야곱은 그야말로 축복의 고리가 모두 절단되어 버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일을 하셔도 인간들이 전적으로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 놓습니다. 그래야지만 천국에는 온전히 하나님의 수고와 공로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시련은 단지 야곱 뿐만 아니라 형제들에게 겨냥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누구보다더 서로 사랑해야 될 형제이지만 단지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들은 요셉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계시를 품고있는 요셉을 가볍게 처리하면 처리될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리어 이를 계기로 해서 일이 더 커지게 하십니다.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생각할 때마다 더욱 더 가슴이 아파지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하신 것입니다. 쓸모짝 없다고 처리한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 강해진 죄의 무게 속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일이 더 커진 셈입니다. 이와같은 경우는 예수님에게도 종합해서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을 거추장스럽게 여겼던 대세사장은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들어서 가볍게 하려고 했습니다. 즉 요한복음 11:50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조해서 예수님을 처단해 놓고서는 모든 일이 깨끗하게 마무리 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되살아나실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요셉이 꼭 이런 식입니다. 요셉이 나중에 출세에서 형제들 앞에 나타날 때에 그들은 자신의 한 짓 때문에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결코 자신이 한 행위도 동기에 대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천국이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기적을 자주 시행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자기들 앞에서 신기한 기적을 베풀어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보여줄 이적은 요나의 이적 뿐이다"고 말입니다. 요나의 이적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일은 곧 인간들의 무지와 죄악을 부끄럽게 하기 위한 이적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합니까? 혹시 자기 힘으로 달성할 수 있는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런 인간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 앞에서 자기 행함을 언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에 절감하고 몸부림치는 자가 진정 구원받은 자입니다. 반대로 오로지 자기 이권만 생각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예수를 포기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인 자를 고쳐주고 대신 그 귀신들을 돼지 속에 집어 넣어 돼지가 바다에 죽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의 귀신을 이기신 일은 보지 않고 자기들의 재산이 돼지를 잃은 것에 대해서 못내 아쉬워하면서 예수님이 자기네 곁을 떠나주기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이 예수님을 단지 자기 목수짓하는 자기 혈육의 한 식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같이 예수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입니다. 제발 예수님을 알되 요나의 이적을 통해서 제대로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약한 것은 무시하고 강한 권력에는 아부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라면 이 습성으로 인해 예수님은 더욱 참혹하게 우리 곁에 다가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