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서평을 부탁드립니다.
[ 교회가 없다 ] 프랭크 바리올라 저 이영목 역 대장간(서울:2003)사람도 시대의 산물이요,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뜻과 비교해 보면 당연히 오류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오류를 오류가 아닌 것으로 어물쩍 넘겨서 그 시대의 참된 신의 계시처럼 사용하는데 있다. 성경은 들러리로 밀리고 인간들의 종교적 전승과 관행들이 신의 계시로서 전면에 나선다면 이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의 몸에 해당된다. 이것이 저자가 울분을 토하는 이유이다. 왜 성경을 전체를 볼 줄 모르느냐에 대한 질타이며, 인간들이 창안한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적그리스도적인 행위를 그만두라는 충고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어떠하며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다는 말인가?오늘날 예배 모습을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만인제사장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성직주의 중심 예배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이다. 초기 교회의 모임은, 교인 각자가 다 기능을 발휘하고, 자발적이고 자유스럽고 역동적이며 누구나 다 참여하는 특징이 있었다. 즉 수동적이고 요식 행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 미사 전통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오늘날 개신교 예배는 마치 설교를 중심으로 해서 전 후에 찬송을 배치하는 '샌드위치식' 예배가 주종을 이룬다. 성만찬 중심의 카톨릭 예배를 지독하게 비난했던 루터도 결국은 설교 중심의 예배로 변질시켰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크리스턴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기도 없이는 절대로 함께 모이면 안 된다. 아무리 짧은 모임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신성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결국 루터가 만민제사장주의를 부르짖었지만 정작 본인은 성직 안수제도를 철폐하지 않았고 고수 계승해서 오늘날 개신교의 확실한 전통이 되어 버렸다.18세기 경에는 감리교의 웨슬레에 의해 그동안 있어 오지도 않았던 저녁 예배를 일반화시켰다. 18세기의 미국의 부흥운동은 교회를 설교소로 만들어 버렸고 모임의 체험을 '복음전도 사역 기능'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이 취지가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선두자인 무디나 그 후의 빌리 그래함에게 와서는 심리적인 조작도 허용되는 쪽으로 지지케 했다. 20세기 들어와서 오순절 운동은 더욱 감정적으로 치달아서 집회 전에 성령의 움직임을 미리 예언하기도 하고, 은근히 성령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지경까지 왔다. 이것은 예배 시간을 성직 권위를 독점하고 있는 목사로 말미암아 같은 제사장적 은사를 지닌 교인들이 지배당하는 셈이 된다. 저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표현한다. 성경에 나와있는 선지자나 사도들의 설교는 결코 설교자의 1인 연설회가 아니다. 원래 메시지 선포는 쌍방통행의 대화였다. 그것도 정기적인 설교가 아니라 즉석에서 특별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설교가 시작되었으며, 대화체 형식을 띠어서 청중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설교가 중단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처럼 전문 설교자가 오로지 설교만으로 직업이 되는 관습은 옛날 헬라 철학 시대부터 있어왔다. 유창한 연설가에 의한 연설회는 일종의 여가 시간을 즐기는 정기적인 여흥이었다. 그래서 전문 연설가들은 청중을 보다 즐겁게 위해 복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오직 스타일을 위한 스타일 개발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연설이 대화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로서 오늘날 교회는 연설이나 듣는 공연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성경을 보라! 참 성도는 설교자의 설교에 의해 삶이 변화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 날마다 변화되는 것이다. 가르치는 은사는 모든 성도에게 다 지니고 있는 것이다. 쌍방이 서로를 가르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건물 양식은, 일반인들이 일상 집에서 갖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주기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것이다. 이것은 내부 구조에도 이어지는데 이분법으로 확고하게 구분되어진 공간으로 연출된다. 성직자인 목사의 보좌와 그 앞에는 단계가 현저하게 낮은 평신도들의 좌석들로 배치하므로 서, 상대적으로 설교단을 높이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즉 카톨릭의 제단이 개신교에서는 강대상으로 대체된 것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에 목사나 장로라는 특별 직책이 있는가? 성경 에베소서 4:11에 나오는 '목자(목사)'란 은유적 표현에 지니지 않는다. 그것도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들'이라고 복수로 쓰여졌다. 조직이란 누가 대표해서 관리해야 하는 책임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는 그런 자를 '장로'라 한다. 장로란 안수해서 새삼스럽게 뽑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모임에서 봉사해서 누구로부터 그 은사에 대해서 신임을 받고 있는 터이다. 장로회의 안수란 그 교회의 그런 상태를 외부에서 인정을 주는 것뿐이다. 장로로 안수 받는 시점부터 장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감독이란 결코 장로보다 높은 자가 아니다. 이것을 높게 간주한 자는 이그나시우스 교부가 처음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단독지도자'가 있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 단독지도체제는 로마 중앙집권을 본 뜬 것이다. 4세기 말에는 감독자들이 더 기가 살게 되었다. 그들에게 엄청난 특권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면세 혜택이 주어졌고, 공공 및 사회적 의무에서 면제되었고, 일반 법정에서 재판 받지 않고 오로지 자기들끼리 구성된 감독 법정에서만 재판 받았고, 군복무에서도 면제시켜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으로도 특별 계급으로 분리되었다. 콘스탄틴은 '성직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직자에게 고정된 급여(사역 수당)를 주라고 명령한 자이다. 처음 300년 동안에는 복음 사역자들이 사례비를 받지 아니한 것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성직자들은 복장부터 일반인과 차별시켰다. 클레멘트라는 교부는 '평신도'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구약의 제사장제도가 신약의 교회 안에서 제대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창하고 엄숙한 안수식은 바로 이 특권계급으로 들어오는 통과의식이었다. 안수를 통해서 특별히 그들에게 신적 권위가 새로이 부여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서 교회 안에서 만인제사장주의가 구현될 여지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루터나 칼빈이 실패한 내용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신자가 제사장임을 회복하는 대목이었다. 즉 한 사람 내지는 소수 사람만이 제사장 됨을 구체화시켜주고 그것을 정당한 주님의 뜻으로 비치게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루터는, 모든 지체가 제사장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재세례파 교인들을 난폭하게 짓밟았다. 루터는 너무나 반대한 나머지, 그런 사상은 '지옥불에서 나왔다고 했고, 그것을 믿는 죄는 사형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설교권은 일반 평신도들이 가질 수 없는 제사장직이라는 것이다. 유급 목사 제도의 위험은, 아무런 기술(자비량 할 수 있는)도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는데 있다. 따라서 목사에게 봉급을 정기적으로 주기 위해서도 교인들은 십일조라는 과중한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 사도들이 구약 십일조 제도를 들먹이면서 십일조를 이행을 요구한 적이 없고, 또한 3세기까지 사람들은 십일조를 행하지도 않았다. 주일학교란 미국에서 처음 생긴 것으로서, 부모 없는 불우한 아이들을 거리에서 떼어놓기 위해 실시된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이런 주일학교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의 초기 교육과 특히 신앙교육의 책임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오늘날 이런 엉터리 교회를 보면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 것인가? 예수님은 혁명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그러자 그 당시 성직자들은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그들은 이렇게 대들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교회는 성경을 밑그림으로 하여 우리 인간들의 손으로 새로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의 구절들을 뽑아 교회의 청사진이나 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 성경은 교회 관습의 지침서가 아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태어나야 한다. 신약에 나오는 교회 수를 세워보면 모두 35개 정도가 된다. 그런데 그 교회들은 예외 없이 모두 그리스도만 전하는 사람들이 계기가 되어 세워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라고 자신의 글을 이 물음으로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