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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42:1-7 /형들과의 재회강의창세기

형들과의 재회 2003년 3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42:1-7 42:1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42: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42:3 요셉의 형 십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2: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이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 함이었더라 42: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42: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42:7 요셉이 보고 형들인줄 아나 모르는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세상을 재미있게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것은 세상을 위에서 볼 줄 아는 안목만 있으면 됩니다. 사람들이 매사에 위기와 두려움을 갖는 것은 세상 전체를 통째로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요셉 같은 사람은 세상을 넓게 보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요셉의 형들은 아직은 세상 전체를 다 볼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요셉의 말 한마디에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창세기 42장 전체의 내용은 요셉과 그의 형들과 재회하는 장면입니다. 왜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될까요? 그것은 축복의 원래 주인을 찾아서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 나라의 최고 권좌를 누리는 것은 애굽 왕이 이뻐서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닙니다. 축복을 받아야 될 주인공은 야곱입니다. 창세기 27:29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의 계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함께 축복을 받게 되는 그 형들에 의해 도리어 요셉이 종으로 팔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7년 대 풍년과 7년 대 흉년을 일으켜서 축복이 원래 주인공으로 인수인계 되도록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자식들에게 호통을 칩니다. 온 천지가 흉년인데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만은 없다는 겁니다. 양식이 있다는 애굽으로 내려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7년 대 풍년을 일으키게 하셔야 곡식을 비축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도 심한 가뭄이 들어야 그 형들이 양식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 갈 수가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17: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것임이 자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 줄 자에게만 반드시 영생이 돌아가도록 세상의 모든 권세를 다 동원했다는 말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사람이 종교를 갖는 경우가, 우선 태어나면서부터 그 가정이 가정의 정신적 지주로서 종교가 자리잡을 때 가장 유리해 보입니다. 그리고 마음씨는 곱고, 그렇다면 의지가 강한 것이 아니라 매사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같은 쉽게 낙오하는 방편으로 종교의 세계로 접어든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오늘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여기신다면 그런 예수는 언제든지 방치할 수도 있고 걷어차 버릴 수 있는 예수입니다. 오랫동안 교회 다니면서 숱하게 예수님에게 기대를 걸어보지만 번번히 실망하고 오히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철저한 고생으로 달성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는 예수를 힘들게 계속 믿을 이야기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의 경우는, 자신의 의지로 꿈을 꾼 것도 아니요 자신이 권력에 아부해서 총리 대신까지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요셉은 이 축복의 원래 주인공을 만나서 그 분의 몫으로 전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전달할까요? 일반 종족들은 그저 돈이나 내면 그 액수대로 요셉이 양식을 팔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과의 만남에서는 양식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 내용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하고 또한 그들을 통해 고향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 전달 방식은 이러합니다. 요셉이 버림받은 상황을 다시 그들 가운데서 새삼스럽게 되풀이 하면서 일으키는 겁니다. 자식이나 동생이 하나 빠진 것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 겁니다. 과연 그 형들이 애닯아 할까요? 창세기 42: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왔을 때, 그 형들은 설마 동생이 총리대신까지 승진할 줄은 몰았습니다. 종으로 팔려간 자가 단시간 내에 최고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은 애굽이 갖고 있는 권세에 복종하여 그 권세의 혜택을 얻고자 온 것 뿐입니다. 그러나 요셉 입장에서 주려는 권세는 단순히 양식을 내놓는 권세가 아니라 원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그 권력을 주려고 합니다. 즉 요셉은 지금 형들보다 훨씬 세상을 넓고, 높고, 길게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형들도, 그리고 아버지 야곱도 이런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요셉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시고 그것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지를 그들도 알아야만 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억류하려고 합니다. 형들을 볼모로 잡아 배후에 계시는 아버지 야곱까지 요셉 쪽을 끌어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형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점검하기 위해 전에 요셉이 당했던 상황을 되풀이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합니다. "정녕 너희들은 간첩들이다". 그러자 형들이 당황해서 극구 부인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들의 배경은 분명합니다. 고향에 아버님이 계시고, 거기에 동생이 함께 있는데, 그런데 한 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잃어버렸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너희들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그것을 위하여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을 붙잡아 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마지막 동생을 이 앞으로 데리고 오라. 그 대신 양식을 가져가거라"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해 형들 사이에 큰 괴로움이 덮치게 됩니다. 마치 옛날 요셉을 내다버린 그 아픔이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더 얻겠다고 예수를 구태여 믿으려고 합니까? 뭔가 더 얻겠다고 하신다면 벌써 예수님을 차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얻고 싶어하는 그 세상을 것을 챙기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 존재인가를 지적받기 위해 예수님 앞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 앞을 훌쩍 떠나버리면 진정 자신의 죄인됨과 부족함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비신앙적인 자들이 교회에 나와도 진정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 앞에서 겸손하고 회개해서 그 대가로 주어지는 세상 것이 탐이 나서 계속 예수를 이용해 먹고자 예수님을 들먹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활한 태도이지요. 이런 자에게는 결코 영생이 축복이 전달되지 않는 법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셉도 그러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당황하면서 자기네들 끼리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역없이 그대로 듣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요셉을 버린 죄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권세의 혜택은 이런 절차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성도에게 뭔가 자꾸만 우리가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빼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대들기 까지 합니다. "하나님, 어찌 나에게 이런 시련을!"라고 화를 내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참된 성도는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동안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너무 잊고 있었구나. 아 예수님께서는 그 영생의 원천을 다시 깨닫게 하시는구나"라고 자신의 마음을 되돌리게 됩니다. 바로 이런 우연적인 일을 성도에게 자꾸만 발생시키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가진 권세입니다. 이런 십자가 아픔을 사이에 놓고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다른 길로서는 만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축복이란 그 내용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달라지는데 있습니다. 요셉에게 이미 현실화된 이 진리를 이제는 야곱의 가족 전부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본질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의 눈치를 살펴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모든 경우나 상황이 결국에는 성도에게 영생이 돌아오도록 조치 되어 있음을 저 높은 하늘 나라의 안목에서 다시 내려봅시다. 그렇다면 인생이 즐거워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서운 세상 위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더 높게 전개됨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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