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1-5 /야곱의 자식 사랑
야곱의 자식 사랑 2003년 3월 30일 본문 말씀: 창세기 43:1-5 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43: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43:3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3: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43:5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흔히 인생이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생·노·병·사' 라고 해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인생의 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축에 실려서 인생이란 흘러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유없이 태어나서 이유없이 죽어간다는 것이 참으로 인간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과연 진정 사는 이유가 없는 것일까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예 죽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과연 그 고백이 진심일까요? 사도 바울에게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것도 물론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축복이 자기 눈에 앞에 아른거리고 있음도 압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 이후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더 큰 축복을 위해서 현재의 축복을 버릴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의 공통점입니다. 성도는 연이은 축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코 한 번 받은 축복을 혼자서 관리를 잘해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뒤이어 계속 들이닥치는 축복으로 인해 이미 받은 축복도 늘 회수되어야만 합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사는 동네에 깊은 가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야곱은 혼자서 버티어 보려고 했습니다. 누구의 도움없이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없이 계속되는 가뭄은 야곱이 그동안 받았던 재물적인 축복을 다 상실하게 만듭니다. 인간적으로 따지자면 인내력에 한계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버티는 이유는 오로지 자식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까지를 보면 아버지 야곱과 유다 간의 대화가 나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왜 야곱은 자식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을 가집니까?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와 있으면서도 자식을 놔주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야곱에게는 다른 인생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축복은 자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식을 잃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에 위기가 초래한다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5:10-15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의 내용과 거기에 대한 야곱의 확신에 찬 행동이 나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그런데 그 가뭄 속에 놓여진 이 현실은 어떠 합니까? 가장 사랑했던 자식, 요셉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고, 갑자기 가뭄이 찾아들더니만 시므온마저 양식사러 갔다가 볼모로 억류되어 있고 , 그리고 또 애지중지 하는 막내 아들 베냐민마저 양식과 바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특히 베냐민은, 야곱이 젊은 청춘을 다 바쳐 얻었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어가면서 낳은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과 맞바꾼 자식입니다. 따라서 다른 아이는 몰라도 이 베냐민 만큼은 아버지로서 생명을 다하여 지켜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현재 야곱이 가장 아끼는 그 자식을 바쳐야 양식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다른 자식도 많은데 말입니다. 야곱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축복이 왜 자꾸만 훼손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산채로, 그것도 자기 손으로 하나님에게 불타는 제물로 바치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처럼 야곱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왜 축복받은 신앙인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꼭 주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축복은 그 다음 계속되는 축복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의 '축복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 사랑'이 전혀 달리 이루어지는 겁니다. '빼앗김'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에 담겨 있는 진정한 뜻을 모르게 됩니다. 마치 사라의 태가 죽어야 이삭의 탄생의 의의가 제대로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한 자들을 제대로 살리려고 하시는 겁니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베냐민을 데려오기 전에는 양식을 주지 않겠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양식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취지를 그들에게 전달해야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란 먹고 또 먹어도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나 축복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식은 연속되는 축복에 의해 인도받아야 합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양식으로만 인도받는 자라면 축복밖의 인물로 간주됩니다. 참된 축복된 자는 축복의 이어짐 속에 놓여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 점을 알았다하더라고 가뭄 속의 그의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자신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형편은 하나님께서 일부로 조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유지된다든지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란 그저 그런 생각조차 하나님에 의해서 빼앗기고 번복되어야 합니다. 축복이란 사람이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이 방해한다고 방해받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지닌 축복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요셉이 취한 행동은 보복차원이 아니라 새 축복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 생각의 밑둥치를 흔들어놓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허락하에 형들은 막내 베냐민마저 데리고 요셉 앞에 등장시킵니다. 형들에게는 그저 양식을 구해서 빨리 그 지리를 피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형들은 자신들의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쪽에서 약속을 지키고 자신들이 간첩이 아닌 것을 솔직하게 밝혔으니 총리대신이 그 성의를 인정하고 후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호의는 곧 '악으로 선을 갚은 꼴'이 되겠금 요셉이 조치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44:4에 보면,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형들 앞에서 나올 말은 전혀 없습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그들은 은혜를 악으로 갚은 배은망덕한 존재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요셉 앞에서는 고향에서 가지고 온 야곱의 귀한 선물과, 성의도 다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즉 모든 가치를 몰수당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살리고 죽이고 하는 것은 완전히 요셉의 손으로 넘어와 버렸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란 이런 형편에 있을 때만 그 완성에 대해서 제대로 와 닿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종교적 치장으로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찬양을 해도 그런 것은 은혜를 아는 모습이 아닙니다. 진정한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이 전적 무능력한 자이며, 축복주시는 분의 자비심이 아니면 도저히 용서되지 못할 자라는 것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이 성도가 사는 이유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잘나고, 뛰어나게 노력하는 모든 공적이 다 하나님에 의해 강탈당해야 하고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빈털터리가 되게 할 때, 비로서 이미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감탄 할 것입니다. 이 '빼앗김'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제대로 된 축복의 대상자입니다. 흔히 미국 영화에 보면 장례식 장면에서 목사들이 주로 거론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부터 시작하지요. 그런데 그 시편의 끝부분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대목을 우리 유심히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수시로 축복을 받습니다. 그 축복과 행운을 입었다고 여길 때마다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들면 그것마저 몽땅 회수당해야 합니다. 죽음의 시점에서는 모든 것을 압수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잔이 가득 넘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천국 자체가 바로 우리의 잔에 넘치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차라리 장막 옷을 벗고서 새로운 축복의 장막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좋은 것 있더라도 그것에 마음 빼앗기고 연연하지 마세요. 그것도 다음 축복을 위해 잃어버릴 것들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주신 것을 마치 억지로 받아낸 것처럼 자랑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만약 생긴다면 그 자랑마저 빼앗아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